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4
00803 A Midnight Night’s Dream(4/4). =========================================================================
이윽고 한소영은,
“그, 그런데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그거…. 아세요?”
어딘가 환하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방금, 거짓말하셨어요.”
흡사 비련(悲戀)의 여주인공처럼 말한 후, 몸을 돌려 대로로 뛰쳐나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
게헨나는 교교(皎皎)한 월광이 스민 침대에 누워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밤이 흐르는 하늘에는 썩 희고 깨끗한 달이 아스라이 떠올라 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것이, 이대로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가 탁 트인 밤하늘을 만끽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대신, 게헨나는 살짝 눈을 내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달을 보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곤히 자는 김수현의 가슴으로 수나가 낑낑대며 아등바등 기어오르고 있다. 혹여 깨기라도 할까 자꾸 흘끗거리는 모습이 꽤나 곰살맞다. 결국에는 완전히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수나는 몹시 만족한 얼굴로 김수현의 가슴에 살며시 고개를 묻었다. 아비의 품이 그리 좋은지 토실토실한 볼살이 미어터질 정도로 맞대어 문지른다. 그러나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게헨나를 보고는 움찔 몸을 떨었다. 눈이 가늘어지며 두 뺨에 홍조가 어린다. 게헨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나 입에 걸린 미소가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씩 이별이 다가오고 있어서일까. 스스로 느끼는 진한 아쉬움과 수나에게 향하는 뜻 모를 미안함 등이 뒤섞여 흘러나온다.
게헨나는 현재 생활을 즐겁다 느끼고 있었다. 김수현과 같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딱히 거슬리는 것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애초 약속한 것도 있거니와 이 세상은 수나가 있을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옥에는 ‘왕’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이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게헨나도 알고 있다. 자신이 곁에 있음으로써, 김수현이 여태껏 쌓아온 관계가 조금씩 어그러지고 있다는 걸.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다. 멋대로 암시를 사용한 결과 사달이 일어났다. 한소영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수현은 애써 괜찮다고 웃었지만, 축 처진 어깨나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침음은 게헨나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점차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물론 게헨나도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떠나는 이에게 흔히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 나쁜 기억은 두고 가라고. 그러나 게헨나는 웬만하면 좋은 기억을 가져가는 것만이 아니라 남기고도 싶었다. 이 바람의 범위는 굳이 김수현한테만 한정되지 않는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겸사겸사 그동안 신세 진 것도 갚을 겸, 어느 정도 베풀어줄 거리는 있을 터.
‘눈을 뜨면 조금씩 준비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문득 옆구리가 허전해 스리슬쩍 김수현의 품에 안기려 했지만, 잠든 줄 알았던 수나가 희번덕 도끼눈을 뜨고 노려봐 포기하고 말았다.
‘…이 녀석, 꽤 까다로운 왕이 되겠군.’
게헨나는 나직이 투덜대며 잠이 들었다.
*
약간 늦은 아침, 게헨나는 한창 달게 자는 수나를 두고 방을 나섰다. 느긋이 계단을 밟아 내리는 걸음은 1층 식당을 향하고 있다. 새벽에 생각한 것을 실행하려는 것이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리지 않아서 그런지 식당은 약간 한산한 정도였다. 게헨나가 들어서자 잠깐 대화가 끊겼지만,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그간의 행동으로 클랜원들도 어느 정도 불안감은 떨친 상태였다. 첫날처럼 극히 경계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게헨나는 곧 시선을 멈췄다. 오른쪽 구석진 곳에 늘씬한 각선미를 드러낸 여인이 탁자 하나를 차지해 앉아 있다. 몹시 집중하는 얼굴로 기록을 들여다보며 깃 펜을 끄적거린다. 가끔 성난 낯으로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게 무언가 되게 갑갑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잠깐 괜찮느냐.”
“아이 씨. 누구야?!”
“나다.”
“…아~아! 아~아! 아이(I)~씨(See)~유(You)~!”
