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28
#1927.
분쇄하다 (2)
우드드득.
강진호가 가볍게 손을 말아 쥔다.
손끝에 아직 감각이 남아 있다.
‘이 정도인가?’
청마의 존재를 머리에 담은 순간부터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강해지는 것.
마음을 먹는다고 강해질 수 있다면 세상에 약자가 어디에 있겠냐마는, 강진호는 자신의 의도대로 스스로의 육체를 단련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맹진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직 부족해.’
강진호의 눈이 살짝 일그러진다.
십이비도라고 해도 다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명백하게 차이는 나뉘는 법.
파권의 경지는 저 백연홍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낭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이 하나 제압했다고 해서 기쁠 것도 없다.
다만…….
‘확실히 더 강해지기는 했군.’
물론 그가 파권을 제압한 것이 백 퍼센트 실력 차이는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파권은 자신의 무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스스로는 끊임없는 단련을 해왔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있었겠지만, 그건 그저 오만이다.
실전을 겪지 않는 무인은 죽은 무인일 뿐이다.
흑왕의 비호 아래 누구와도 목숨을 걸고 싸울 일 없이 수십 년간 수련만을 해왔다?
과거 자신의 경지를 되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안일한 수작에 불과하다.
경지라는 것은 단순히 무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에 새겨진 감각, 극한의 위기 속에서 발휘하는 정신력, 그리고 승부의 칼날 위에서 발휘되는 실전 감각까지.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연무장에서 주먹을 휘둘러 댄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감각이란 영원하지 않은 법.
절대의 승부사도 나이가 들고 승부의 나날에서 지치면 결국은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잃고 무뎌지는 법.
‘과거에 강했다고 지금도 강한 건 아니지.’
그걸 알지 못한 게 파권의 실착이다.
뭐, 물론…….
다시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그가 싸운 이들을 상대로는 굳이 이런 감각적인 부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승부란 그런 것이다.
변명은 의미가 없다. 상대를 마주한 순간의 실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뿐이다.
우드드득.
강진호가 다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이면 셋, 아니, 둘인가?’
십이비도의 실력이 모두 같지 않을 테니 단순화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가 파권이라면 대충 동시에 셋 정도까지는 상대해 볼 만할 것 같다.
파권보다 더 강한 이들이라면 둘이 한계겠지.
하지만…….
‘이걸로는 안 돼.’
그의 건너편에 앉은 청마의 힘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십이비도 따위는 아무리 쓰러뜨린다고 해도 청마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흑왕계의 힘은 십이비도 따위가 아니라 청마, 그 자체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여하튼…….
변수가 될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여두는 게 좋다.
강진호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파권을 처리했으니 이제는 낭곤의 차례다.
그런 강진호의 시선에 부상을 입은 낭곤이 장민의 공세에 뒤로 밀려나는 모습이 들어왔다.
‘빌어먹을!’
낭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카가가각!
거대한 악마의 발톱 같은 검붉은 조강이 그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래턱부터 눈가에 이르기까지 긴 상처가 생겨나며 핏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망할!’
기괴막측하다.
그 역시 전장에서 무학을 갈고닦은 자. 변칙과 임기응변에는 이골이 난 자다.
하지만 지금 손을 휘둘러 오는 이자는 그런 낭곤조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괴한 공격을 해 댄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싸우는 것 같다.
‘이게 마인!’
그는 절대 마도를 무시하지 않는다.
되레 은근히 마도를 무시하는 이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사람이다.
말이 되는가.
고금제일인이라 불린 마존이 마도 출신이고, 그들이 신처럼 모시는 흑왕이 마도 출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마도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충분히 경계했다.
하지만 장민의 무위는 낭곤의 예상 이상으로 높았다.
“핫!”
그의 손에 잡힌 곤봉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날아드는 조강을 때려 댄다.
곤은 애초에 휘두르는 데 특화되어 있는 무기.
모든 무기는 바로 이 곤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곤은 어떤 궤도를 그려도 육체와 이반하지 않는다. 굳이 자연스러움을 찾지 않아도 알아서 자연스러운 궤적을 그려내는 무기가 바로 곤이다.
그렇기에 낭비가 없다.
손이 가는 대로 그저 휘두르면 그만이다. 그 단순함은 속도를 낳고, 속도는 파괴력을 낳는 법.
콰아아앙!
후려쳐 조강을 밀어낸 곤이 다시 회전하며 앞으로 들이받는다.
상대가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연이은 연격으로 단숨에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생각이다.
하나…….
가가가가각!
길게 자라난 손톱들이 서로 교차하며 곤을 움켜잡는다.
“큭!”
쇳덩이 사이에 끼이기라도 한 듯 꼼짝하지 않은 곤을 빼낼 수 없던 낭곤이 이를 악물며 반대 손에 들린 곤으로 조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연이은 폭음.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바로 잡은 낭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애초에 그는 한 번, 한 번의 공격에 강한 힘을 싣는 타입이 아니다. 물 흐르는 듯한 연격으로 자연스레 상대를 몰아붙여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쓰러뜨리는 타입이다.
