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15
#414.
소집하다 (4)
“실수였다.”
강진호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놀이공원에 온 것까지는 실수가 아니었다. 실수가 있다면 그가 자유이용권에서 멈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가로 돈을 더 지불하면 줄을 서지 않고 놀이 기구를 탈 수 있는 이용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강진호는 과감하게 아이들에게 모구 그 이용권을 사 주었다.
처음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놀이공원에서 괜히 줄 서는 것에 시간을 뺐기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이리 독이 될 줄이야.’
물론 아이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최연하가 덕분에 몇 배는 많은 놀이 기구를 소화해야 했다는 점이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점이 되자 최연하는 마치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언니, 정신 좀 차려요.”
“언니, 이것 좀 마셔보세요.”
“얘들아, 나는 괜찮단다. 어서 더 놀아야지.”
“어, 언니, 진짜 정신 좀 차리세요. 무서워요.”
최연하가 아이들을 보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최연하를 돌보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진성이 이마를 짚었다.
“진짜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진짜.”
저만큼 독특한 사람은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진호 형이랑 놀라고 시간 만들어줬더니, 왜 부득불 애들한테 붙어서 같이 놀고 있냐고! 내가 미리 말도 다 맞춰놨구만!”
한진성의 계획은 간단했다.
이미 그는 전날 아이들의 조를 다 짜놓은 상황이었다. 고등학생들을 나눠 조를 짜고, 고딩들은 놀이 기구를 반쯤 포기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논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할 일이 없어진 강진호와 최연하가 둘이 따로 다니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들은 최연하가 패기롭게 던진 ‘다 모여!’ 한마디에 좌절되었다.
“참…….”
한진성이 피식 웃었다.
“진짜 진호 형 주변 사람들은 나사가 빠져도 제대로 빠진 사람밖에 없다니까.”
최연하의 평가와 한진성의 평가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서로가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잠시만.”
강진호가 흐느적거리는 최연하에게로 다가갔다.
“오빠, 어떻게 좀 해봐요.”
“그래서 왔잖아. 잠시만.”
“네.”
아이들이 자리를 내주자 강진호가 가까이 다가가 최연하의 머리 쪽을 움켜잡았다.
“응?”
의아한 눈으로 몸을 돌리던 최연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머리로부터 엄청나게 차가운 무언가가 밀려 들어온다 싶더니, 순식간에 몸이 한기가 들 정도로 차가워졌다.
“아…….”
최연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릴 수가 있었다.
“이 날씨에 그리 꽁꽁 싸매고 있으니 열이 오를 수밖에.”
최연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저 얼굴만 가리면 되지만, 그녀는 명색이 배우였다. 배우는 피부가 타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덕분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긴팔에 긴 바지, 그것도 통풍이 영 되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진 옷들로 전신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의식이 좀 멍해져 있었는데, 강진호가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몸이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 이제 괜찮아졌어요. 다음 것 타러 가요.”
강진호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뭐지, 이 여자는?
마조히스튼가?
그 순간, 여자아이들 중 하나가 최연하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강진호의 손에 쥐어주었다.
“오빠.”
“응?”
“우리 가서 놀고 올 테니까, 오빠는 다른 거 하지 말고 언니 좀 봐줘요.”
“……응?”
“알.았.어.요?”
“응.”
자신을 둘러싼 여자아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게.”
“제대로 돌봐줘요! 시원한 것도 좀 먹이구요!”
“우린 퍼레이드 보러 갈 테니까!”
“그래, 그럼.”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서 멀어지자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최연하를 돌아보았다.
“…….”
등을 돌리고 있는 최연하를 보고 강진호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정신 들었거든요.”
“왜 뒤돌아서 말해요?”
“……잠시만요. 지금 얼굴 마주 보고 말하면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서 그래요.”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강진호의 귓가에 나직한 최연하의 탄성이 들려왔다.
“죽어야지…….”
세상이 무너지는 서글픔이 그 말속에 담겨 있었다.
“놀이공원 처음 온 거예요?”
“……예.”
“그럼 놀이 기구도 처음 탄 거고?”
“네.”
강진호가 미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럼 무슨 패기로?”
“괜찮을 줄 알았어요. 남들 다 잘 타니까.”
최연하는 말없이 음료를 쪽쪽 빨았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은근히 재미도 있던 것 같고.”
“네?”
“재밌었다구요.”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자기가 힘들어 보이면 애들이 제대로 못 논다고 해놓고는 이제 와 말을 바꾸고 있다.
“언제부터 애들을 그렇게 신경 썼어요?”
“이상해요?”
“짧았으니까. 저도 애들을 이만큼 신경 쓰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거든요.”
“음…….”
최연하가 살짝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말했다.
“조금은 동질감이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동질감이요?”