제갈 해솔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쳤다가, 말을 건 상대를 보고 바로 끝말을 노랫가락으로 전환했다. 매우 빠른 대응이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좋다. 역시 갑갑할 때는 노래를 부르는 게 좋다니까?”
“…참으로 이상한 노래로다.”
“어! 게헨나 씨? 안녕하세요!”
“으음. 우선 그대의 명칭이…?”
발랄하게 인사한 제갈 해솔이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활짝 웃었다.
“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송 능력을 사용하는 제갈 해솔이라고 해요. 하찮은 마법사죠.”
“호오. 주제를 잘 알고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너무 자학하는 것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구나.”
“…저기, 비꼰 건데요? 게헨나 씨가 제 수송 능력 보고 욕했다면서요.”
“응? 욕은 무슨. 엄연한 사실을 어째서 욕설로 매도하는가.”
게헨나가 별꼴이라는 듯 코웃음 치자 서너 명이 키득거렸다. 어이없어하는 제갈 해솔의 모습이 그리 고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기야 그동안 오죽 잘난 척을 했느냐마는.
“이 개…. 헨나 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우선 앉겠다.”
“그러세요. 개, 헨나 씨.”
“흠. 왠지 어감이 이상한데.”
“아이, 기분 탓일 거예요.”
“그런가.”
무심히 말한 게헨나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기록과 깃펜을 가져갔다. 기록에는 한글이 아닌 고어(古語)가 중구난방으로 휘갈겨져 있다. 그러나 게헨나는 아무 상관 없다는 양 하나하나 차분히 읽기 시작한다.
제갈 해솔의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하도 연구가 진척되지 않아 코에 바람이라도 넣을 겸 밖으로 나왔는데, 방해받은 것도 모자라 침범당하기까지 했다.
그뿐일까.
“후후. 재미있는 생각이로다.”
중간중간 비웃거나,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깃 펜으로 쭉쭉 긋고, 또는 무언가를 천천히 적어 내린다. 심지어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마법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질 자신이 없다.’ 자존(自尊) 의식이 하늘을 찌르는 제갈 해솔로서는 도를 넘었다고, 참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물론, 그냥 생각만 했다.
“인간의 기준에 맞춰 최대한 쉽게 썼다. 그리고 거리를 잡든지 시간을 잡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거라. 발상은 좋다만,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욕심을 부리는 것이냐.”
게헨나는 핀잔 조로 말하고는 기록과 깃 펜을 돌려줬다.
제갈 해솔은 소리 나지 않게 세심히 주의하며 이를 갈고, 도로 받아 들었다. 기록은 마치 논술 답안지가 첨삭된 것처럼 어지러웠다. 제갈 해솔의 두 눈이 불을 뿜었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겠어!’ 라는 기세로 게헨나가 삭제하고 고쳤거나 새로이 보탠 부분을 읽는다. 사실 어디 한 군데라도 물어뜯을 부분이 없을까 내심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잠시 후.
“…….”
제갈 해솔의 낯빛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로 적었는데 당연히 알아볼 수 있겠지?”
물론이다. 애초 제갈 해솔은 고어를 익힌 사용자다. 허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제갈 해솔의 얼굴은 망치로 세게 맞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야릇한 신음까지 흘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 해솔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어쨌든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거주민이 아닌 지구인이지 않은가. 그러할진대 인간은 물론, 한 세상의 정상에 오른 지고(至高)의 존재가 전수해주는 지식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마,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한 방법이에요?”
황홀해 하는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그거야 네가 직접 해보면 알겠지. 내가 알려주는 건 요체(要諦)뿐, 그 이상을 이루는 건 네 몫이다.”
“그, 근데 이걸 왜 저한테….”
“식사 중에도 진심으로 탐구하는 모습이 어여뻤을 뿐. 항상 정진하거라.”
“…….”
실상은 김수현에게 도움이 되라는 의미였으나, 게헨나는 그럴 듯한 이유로 구변 좋게 말했다.
