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7
00806 새로운 시작. =========================================================================
김수현이 돌아온 지 오래잖아 김유현은 집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아, 사용자 임한나?”
조용히 복도를 걷던 김유현은 계단에 서 있는 임한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임한나는 예의 상냥한 미소로,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정중히 몸을 숙였다. 옆에 서 있던 안솔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셨던 겁니까?”
“네. 배웅해드릴게요.”
그래도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의 로드인데 이렇게 홀로 돌아다니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뜻을 알아들은 김유현은 어색이 볼을 긁적였다. 임한나는 민망하다는 낯빛을 보였다. 원래는 김수현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두 남녀는 곧 차분히 계단을 밟아 내렸다. 안솔은 멍하니 쳐다보다가 서둘러 둘을 따랐다. 셋은 한동안 말없이 내려가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안솔이 중간중간 입을 열려 했지만, 그때마다 임한나가 몰래 눈치를 주거나 기침을 해 말을 막았다.
이윽고 1층에 다다르고 성 입구를 벗어났을 즈음, 김유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여인이 돌아갔는데 아직 걱정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렇죠. 아름다운 이별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후회나 미련이 많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확실하게 말해놨으니까요.”
“정말이요?”
임한나의 반문에 김유현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조금 신경 써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겠지요?”
“후후. 그럼요. 상처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에요. 저희도 이날만 벼르고 있었다고요?”
정작 말은 그렇게 했으나 원망은커녕 온화한 목소리였다.
셋은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에 도착했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아무튼, 수현이가 못 알아듣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오히려 머셔너리 클랜원분들이 고생 많으셨죠. 그리고….”
“네. 바가지는 적당히 긁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임한나가 해맑은 얼굴로 시원스레 호언했다. 김유현은 한 차례 쓰게 웃고는 목례를 마치고 성큼성큼 정문을 벗어났다.
“끙….”
잠시 후, 서서히 멀어지는 김유현의 뒷모양을 안솔은 복잡한 눈으로 하염없이 응시했다.
북 도시로 돌아간 김유현은 클랜 하우스에 들어가자마자 백진하를 호출했다.
“진하야. 그 일은 어떻게 됐지?”
“그 일이요?”
“비밀 도서관.”
“아아~. 그거 거의 준비 끝났어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여기저기서 요청이 쇄도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요청이 쇄도한다고…. 좋아. 일단 입단속부터 단단히 시켜.”
“네?”
백진하의 반문에 김유현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미미하게 웃었다.
“아직 수현이가 꿈에서 해롱거리고 있거든. 정신을 차릴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처럼 두 눈이 날카로이 번들거린다. 백진하는 흠칫 물러났다. 김유현이 저런 눈을 보이는 건 속으로 무언가 꾸미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음험하지는 않으나 위험한 느낌이다. 백진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나무랄 데 없는 클랜 로드지만, 동생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수현아. 기대해라.’
슬슬 물러나는 백진하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유현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우리는 돌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거야.’
*
강렬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눈을 뜨자마자 쫓기듯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직행. 간단히 세안을 끝내고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도 마쳤다. 그리고 바로 집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한다. 언제나와 같은 익숙한 일상이 이어진다.
성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항상 맑고 고요한 느낌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고는 한다. 짚이는 바는 있다. 탁 까놓고 말해보면 게헨나가 돌아간 지 아직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사라진 게헨나를 찾는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들쑤셔놓았으니 아마 내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는 게 아닐까 싶다.
게헨나와 지낸 나날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클랜원들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마음 편히 기절했을 때 클랜원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게헨나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여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지켜봤을까.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괜찮다고 여겼다. 형의 말을 듣고서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백 번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웃기는 일일 터.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는 것. 게헨나와 같이 있는 동안은 꿈결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꿈에서 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형의 말대로 ‘귀환’에 온 신경을 쏟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랍을 열고 조승우를 호출했다. 잠깐 목걸이가 눈에 밟히기는 했으나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자 조승우. 보고서는 전부 읽었는데요. 몇 가지 눈에 띄는 게 있네요.”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 때문에 그러십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아직 몇 주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사용자 고연주가 계속 출퇴근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 그건….”
“제 건강 때문이라면 이미 회복한 지 오래니까요. 이효을이 허락했다손 쳐도, 자꾸 이렇게 왔다 갔다 해봤자 결코 곱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내일 안으로 돌려보내세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조승우는 내 말이 맞는다는 양 끄덕거리며 깃 펜을 끄적거렸다.
“그리고 요즘 클랜원들 임무 현황을 못 봤는데. 어떻습니까?”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지요.”
조승우가 씩 웃으며 품에 손을 넣는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전공 책과 맞먹는 두께를 자랑하는 기록묶음이 꺼내지고 있다.
“참고로 크게 놀라실 겁니다.”
“그, 그래요.”
나는 미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연초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주르륵 기록을 훑은 순간 그대로 연초를 뱉어버렸다. 첫 장부터 ‘이유정’이라는 이름이 도배돼 있다.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 여섯 장, 일곱 장, 여덟 장…. 와 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임무를 한 거야? 내 표정을 봤는지 조승우가 웃는다. 나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가능합니까?”
“글쎄요. 개인적으로 자신은 없지만, 하루에 두 시간도 안 잔다고 합니다.”