최연하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놀이공원은 한 번도 못 와봤거든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친구도 없고, 이런 데 같이 올 사람이 없었어요. 철이 들 무렵부터는 계속 연예계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은근히 속으로는 그런 게 있었나 봐요. 나도 한 번쯤은 이런 곳에 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놀고 싶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나이가 돼서 이런 걸 즐기는 것보다는 저 애들이 저 나이에 즐겨보는 게 조금 더 중요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잘 놀 수 있도록 도와보려고 했는데…… 이 꼴이네요.”
최연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요즘은 계속 이런 것 같아요. 잘해보려고 하는데 뭔가 잘 안 되네요. 다른 사람 방해만 하는 것 같아요.”
“아뇨.”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애들끼리 와서 재밌게 노는 것보다 이게 저 애들에게는 몇 배는 더 추억이 될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그 추억 속에서 당신이 얼마나 망가지는가를 감수한다면 말이지.
강진호는 가볍게 웃었다.
이 여자는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만나면 만날수록 새로운 면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속이 검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이상하게 집착이 쩌는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강진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정확하게 그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에 대한 평가가 좋은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좀 괜찮아요?”
“……조금만 더 쉬면 한 번 더 탈 수 있어요.”
“자제합시다.”
“진짜예요.”
어쩌면 그녀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는 가장 큰 이유는 저 말도 안 되는 근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근 아이들의 근성에 조금 실망을 느낀 강진호로서는 저 어마어마한 근성에 힐링받는 느낌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저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애들은 어디 갔는데요?”
“퍼레이드 보러 간다던데, 몇몇은 저거 타러 갔을 거예요.”
“저거요?”
강진호가 손을 위로 올렸다.
최연하가 강진호의 손을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렸다. 돔의 천정을 따라 돌고 있는 기구가 보였다.
“재밌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빠르지만 않으면 돼요. 높은 건 상관없거든요. 나는 그런 느낌일 줄은 몰랐어요. 내가 핸들을 잡는 거면 무서운 게 없었는데……. 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서…….”
놀이 기구를 탈 때의 느낌을 떠올렸는지 최연하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굳이 안 타도 됩니다. 이제는 그만 집에 가야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수배한 버스에 말해둔 시간이 다 되어가요. 애들이 저거 타고 오면 집에 갈 겁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잘도 그 입에서 아쉽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강진호가 어이없어 하려는 찰나, 최연하가 씁쓸하게 말했다.
“놀이공원에 오면 그런 게 하고 싶었어요.”
“어떤 거요?”
“그냥 남들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머리에 토끼 머리띠도 하고, 사진도 찍고, 퍼레이드 보면서 손도 흔들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솜사탕도 먹고, 여하튼 간에…… 애들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그냥 여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사람 구경도 하고, 재미있는 추억도 만들고 그러고 싶었는데…….”
최연하가 혀를 쏙 내밀었다.
“좀 너무 전투적으로 돌아버렸네요.”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시 오면 되죠.”
“다시요?”
“네. 애들하고 같이 안 오고, 다시 오면 되잖아요.”
“…….”
최연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와줄 거예요?”
최연하가 그 말을 하는 데는 무척이나 많은 힘이 들었지만, 강진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죠.”
“정말이에요?”
“네.”
최연하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그녀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위기 좋아 보이냐?”
“완벽합니다, 형님!”
“굳이 여기서 사건을 더 안 만들어도 될 거 같은데?”
비상 대책 위원회의 수장을 맡고 있는 한진성과 그를 보좌하는 아이들은 높은 난간에서 강진호와 최연하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옳으십니다! 형님!”
한진성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여자애들은 어디 갔냐?”
“기구 타러 갔어요.”
“저거?”
한진성이 머리 위를 가리켰다.
“네. 저거만 타고 온다던데요.”
“여하튼, 쓸데없이…….”
한진성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애, 애들이 탔을까요?”
살짝 어색해진 최연하가 말을 돌렸다.
“네?”
“저 기구요.”
강진호가 최연하의 말에 고개를 들어 기구를 바라보았다.
“탔네요.”
“네?”
“저기 탔다구요.”
“……그게 보여요?”
“네.”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여기서 그게 보일 리가…….
‘아니, 이 사람이면 진짜 보일지도 몰라.’
강진호라는 사람이 얼마나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이미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어느 기구에요?”
“저기 저 노란…….”
말을 하던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노란색이요?”
“…….”
“진호 씨, 무슨 색이냐니까요?”
강진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호 씨?”
강진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최연하도 얼굴을 굳혔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그녀는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그때.
터널이 무너지던 그 순간.
“……애들한테 연락해서 한곳에 모여 있으라고 하세요.”
“네?”
“아니, 나가라고 하세요. 이 건물에서!”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최연하는 되묻지 않았다. 강진호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결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의 의문을 풀 때가 아니었다.
“제길!”
강진호가 전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드드득!
무언가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며 머리 위에서 돌가루와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