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85
#1184.
격멸하다 (4)
“후욱! 후욱! 후욱!”
김원혁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피가 몰려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달아올랐다.
생각이 사라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가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지금 이곳은 전장이다.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잠시만 딴생각을 해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치열한 전장의 한중간이다. 그런 곳에서 머릿속이 비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앞에서는 폭음이 연이어 터진다. 저 뒤쪽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매캐한 냄새와 코를 찔러 들어오는 피 냄새, 그리고 좌우에서 느껴지는 진한 땀 냄새가 한데 뒤엉켜 뭐라 말할 수 없는 짙은 향을 내뿜는 중이다.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때 같은 느낌이랄까?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귀는 윙윙거리고……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 눈에 들어오는 세상은 평소 그가 알던 세상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때, 뭔가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길쭉하고 새하얀 뭔가가…….
“정신 차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뒤통수에서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카가가각!
“아!”
순간, 세상이 빨리 감은 것처럼 쾌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원혁은 알고 있다.
이건 세상이 빨리 움직이는 게 아니다. 조금 전까지 느릿하게 현실감 없이 돌아가던 세상이 제 속도를 되찾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음들이 그의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정신 안 차려!”
“…….”
김원혁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로 날아들던 일본도가 옆에서 튀어나온 봉에 막혀 있다. 저 봉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저 도를 막지 못했을 테니까!
“이 쪽발이 새끼들이!”
일본도를 밀쳐 낸 봉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앞으로 찔러 들어간다. 그 강렬한 기세에 치고 들어오던 일본인들이 주춤한다.
“배에 힘주고 이 악물어, 새끼들아! 하나 죽으면 옆도 같이 죽는다! 내 목숨만 지키는 게 아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병신같이!’
여기는 전장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목이 잘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그는 방금 한 번 죽을 뻔했다. 위기감이 확 밀려오면서 전신에 소름이 확 돋아난다.
“하아아아아아!”
전장에서 필사적인 것은 그만이 아니다.
달려드는 일본인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돌진한다. 눈에 선 핏발과 손등에 돋아난 핏줄, 그리고 입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입김이 그가 지금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흐아아아앗!”
김원혁도 지지 않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강렬하게 주먹을 휘둘러 달려드는 일본인을 후려쳤다.
퍼억!
그의 주먹이 일본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그와 동시에 일본인이 휘두른 도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에서 화끈한 감각이 작렬했지만, 김원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쓰러지는 일본인을 그대로 걷어찼다.
쾅!
의식을 잃은 이가 바닥을 나뒹군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바닥으로 구른 이를 짓밟으며, 일본인들이 미친 듯이 돌진해 왔다.
“후욱! 후욱! 후욱!”
정신은 차렸지만, 상황은 변한 게 없다.
이놈들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물론 이들을 날뛰게 만드는 것은 저 타오르는 불꽃과 김원혁이 보아도 오싹한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바토르의 존재일 것이다.
“크하하하하핫! 어딜 가느냐! 이 쪽발이 새끼들아!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한다!”
바토르는 말 그대로 지옥의 악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전신을 붉게 물들인 그가 온몸에서 붉은 혈기를 내뿜으며 날뛰는 모습은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김원혁이 보기에도 이리 공포스러운데,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등 뒤에서 굶주린 호랑이 열 마리가 쫓아오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는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수도 없이 들어온 격언이다. 무인이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절대적인 진리와도 같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게 아니겠는가.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차가운 머리를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겠지.
“아아아아아악!”
그에게 달려들던 일본의 무사가 옆에서 날아온 검에 옆구리를 꿰뚫렸다.
냉정하게 따져 봤을 때, 지금 옆구리를 찔린 이는 김원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일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리 진열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저리 쉽게 공격을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무학이란 마음가짐이 반.
등 뒤에서 바토르가 날뛰고, 동시에 불이 번져 오는 상황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침착하게 시간을 들여 공략한다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는 벽도 단숨에 돌파해야 한다면 통곡의 벽으로 변해 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김원혁은 그 벽의 구성원이었다.
“후욱!”
방진훈이 한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전장은 그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
이곳은 지옥이다.
노력했다? 최선을 다해왔다?
그럼 저들은?
지금 옆구리를 꿰뚫리고 순식간에 난자당해 튕겨 나가는 이는 노력을 게을리했던가.
자신보다 나이도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나이에 그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에 올랐다면, 분명 김원혁 이상의 노력을 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노력을 보상받을 일도 없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이 전장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 같은 건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만둬라. 솔직히 나도 너 하는 꼴 보니, 방 이사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다. 너는 친구로서는 좋지만, 너한테 등 맡기고 전쟁터로 가고 싶지는 않다.”
