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29
#1928.
분쇄하다 (3)
“한 놈이 더 있던 것 같은데?”
“달아난 모양입니다.”
장민이 눈을 찌푸렸다.
“기회가 있을 때 한 놈이라도 더 잡아놔야 했는데.”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입니다.”
위긴스의 자평이 장민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걸레짝이 된 놈을 놓쳐 놓고는 성과를 논할 수 있나. 실수는 실수지.”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들이 막 도착한 상황에서는 눈앞에 있는 파권과 낭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 인원으로 도주가 불가능하게 제압할 수 있느지를 측정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장민의 마음도 이해할 것 같다.
둘과 셋은 명백히 다르다.
둘을 잡아낸 것도 어마어마한 성과이겠지만, 셋을 잡아냈다면 기쁨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겠지.
‘십이비도라…….’
위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의 우리로는 아직 대적하기 어려워.’
좋게 말하자면 분전했다.
과거에 백연홍 한 명에게 네 사람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털린 것에 비한다면 비약적인 발전이고 눈부신 성과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저 바토르가 일방적으로 패했고, 장민조차 마지막에는 부상을 입은 낭곤을 압도하지 못해 위긴스와 방진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위긴스가 그들의 앞에 쓰러져 있는 낭곤의 시체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뒤에서 로드께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군.’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다.
십이비도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동시에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한 명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공포감이 동시에 몰려온다.
남은 십이비도는 열.
그리고 흑왕 역시 건재하다.
이번에야 기습적으로 그들을 덮쳐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저들 역시 총회의 공격을 대비할 터. 아마 지금처럼 쉬운 싸움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승리는 승리입니다.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해 두는 게 좋지요.”
그 말을 들은 방진훈이 피식 웃었다.
“한 놈을 여럿이서 다굴 쳐 잡았는데,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자네는 안 기쁜가?”
“저야 좋아 죽죠. 다굴이고 나발이고 이기면 장땡 아닙니까.”
“…….”
새삼 방진훈이라는 인간의 인성을 다시 생각해 보는 위긴스이지만, 사실 그 말이 틀린 것도 없었다.
정당한 대련이나 시합이라면 정정당당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지 모르겠지만, 이건 전쟁이다. 전쟁에서 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을 쓰든 상대를 쓰러뜨려 이기고 살아남는 것이 정의다.
위긴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홍왕과 마주 서 있는 강진호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뒤로 언제 도착했는지 이현수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저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이제 도착해 놓고 힘든 척하고 있네.”
“……한심한 인간이라고 하지.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니까.”
방진훈의 독설에 위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강진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몸은?”
“……버틸 만하다.”
홍왕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마왕에게 구원을 받는 상황은 그로 하여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문 홍왕이 강진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별말씀을.”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저승 구경을 할 뻔했군.”
“모를 일이지.”
“그런데…….”
홍왕이 의혹에 찬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네 위치?”
“아니. 그야 차이커창에게 들었겠지. 내가 저들에게 당할 거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뜻이다.”
“별로 어렵지는 않아.”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당한다는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어디에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만이니까.”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너희는 나름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청마…… 아니, 흑왕이라는 놈은 그런 놈이다. 뱀을 잡아먹는 뱀 같은 놈이지.”
“…….”
“결과를 알고 있다면 개입이야 어렵지 않지. 보시다시피.”
홍왕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앞뒤 사정을 따질 것도 없이 그들이 당연히 흑왕의 손에 놀아날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이 그의 속을 뒤틀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아마 놀아난 건 나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건 무슨 의미지?”
“내가 여기에 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놈이 정말 몰랐을까?”
홍왕이 미간을 좁혔다.
“모를 일이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반 정도는 예상을 했을 거야.”
“반이나 예상을 했는데 십이비도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는 건가?”
“오해가 있군.”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잊지 마. 청마에게는 수하도 없고, 동료도 없어. 모든 것은 도구에 불과하지.”
“…….”
“도구는 값만 맞다면 언제든 팔아 치울 수 있는 법이야. 더 큰 걸 위해서는 버릴 수도 있고, 간단한 확인을 위해서 부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지.”
청마는 끊임없이 강진호에게 물어왔다.
개입할 것인지.
아니면 침묵할 것인지.
그의 친구로서 같은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의 적으로서 반대편에 설 것인지.
그리고 이제 청마는 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궁금하군.’
강진호의 대답을 들은 청마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
“쿨럭!”
홍왕이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한다.
멀쩡한 척해왔지만, 원정이 상한 이상 혼자 내부를 다스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돌아.”
“…….”
“왜? 내가 이틈에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홍왕이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지금 강진호가 마음을 먹는다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자신 따위는 눈 깜짝할 새에 죽여 버릴 수 있다. 그런데 등을 보이는 게 뭐 그리 큰 일이겠는가.
“내 살다 살다 마두에게 등을 맡기게 될 줄은 몰랐군.”
“그게 인생이지.”
“인생이라…….”
피식 웃은 홍왕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강진호가 말없이 그의 등에 한 손을 가져다 댔다.
