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36
#435.
대면하다 (5)
“연하야, 이건 해야 한다.”
최연하는 뚱한 표정으로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드러난 간절함이 절절하게 느껴졌지만,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올 로케네요?”
“중국 드라마니까.”
“안 땡기는데.”
사장이 움찔했다.
“왜…… 왜 또 안 땡기는데?”
“중국은 음식도 입에 안 맞고.”
“내가 요리사 고용해 줄게. 한식 하는 요리사 데리고 가면 되잖아.”
“중국산으로 요리하면 제맛이 안 나는데.”
“무슨 소리냐! 우리 연하가 먹는 음식을 어떻게 중국산으로 만들어! 내가 비행기로 한국 재료들을 공수해야지!”
최연하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기간도 너무 길어요.”
“유, 육 개월은 금방이야.”
“그러니까요. 꽃다운 나이에 육 개월이라는 시간을 중국에서 보내야 한다는 게 영…….”
“아니다, 연하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이거 베이징 로케야. 베이징은 대도시다! 너도 저번에 가봤잖아.”
“스모그가 너무 심해서.”
“……의사도 데리고 가자.”
최연하는 불만 어린 얼굴로 대본을 툭툭, 쳤다.
“시나리오도 너무 전형적이잖아요.”
“중국 본토를 노리는 작품이니 당연히 전형적일 수밖에. 그게 먹히잖아, 그게!”
“영 좀…….”
최연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자꾸 말끝을 흐리자 사장이 고개를 힐끗 돌려 한은솔에게 눈치를 주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누나, 또 왜 그래요?”
“또?”
“아니, 또가 아니고.”
한은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은 기회잖아요.”
“너는 이게 좋은 기회로 보이니?”
“네. 정말 좋은 기회로 보여요.”
“왜?”
한은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그가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최연하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거기에 사장님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일단은 중국 시장이란 게 한국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잖아요.”
“그렇지.”
“그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거기에서 인지도를 조금만 쌓으면 정말 떼돈 번단 말이에요.”
“내가 아이돌도 아닌데 팔아먹을 게 뭐가 있다고 떼돈까지 벌겠어?”
“그거 진짜 누나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중국에서는 CF 하나만 찍어도 받는 돈이 자릿수가 다르다구요. 정말 제대로 땡길 수 있어요.”
최연하가 조금 뚱해진 얼굴로 한은솔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한은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은솔아.”
“예, 누나.”
“그치. 그렇지. 이거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지?”
“……예?”
“응, 알아. 뭐, 연기가 사람 살리는 일도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의사 선생님들도 돈 받아가며 일하는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돈 생각 안 하고 일하겠어. 그지?”
“아뇨, 누나. 그런 게 아니고…….”
“그런데 너무 돈돈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안 그래?”
“…….”
“내가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 돈 많아. 평생 먹고살 만큼은 벌었어. 그런데 뭔 돈지랄을 그렇게 해보겠다고 돈 하나 보고 중국까지 날아가서 일을 해야겠냐?”
한은솔이 사장을 돌아보았다.
‘저는 무리예요, 사장님.’
‘무능한 새끼.’
사장이 한은솔을 한 번 흘겨보고는 최연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은솔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미소가 한껏 피어났다.
“자자, 연하야. 생각을 해봐라.”
“네?”
“배우라는 게 그렇잖아. 전성기가 그리 길지 않단 말이야.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네가 기분이 좀 나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현실이잖아. 여배우는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역할이 한정이 되어 있어요.”
최연하는 대답 없이 사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한껏 물이 올랐을 때, 대작 하나 찍어야 하지 않겠니? 커리어에 남는, 그런 작품 말이야. 나중에 최연하 하면 ‘아,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겨야 할…….”
“그.러.니.까.”
최연하의 목소리가 딱딱해지자 사장이 움찔했다.
“늙어서 할망구 되기 전에 돈 끌어야 하니까 중국 드라마라도 찍자?”
“뭘 그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니.”
“사장님.”
“……그래.”
최연하가 다리를 꼬고 턱을 받쳤다.
“그, 말씀하시는 커리어에 남는 작품이라는 게 중국 드라마예요?”
“…….”
“내가 중국 영화면 또 이해해요. 중국에 대단한 감독들 많으니까. 그런데 드라마? 철저하게 중국 내수용으로 기획되는 드라마에 출현하는 게 제 커리어를 위한 거라구요?”
최연하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말을 하면 혹해보기라도 하겠어요. 그런데 사장님 절 너무 물렁하게 보신다. 제가 그런 사탕발림에 좋아서 도장 찍을 사람으로 보이세요? 저 최연하예요.”
“알지, 내가 알지. 최연하가 얼마나 깐깐한 앤지 내가 알지.”
