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
5. 칠흑 비단 드레스
12신수.
동양을 수호하는 열두 마리의 신적 동물. 흔히들 알고 있는 ‘띠’, 그러니까 십이지신에서 말하는 동물들이었다.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12신수는 적합한 각성자들을 선별하여 계약을 맺는다고들 알려져 있었는데, ‘계약자’들은 고유 능력 외에도 특별한 스킬이나 특성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화신’으로 간택받은 1인은 신수의 모습을 빌릴 수 있는 ‘현신화(現神化)’가 가능하게 되거나 신수의 힘, 즉 ‘권능’을 부여받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다만 신수와 계약하는 일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힘들다 했다. 실제로 은하의 주변인들 중 계약자는 단 두 명. 훈련소장과 담당 교관뿐이었다.
그들이 직접 실전에 임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으나 신수와 계약한 이후 체력이나 근력 등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월등히 향상되었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알 수 있었다. 특히 담당 교관의 경우 3일 내내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신수와 계약을 맺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전투가 수월해질 거야.’
은하에게 있어서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은하가 고개를 들어 노란 메시지창을 응시했다.
“내가 아는 12신수는 12마리의 동물이야. 그곳에 고양이는 없는 걸로 아는데?”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뻣뻣하게 굳습니다.]
[잠시 헛기침을 한 뒤,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다며 말끝을 흐립니다.]
수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고양이가 계약을 제안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은하는 그저 독 안에 든 쥐 신세였으니 말이다.
그런 자신과 계약한다고 한들, 고양이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이라든지 변덕?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의심이 못마땅한 듯 수염을 씰룩입니다.] [네가 팔을 불에 지졌을 때 치료해 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냐며, 몸집을 부풀리곤 거들먹거리기 시작합니다.]“……네가 치료해 준 거라고?”
어쩐지 생각보다 몸 상태가 양호하다고 했다. 헌터의 치유력 덕분이라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을 만큼.
처음 보는 고양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이 열악한 상황에서 기회를 걷어차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일 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봐야 했다.
“……내가 만약 계약을 승낙하면 넌 날 이곳에서 내보내 줄 수 있어?”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며 갸르릉 소리를 냅니다.]
고양이에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 이 게이트는 검은색 게이트. 즉, 수수께끼에 싸인 언노운 게이트(Unknown Gate)라고.
‘역시 평범한 게이트가 아니었던 거야.’
그간의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이 게이트에 들어섰을 때, 균열의 색깔은 분명 흰색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언노운 게이트로 바뀌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하긴, 그것을 알 수 있었다면 ‘언노운’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
생각에 잠긴 은하 앞에 또 한 번 노란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다섯 가지 아이템을 모두 모아서 탈출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다섯 가지 아이템이라면?”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왼손에 들린 양산을 향해 턱짓합니다.]
“이게 다섯 가지 아이템 중에 하나라고? 그렇다면 나머지 네 개는─.”
거기까지 말을 이은 은하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눈빛이 바뀐 은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나머지 네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가 드롭한다는 건가?”
[딩동댕!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경쾌하게 실로폰을 두드립니다.]
[역시 똑똑하다며,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나머지 네임드들을 쓰러뜨릴 수 있게 네 권능을 나눠 주겠다는 소리군.”
달콤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제안을 승낙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다만 자신과의 계약에는 두 가지 제약이 따른다며 뒤늦게 덧붙입니다.]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이 있다. 오히려 아무런 조건도 제약도 없다는 말이 믿기 힘들 테다.
“어떤 제약?”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첫째, 13번째 신수인 자신에 대해서는 타에 언급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이름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합니다.]
신수에 대해 타에 언급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곳에 은하 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번째 제약이다.
‘이름을 달라고?’
은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네 이름은 자신의 것이 되니 더 이상 네가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은하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걸까, 다시 한번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날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확인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 승낙 / 거절]눈앞에 두 개의 버튼이 떠오른다.
주저하던 은하가 이윽고 손가락을 들어 ‘승낙’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파아앗!