움찔.
홍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토록이나…….’
몸 안으로 파고드는 기운이 너무도 이질적이다. 마치 물 대신 기름을 마신 것 같은 끔찍한 구역감.
‘이게 마기.’
이미 마기는 질릴 정도로 겪어보았지만, 외부의 마기를 상대하는 것과 그 스스로 몸 안으로 마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강진호가 그를 배려하여 최대한 정제된 마기를 밀어 넣고 있을 게 분명함에도 몸을 굴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불쑥 불쑥 치밀어 오른다.
홍왕이 이를 악물고는 눈을 감았다.
육체를 고정하고 밀려드는 마기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강진호의 마기가 그의 몸을 타고 휘돌기 시작한다.
우득! 우드득!
뒤틀린 기맥을 바로잡고, 부서진 기형을 강제로 복구한다.
그건 환자를 치료하는 부드러운 의사의 방식 같은 게 아니었다. 숫제 부서진 건물을 씻어내고, 콘크리트를 부어 뚫린 구멍을 채우는 것처럼 우악스러운 손길이다.
하지만 거칠기 짝이 없는 기운들이 부서진 곳을 확실하게 수복했다.
우드드득!
“으…….”
천하의 홍왕이 신음을 흘릴 정도의 고통이다. 마치 생살을 잘라 벌린 다음 그 안에 소금을 뿌리고,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홍왕이라면 그 정도 고통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테니까.
으드드득!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뿐, 홍왕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고통을 묵묵히 감내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그의 몸을 후벼 파던 마기가 등을 통해 다시 빠져나간다.
“됐다.”
“우웨에에에에엑!”
홍왕이 커다란 핏덩이를 연신 토해냈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바닥을 적신 검은 피를 확인한 홍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후.”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순간, 알 수 있었다. 몸 상태가 몇 배는 나아졌다. 물론 부상이 한순간에 낫는다든가 하는 꿈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없지만, 뒤틀린 기혈을 지금 바로잡아 두었으니 며칠 내로 제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적어도 몇 달은 이 부상과 싸워야 했을 텐데.
“……요상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알게 돼.”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멀쩡한 몸으로 지내는 세월보다 부상을 입은 채 사는 세월이 더 많아지게 되면 말이야.”
“…….”
뭔가 듣는 것만으로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이제 어쩔 텐가?”
“글쎄.”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딱히 뭔가 다음 일을 생각하고 온 건 아니라서. 일단은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지. 여기서 더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왕, 하나 부탁해도 되겠나?”
“……뭘?”
홍왕이 굳은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사흘만 더 머물러 다오.”
“……왜?”
홍왕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적의 수단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몸을 회복하기 전에 저들이 나를 노리고 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홍왕계가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을 텐데?”
“그 정도의 자부심은 있다. 내가 없다고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멍청이들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저들의 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
홍왕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돌다리를 두드릴 거라면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두드릴 수 있다. 그러니 부탁하지. 나를 지켜다오.”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시대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정파 놈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그게 인생이라고 누가 말하더군.”
“하핫.”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머무르지.”
강자가 스스로의 자존심을 버리고 더 큰 것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거기에 호응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좋은 술을 준비하지.”
“그럼 좋겠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들은 방진훈이 눈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보십쇼, 장로님.”
“뭐냐?”
“……저 말대로면 우리 지금 홍왕계 놈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겁니까?”
“그렇지.”
“뭐라고 말 좀 해보십쇼. 위험하잖습니까.”
“뭐가? 이제 동맹인데.”
“동맹은 뒈질 놈의 동맹! 짱깨 새끼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방 이사.”
“예?”
“나도 중국인이다.”
“…….”
방진훈이 입을 닫았다. 슬쩍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목덜미에는 이미 장민의 손이 닿아 있었다.
“그…… 너무 한국인 같으시니까.”
“유언은 다 했나?”
“살려주십…… 케엑!”
방진훈의 목을 한 번 꽉 졸라댄 장민이 혀를 차며 손을 뗐다.
“저 머저리 놈이나 챙기도록. 얼마나 제대로 맞았으면 아직도 의식을 못 찾아. 덩치가 아깝다, 덩치가.”
“턱 맞으면 다 똑같은 거죠.”
“정신력이 부족하니 생기는 일이지!”
장민이 혀를 차대자 방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홍왕계는 영 불편한데…….’
하지만 이미 결정 난 일을 그가 어쩔 도리가 있을 리 없다. 방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러진 바토르를 둘러맸다.
“아니, 이 양반은 몸은 줄었는데 무게는 그대로여? 뭐가 이렇게 무거워? 확 내팽개쳐서 끌고 갈까 보다.”
궁시렁대는 방진훈의 눈에 먼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홍왕계의 무인들이 보였다.
“빨리도 온다. 굼벵이 같은 것들이.”
“……자네는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구만.”
“냅 두십쇼. 성격이니까.”
고개를 내저은 위긴스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예?”
“뭔가 이제야 제대로 동맹을 맺은 것 같은 기분이로군.”
그리고 그건 아마 홍왕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