“아니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도 어서 B 등급으로 올라야 한다고만 말하니…. 허 참.”
조승우가 질렸다는 듯 머리를 가로젓는 찰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의 감각이 살아났다. 귓속에 ‘어서 B 등급으로 올라야 한다고….’ 라는 말이 자꾸만 메아리친다. 갑자기 이유정의 호언장담이 뇌리를 스쳤다.
‘B 등급에 오르면 오빠한테 따먹히러 올 테니까!’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나는 헛기침과 함께 기록을 덮었다.
*
조승우와 이야기를 끝낸 후 나는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하루 일정이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빡빡이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아카데미에도 한 번 방문해야 했고, 이효을과의 만남 약속도 잡혀 있었으며, 야간에는 밤의 거리에 가봐야 한다. 뭘 사러 가는 건 아니고, 오늘이 첫 개장이라 서지환의 방문 요청이 있었다.
“응?”
“오, 오라버니.”
그러나 밖으로 나갔을 때 안솔이 벽에 기대선 채 발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걸 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저….”
“……?”
“그게….”
“안솔. 오늘 오빠 좀 바쁘거든.”
“자, 잠시만요! 괘, 괜찮으세요?”
안솔은 덥석 나를 붙잡으며 외쳤다.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괜찮을 것도 안 괜찮을 것도 없는데.”
“그,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호, 혹시 있잖아요.”
“한 번만 더 말 끌면 그냥 가버릴 거야.”
“게헨나 님이 보고 싶으면 제가 또 소환해드릴게요!”
살짝 엄포를 놓자 안솔이 엄청난 속도로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올망졸망한 눈을 내려다보며 나는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안솔.”
“네, 네?”
살며시 어깨를 짚자 안솔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하지…. 말라고요?”
“그래. 너도 이번에 깨달았을 거다. 네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야.”
“그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안솔의 힘은 이제 정말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게헨나 다시 보겠다고 무차별로 상자를 열었다가는 어떤 재앙이 찾아올지 모른다. 금번 ‘빙하의 설원’ 원정으로 절절히 체감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네 마음은 고맙다.”
안솔의 어깨를 툭툭 치고 천천히 지나쳤다. 낯빛이나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뭘 망설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억지로 다그쳐 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고, 생각을 정리하면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바쁜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건, 이미 해가 저물다 못해 달이 완연히 떠올랐을 때였다. 밤의 거리 자체가 새벽에 열리는 시장이라 애초 늦을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새벽의 정적 때문일까.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묘하게 쓸쓸하고 힘이 없다. 나는 일부러 어깨를 펴고 걸음에 힘을 가했다. 가기 싫다 외치는 발을 억지로 끌었다. 어차피 혼자 자는 건 익숙하니까.
잠시 후.
집무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누우려는 찰나, 돌연히 시야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히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간 걸로 기억하는데 책상에 무언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글씨가 빽빽이 적힌 B4 크기의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의외였다. 누가 이걸 갖다 놓은 걸까?
“음….”
특이한 기록이다. 대충 훑어보니 앞면에는 한글이 뒷면에는 고어가 적혀 있다. 어디 먼저 볼까 하다가 우선은 뒷면부터 보기로 했다. 한글이 편하기는 하나, 단순히 읽기만 하는 거라면 고어도 7, 8할 정도는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럼 어디….
『혹시 이것을 먼저 읽고 있다면, 앞부터 읽는 게 좋을 게다.』
흠.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문체가 꽤 건방지다. 문장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서도. 어쩌면 비비앙이 장난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 읽어볼까.
『뭐, 굳이 먼저 읽겠다면 딱히 상관은 없다만.』
…놀리냐?
『사실, 뒷면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뭐지? 갑자기 기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장난 쪽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잖아.
『여하튼 여기서부터는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 그래서 직접 적기로 했다. 보아하니 눈앞의 아이는 이 글자를 모르는 것 같거든. 허나 그대는 알아볼 수 있겠지?』
…잠깐만. 눈앞의 아이라고? 이 글자, 그러니까 고어를 모른다고?
『그대여. 부디 괜한 걱정이기를 바라면서도, 조언 겸 몇 가지 경고를 남기고자 한다.』
“그대여? 이 말투는….”
그때였다.
불현듯.
『우선은, 악마라는 놈들에 관해서다.』
오싹,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식은땀이 등 고랑을 타고 주룩 흐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기록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하하. 몇몇 독자 분들께서 김유현의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셨군요.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심한 말이 아니라, 일침(?)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동생 바보처럼 굴다가, 오랜만에 형 노릇을 했다고 생각해요.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소리죠. 물론 김유현도 말을 하기 전에 물었습니다. 아마 김수현이 귀환 생각을 버릴 정도로 게헨나를 좋아했다면, 김유현은 차원 이동에 온 힘을 쏟았겠지요. 그러나 김수현은 김유현의 ‘계획은 살아 있냐.’ 는 물음에 끄덕였고,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이제 그만 꿈을 깨고.
이제 그만 게헨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현실을 봐라.
네 주변(머셔너리)을 둘러보고, 귀환 계획에 힘을 쏟아라.
부디 김유현이 ‘흑화’됐다는 코멘트에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