[황금색 눈동자가 별처럼 빛납니다.] [개체 식별. 차은하.] [ – – – Loading – – – ]찬란한 황금빛이 은하를 에워쌌다.
[개체 식별 완료.] [곧 재생을 시작합니다.]은하를 둘러싸고 있던 황금빛이 돌연 순백색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동굴 전체로 빛줄기가 번져 나갔다.
아주 오랜만에 빛을 마주해서 그런지 눈 주변이 저릿했다.
마침내 빛줄기가 모습을 감추었을 때. 하얗게 번졌던 시야가 되돌아왔다.
“……!”
문득 고개를 돌린 은하는 들고 있던 양산을 툭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내 오른팔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이게 신수의 힘이라는 건가? 은하는 멀쩡하게 돌아온 오른팔을 만지작거렸다. 마법, 아니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힘이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자신 있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합니다.]이 고양이가 신수인지 요물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불가사의하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증명된 셈이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이름을 달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게이트. 몬스터.
자신의 꿈, 미래, 가족까지 앗아 간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은하는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은하의 손가락 끝이 ‘승낙’ 버튼에 닿는 바로 그 순간.
띠링,
띠링,
띠링……
짧고 경쾌한 알림음이 이어졌다.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은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와 영혼이 결속되었습니다!] [민첩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패시브 ▶ ‘밤을 읽는 자’ 활성화. 밤눈이 밝아집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전투 시 명중률이 대폭 증가합니다.]몇 개의 메시지창이 차례로 눈앞에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처음 보는 붉은 시스템창이 팝업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권능 ▶ ‘고양이의 발톱’을 획득합니다.]고양이의 발톱? 아니, 그보다 권능이라니.
계약으로 인해 주어지는 스킬이나 특성과는 달리 권능은 특별했다. 신수의 인정을 받은 소수의 계약자들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훈련소장이나 담당 교관도 권능은 얻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고양이의 발톱…….’
은하는 자신의 손톱을 확인했다.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제외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띠링띠링띠링……. 몇 번의 알림음이 더 이어진 끝에 고양이의 메시지창이 불쑥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띱니다.] [권능을 부여했으니 어디 한번 잘 이용해 보라며 당신을 응원합니다.]“잘 이용해 보라니─.”
은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아앙!
머리카락을 쭈뼛 세울 정도로 요란한 메아리가 쳤다.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묵직한 굉음도 잇따라 들려왔다. 은하는 본능적으로 ‘우아한 양산’을 움켜쥐었다.
동굴 내벽을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며, 거대한 앞발이 등장했다.
크르르르…….
[Lv.78 돌연변이 ‘붉은 눈의 흑호’가 당신을 발견했습니다!]두 번째 돌연변이 몬스터였다.
붕!
놈은 경고도 없이 은하에게 크게 앞발을 휘둘렀고, 은하는 나비처럼 사뿐히 그것을 회피했다.
‘빨라.’
몬스터가 아니라, 내가.
은하는 스스로의 움직임에 놀라며 제 손발을 확인했다. 여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Lv.78 돌연변이 ‘붉은 눈의 흑호’가 크게 분노합니다!] [상태 : 분노 – 몬스터의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콰직!
네임드 몬스터는 식인 상어를 연상시키는 이빨을 사정없이 부딪쳐 왔다. 양산으로 막아 내지 못했더라면 아마 벌집이 되었을 테다.
자그마한 씨앗을 모아 꽃을 피워 내듯, 은하의 두 손바닥 중앙으로 불씨가 모여들었다.
파앗!
이윽고 하나로 합해진 거대한 불씨가 기세 좋게 몬스터에게 적중했다.
크르르르…….
그러나 몬스터는 쓰러지지 않았다. 첫 번째 네임드 몬스터와의 전투 때보다 더욱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쓰러트리지 못하다니 Lv.10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듯했다.
다음 공격을 개시할 준비를 하던 와중, 은하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띠링!
[권능 ▶ ‘고양이의 발톱’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이용할 생각이었다. 은하가 결심하는 순간, 노란색 메시지창이 반짝 빛났다.