그가 성주찬에게 한 말이다.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뭘 안다고 지껄여 댔던 거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났다고 지껄여 대던 주둥아리를 뜯어버리고 싶다. 지금 그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감히 성주찬에게 그딴 말을 지껄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도 나는 전장에서 내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천만에.
그건 자신이 아니다. 그냥 만용일 뿐이다.
김원혁은 처음으로 무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이곳에서는 지금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누가 어떻게 살아남을지 아무도 모른다. 가장 안전한 곳을 지키는 이도 죽음이라는 섬뜩한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어느 누가 어떻게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무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김원혁은 그동안의 자신이 총회의 보호 속에 무위도식하면서 무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살았다는 걸 뼈저리고 실감했다.
최전방에서 강진호와 이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동안 김원혁은 그 활약에 도취되었다.
따져 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지금 총회가 쌓아 올린 영광과 발전은 그들이 피를 흘린 대가이다. 김원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뒤에서 지켜본 주제에 총회의 발전에 자신도 한몫을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고양감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받는 중이었다.
“끄으으으으으…….”
찔러 넣은 검이 뼈를 가르는 섬뜩한 느낌이 손으로 전해져 온다. 검이 복부에 틀어박힌 이가 섬뜩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김원혁을 노려보았다.
도를 쥐지 않은 손이 천천히 김원혁의 얼굴을 향해 뻗어온다.
죽어가는 이의 기백.
밀쳐 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김원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가 잔뜩 묻은 손이 김원혁의 얼굴을 긁어 댄다.
피부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할 만큼 힘없는 손짓. 이마에 닿은 손이 얼굴을 쭉 한 번 긁고는 힘없이 떨어진다. 축 처진 몸이 둔중한 무게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으…….”
발로 밀어내든 손으로 밀어내든 검을 뽑고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후욱, 후욱… 후욱!”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흐릿하다. 눈 속으로 흘러내린 피가 들어가서인지 제대로 눈을 뜨기가 어렵다.
“아아아아악!”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아악! 내 팔! 내 팔! 아아아아악!”
현실감이 다시 멀어진다.
귓가로 들려오는 비명들이 거짓말 같다.
김원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에 받친 얼굴을 한 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찔러 댄다. 주먹으로 내려치고, 발로 걷어찬다. 무학을 익힌 이들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군인 같은 모습이다.
달려드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미학을 철통같이 지켜 대는 게 일본인의 특성이라건만, 지금 달려드는 일본인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가눌 수 없는 증오심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그저 달려들고 또 달려들 뿐이었다.
서로 비슷한 표정을 한 이들이 서로에게 칼을 휘둘러 댄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팔다리가 사방으로 잘려 날아간다.
“뭐 해, 이 새끼야!”
“나…….”
“뒤로 빠져!”
“예?”
“뒤로 빠지라고, 이 새끼야! 당장!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어…….”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
뭔가가 김원혁의 시선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달려드는 이들을 뛰어넘으며 김원혁이 있는 쪽으로 돌진해 온다.
지금까지 달려들던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 뭔가 희끗한다 싶더니, 금세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고수.
그가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쓰레기 같은 조선 놈들!”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일본도가 섬전 같은 속도로 내질러졌다.
이상하지.
분명 눈으로 볼 수 없는 속도일 텐데, 그 도가 날아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이 피할 수 있다는 듯은 아니다. 김원혁은 날아든 도가 자신의 배를 파고드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푸욱!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화끈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몸이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무너져 내린다.
“아…….”
깨닫는다.
죽음.
한 발쯤 걸치고 있던 죽음의 영역이 그에게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 어둠에 완전히 휩싸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그때.
턱.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콰앙!
그와 동시에 폭음과 함께 그에게 도를 찔러 넣던 이가 두어 걸음 뒤쪽으로 밀려났다. 배를 찔러 들러오던 도가 뽑혀 나가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은 손이 그를 뒤로 확 끌어당긴다.
“부상자 뒤로 빼, 이 개새끼들아! 무인이라는 새끼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동료를 처 내버려 둬?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익숙한 목소리.
그를 뒤로 잡아당긴 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 김원혁을 바라보았다.
‘방 이사님…….’
방진훈이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보고는 재빠르게 말했다.
“쫄지 마, 새끼야. 고만큼 찔린 정도로 안 죽어. 뒤로 빠져서 상처부터 돌봐!”
누군가 그를 받아 드는 느낌이 났다.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지는 김원혁의 눈에 방진훈의 널찍한 등이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애들이랑 놀지 말고, 나랑 놀자, 이 개새끼야!”
여느 때의 방진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