따지자면 저 파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십이비도 중 그와 파권이 함께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저 기괴막측한 공격 앞에서는 그의 장기를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낭곤이 장민보다 약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저 무학 자체가 인간의 허를 찌르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전투를 끌고 가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는 것뿐이다.
‘저주라도 받고 있는 것 같군.’
시큰한 손목을 두어 번 돌린 낭곤이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장민을 노려보았다.
두 눈을 붉게 물들인 장민이 양손의 조강을 길게 늘어뜨리며 글르 향해 걸어온다.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늘어난 검은 손톱이 주는 위압감은 천하의 낭곤조차도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강해.’
저 바토르와는 다른 의미로.
바토르는 강점이 너무 확실한 대신 단점도 너무 명확한 자다. 그러니 그 단점을 제대로 찌를 실력만 있다면 큰 문제 없이 상대할 수 있는 이였다.
하지만 장민은 다르다.
장민에게는 바토르 같은 강점이 없지만, 대신 바토르와 같은 약점도 없다. 장단이 명확한 이들보다 이런 스탠다드한 타입이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낭곤을 정말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눈앞에 있는 장민이 아니었다.
그가 떨리는 시선으로 장민의 뒤쪽을 바라본다.
저벅.
저벅.
마치 산보를 하듯 한 사람이 느긋하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낭곤의 시선이 흔들렸다.
‘벌써?’
으드드득.
그의 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맞물렸다.
‘이 쓸모없는 새끼!’
아무리 상대가 마존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십 분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채 5분도 버티지 못했다고?
심지어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마존의 상태를 보니,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장난치듯 가지고 놀면서도 불과 5분 만에 파권을 쓰러뜨렸다는 의미.
그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멍청한 자라고 해도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설사 그가 장민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그다음에는 저 마존을 상대해야 한다.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달아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상대를 부상을 입고 지친 상태에서 상대해야 한다고?
‘요행 같은 걸 바랄 상황이 아니야.’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순간, 낭곤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전장의 신은 언제나 그를 향해 웃어주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를 향해 웃어주는 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보다 더 악운이 강한 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
낭곤이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곤을 내렸다.
“음?”
그 동작에 장민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아닌지,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뭐냐?”
“…….”
“그런다고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잠시만, 장로님.”
위긴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장민을 만류했다.
“일단 싸우기 시작한 상태에서 멈추는 게 짜증이 나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제압할 수 있다면 나쁘지는 않습니다. 제게 발언권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장민이 날카로운 눈으로 위긴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내 걸어와 그의 옆에 선 이의 존재로 인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찰칵.
강진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지금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 강진호의 의도를 이해한 장민이 즉시 내력을 풀고는 양손을 모았다.
“뜻대로 하십시오.”
가만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던 강진호가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그 어디에도 조금 전까지 생사를 건 전투를 한 여파는 보이지 않는다.
여유롭다기 보다는 심드렁하기까지 한 모습.
그 모습이 낭곤을 더없이 압박해 들어갔다.
“해봐.”
“예, 로드.”
위긴스가 미소 지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저희와 그쪽은 원한이랄 게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이해하시겠지요?”
“방금 전에 내 동료를 죽여놓고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
“동료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낭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파권을 딱히 동료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 사실이니까. 아니, 동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이 그에게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굳이 애꿎은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지요. 만약 흑왕계와 관련된 정보를 넘겨주실 수 있다면, 적당히 구속한 상태에서 시일이 지나면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홍왕이 잘도 그걸 허락하겠군.”
“어렵지 않습니다. 홍왕은 원한보다 대의를 더 중요시하는 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홍왕을 바라보았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는 듯.
“…….”
낭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으로 보입니다만? 그쪽도 알다시피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살길은 그것뿐이죠.”
“흐…….”
낭곤이 낮게 웃는다.
위긴스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그는 절대 여기서 달아나지 못할 것이고, 저항한다면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투항하는 게 옳다.
하지만…….
“흐흐…….”
낭곤은 그저 웃어버렸다.
“개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결렬입니까? 어리석어 보입니다만.”
“어리석은 건 너희지. 감히 흑왕을 상대로 이를 드러냈으니까!”
“…….”
낭곤의 눈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마존, 과거에 취한 자여. 그대도 이게 알게 될 것이다. 흑왕을 적대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라는 것도!”
“…….”
“나는 절대 흑왕을 배신하지 않는다! 절대로!”
낭곤이 이를 악물고 곤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지를 본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군.”
“……죄송합니다.”
“괜찮아.”
강진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장민.”
“예!”
“마무리해!”
“명을 받듭니다!”
장민이 전신으로 마기를 뿜어내며 낭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진호가 전투의 결과도 확인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청마를 상대하는 의미라…….’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이렇게 피가 끓어 대니까.
그의 등 뒤로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처절하게, 더없이 처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