[권능 활성화에 성공하였습니다.] [별도 설정 전까지 ‘고양이의 발톱’이 상시 유지됩니다.]그런데 이어서 팝업되는 창 어디에도 권능 사용법에 관한 설명은 없었다. 짧게 혀를 찬 은하는 불친절한 메시지창을 빠르게 닫았다.
눈앞의 Lv.78 돌연변이 몬스터는 이전에 싸웠던 Lv.68 녀석보다 확연히 강했다. 오른팔이 돌아왔고 계약 효과로 각종 능력치가 상승했는데도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놈의 주의를 끌어야 해.’
그러나 이 텅 빈 동굴에서 무슨 수로 놈의 주의를 끌 수 있겠는가?
놈이 주변 종유석 기둥과 동굴 벽을 박살 낸 탓에 이곳은 숨을 곳 하나 없는 벌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벌판 위 놈의 사냥감은 오직 단 하나, 차은하뿐이었다.
손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꾹 주먹을 말아 쥐자 손에 남아 있던 불씨가 타닥─ 주변으로 튀었다.
그 순간.
……!
은하에게 고정되어 있던 붉은 눈동자가, 문득 은하에게서 불씨로 시선을 옮겼다. 불씨의 움직임에 따라 놈의 붉은 눈이 왔다 갔다 움직인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납니다.]‘……설마.’
은하는 무언가 확인하기 위해 또 한 번 천천히 주먹을 펼쳤다가, 이내 다시 말았다.
타닥.
남은 불씨가 잿가루와 함께 주변에 흩어졌다. 마치 반딧불과 같은 모습이다. 거대한 몬스터의 꼬리가 붕붕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어.’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은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하여 수많은 불씨를 만들어 냈다. 불씨는 마치 영혼을 가진 것처럼 이리저리 동굴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마치 쥐처럼.
붕!
네임드 몬스터가 제게 가까이 다가온 불씨를 향해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마치 은하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뛰어 봤자 고양이지.’
은하는 양산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양산 끝이 형형하게 빛났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놈은 두 번은 속지 않을 테니까.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틈을 보아 한순간에 돌진한다.
푸욱!
한눈을 팔고 있던 붉은 눈동자를 망설임 없이 찔렀다.
크와아아아아!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몬스터가 휘청거렸다. 거대한 몸집이 흔들리자 주변은 마치 지진이 난 듯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은하는 놈의 눈알에 박혀 있던 양산을 뽑아 이번에는 바닥에 내리꽂았다.
바닥을 힘껏 걷어차고, 그 반동으로 단숨에 높게 도약했다.
휘익─
놈이 시력을 되찾기 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해야 한다.
은하가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준 것이 스위치였다. 화르륵, 불꽃에 휩싸인 양산 주변으로 불씨가 흩날렸다.
강렬한 불길에 녹아내릴 법도 한데, 양산은 외려 기름을 두른 것처럼 그 불꽃을 보다 거대하게 만들었다.
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양산이 그린 둥그런 곡선을 따라 검고 날카로운 잔상이 남는다.
뻐어억!
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의 목이 180도 돌아갔다. 둔탁한 타격감보다도,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위력에 은하 본인마저 조금 놀란 듯했다.
목이 돌아간 채 바닥에 곤두박질친 몬스터는 이후 움직이지 않았다.
은하는 오르내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묵묵히 놈을 노려보았다. 몇 분 같은 몇 초가 흐르자 눈앞에 메시지창이 떴다.
[두 번째 네임드를 해치웠습니다!]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 – – – Loading – – – ]메시지창을 확인한 은하가 그제야 경계를 늦추고 상체를 숙였다. 목이 꺾인 몬스터의 가죽 위로 불씨가 튄 자국이 선명했다.
‘이 정도 크기면 가죽을 벗겨 이불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녀석의 가죽은 이미 구멍이 송송 나서 이불 역할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아쉬운 얼굴로 녀석의 시체를 살피던 와중, 다시 한번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경쾌한 BGM이 들려왔다. 은하는 시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들어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
뭐야, 그건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