제갈 해솔이 정신을 차린 건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작게 났을 때였다. 게헨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뜬 제갈 해솔이 황급히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데 꽤 똑똑하구나.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이해했다는….”
“언니!”
소리까지 지르며 게헨나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식당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으, 응?”
“죄송해요. 실은, 저 거짓말한 게 하나 있어요. 진짜 이름을 숨겼어요.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줘요.”
“괘, 괜찮다. 네 이름 따위야….”
“제 진명은 제갈 해솔이 아니라요. …게헨솔이에요.”
“…하?”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저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요.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걸 어쩔 수 주워 키우셨다고요. 그리고 저한테 언니가 한 명 있다는 말씀도 하셨죠. 확실히 기억나요. 29년 만에 처음으로 말하는 비밀이네요. 호호.”
제갈 해솔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눈앞에 천고의 보물 상자를 발견한 듯한 눈빛이다.
“노, 놓거라.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언니. 게헨나 언니.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어렸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게헨솔이라는 이름의 친동생이 분명히 있었을…. 언니? 어디 가세요? 언니? 언니이이!”
*
게헨나가 첫날 타깃(?)을 제갈 해솔로 선택했다면, 이튿날 타깃은 정하연과 사라 제인이었다. 두 여인은 정령석을 건네받은 이후, 가끔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둘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게헨나가 은근슬쩍 끼었다는 것이다.
두 여인은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들도 모르게 게헨나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령 소환사’ 클래스는 여태껏 북 대륙에 출현한 전례가 없다. 또한, 일반적인 시크릿 클래스와는 달리 계승만 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인즉 맨몸으로 불모의 땅을 개척해나가는 모험가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 만큼 게헨나가 전수해주는 정령에 관한 지식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가뭄의 단비였다. 게다가 사라 제인의 경우는 뜻밖에도 커다란 선물까지 받았다.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친화력(親和力)의 고하로 가늠할 수 있다. 정령석은 인간이 친화력을 쌓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게 여간 쌓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영약을 먹거나 기연이라도 얻지 않는 이상, 일상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라 제인의 경우 상황이 상당히 난감했다. 정하연이야 틈만 나면 물에 몸을 담근다손 쳐도, 사라도 똑같이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껏해야 불 계열 저항 망토를 덕지덕지 걸치고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뿐이었는데, 이 문제를 게헨나가 가볍게 해결했다. 겁화(劫火)의 힘을 사용해서. 신화계(神火計)급의 불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조종할 수 있다는 권능을 이용한 것이다.
그냥, 그저 그런 불이 아니다. 최강이라 불리는 ‘종미(終尾)의 불’ 지옥의 겁화가 아닌가. 보통의 불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치욕이다. 이 정도의 불로 친화력을 올릴 수 있다는 건, 다른 의미로 천재일우의 기연이라 봐도 무방했다. 동시에 앞으로 사라의 정령사로서의 성장은 완전히 보장받았다. 게헨나가 조만간 떠난다고 해도, 최고라 불리는 ‘태고(太古)의 불’을 품은 김수현이 있으니까.
그렇게 사라는 온몸에 겁화를 뒤집어쓴 채로 온종일 생활했고, 이 현상은 머셔너리 클랜원들 사이로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라의 머리에 꽃이 꽂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클랜원들이, 곧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전투 사용자라면 누구라도 강해지기를 오매불망 열망한다. 그리고 게헨나가 회자정리(會者定離) 겸 하는 행동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뭣보다 그 오만불손한 제갈 해솔이 ‘언니 언니.’ 거리면서 따르고, 정하연은 학생으로 돌아갔다. 사라 제인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 봐도 상황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흘째 되는 날. 머셔너리 캐슬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클랜원이 나와 있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혹시라도 게헨나의 눈에 띄지 않을까 기대해서 나왔으리라.
그러나 머셔너리 클랜에는, 그 누구보다 게헨나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이가 있었으니.
“우오오오오오오오!”
두두두두두두두두!
바로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달려오는, 비비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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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친다!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