그리고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도 잘 알지.
“……일단 좀 진정하자. 나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여기서 피우세요.”
“그, 그래도 되냐?”
“네. 신경 안 써요.”
사장이 조금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답답해서 담배를 피웠다가 최연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일주일 연락 끊고 잠적 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최연하 앞에서 담배의 담 자도 꺼내지 못했는데…….
“진짜 괜찮아?”
최연하는 두말없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사장 쪽으로 쭉 밀었다.
“은솔이 너도 피워. 피울 거면 한 번에 같이 피워.”
“……누나 옷에 담배 냄새 밴다고 절대 앞에서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른 데서 피우고 올 때도 탈취제 뿌리고 오라시던 분이…….”
“이미 버린 몸이야.”
“너 담배 피우니?”
“말이 되는 소리만 해요, 사장님.”
상큼하게 쏘아붙이는 최연하의 반격에 사장이 얼떨떨해했다.
‘아니, 딱히 성격이 좋아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한 부분에서 관대해졌다.
조금 불안함 심정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사장은 그럼에도 최연하가 별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보자.”
어차피 최연하에게 사탕발림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정공법이 나을 수도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세상에서 제일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다. 돈이 아쉬운 사람은 돈으로 구슬리면 되고, 명성이 아쉬운 사람은 명성으로 구슬리면 되지만, 최연하는 작품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열정 하나로 작품을 선택할 만큼 정열적이지는 않고, 현실 파악은 똑바로 하고 있지만 그 현실을 우습게 여길 만큼 이미 충분한 돈을 번 상태였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에게 일을 해야 한다고 구슬리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솔직히 그래. 돈 때문이지.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된 건 아니잖아. 너는 뭐, 한국에서 영화 찍을 때는 출연료 안 받고 일하냐? 어차피 돈 받잖아.”
“그렇죠.”
“그럼 이왕 돈 받는 김에 돈 제대로 주는 데 가서 한 번 찍자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니잖아. 이번 한 번만 제대로 하면 앞으로 네가 원하는 좋은 작품 마음껏 찍을 수 있을 만한 돈을 벌어놓을 수 있다니까.”
“돈은 지금도 충분하다고 몇 번 말씀드려요.”
“돈은 충분한 게 없어!”
사장이 딱 잘라 말했다.
“지금 네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게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아? 너는 지금 네 한 몸 건사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니까 그런 거지. 그런데 왜 사람들이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줄 알아? 사람이 살다 보면 계획처럼만은 살 수가 없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돈이 더 필요한 순간이 생긴다고!”
“사장님.”
최연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돈을 꼭 이런 식으로 벌어야 한다고는 생각 안 해요.”
“이게 뭐 어때서? 너 지금 중국 드라마 무시하냐?”
“중국 드라마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건 정말 돈에 팔려 나가는 배역이잖아요.”
“응?”
“대본이나 제대로 읽어보셨어요?”
최연하가 테이블에 반쯤 던져 놓은 대본을 다시 들어 짤짤 흔들었다.
“대사도 없고, 사건에 관여하는 것도 거의 없고, 그냥 얼굴 마담으로 웃고만 있으라고 만들어놓은 배역이잖아요.”
“……그래?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잖아. 어차피 중국어도 안 되는데.”
최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하튼 저는 이런 배역 맡을 생각이 없어요. 안 할게요.”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사장이 화들짝 놀라 손을 뻗었다. 하지만 최연하는 손을 쓱 당겨 자신의 손을 잡으려는 사장의 손길을 피해냈다.
“연하야, 이거 진짜 큰 건이야.”
“알아요, 큰 건인 거. 그런데 내가 그 큰 건 안 하고 싶다구요, 내가.”
“아니, 너…….”
“먼저 갈게요. 다른 좋은 대본 있으면 연락하세요. 그런데 그때는 최소한 대본은 읽어보시고 연락 주셨으면 좋겠네요.”
최연하가 두말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리자 사장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움켜쥐었다.
“미치겠네, 진짜.”
한은솔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좌불안석이었다.
회사에 소속된 입장이니 최대한 사장의 의견을 따라가야 하는 게 기본이지만, 매니저라는 건 또 그런 직업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월급 받는 것 외에 딱히 접점이 생기기 힘든 사장보다는 함께 생활하는 배우에게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야, 은솔아. 아니, 한 실장.”
“예.”
“네가 보기에는 쟤 왜 저러는 거 같으냐?”
“…….”
“아니, 최소한 지가 배우면 작품을 해야 할 거 아냐. 예전에도 깐깐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한 작품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 대본부터 챙기던 애였는데…… 왜 저리 놔버린 거냐?”
한은솔이 몇 번 입을 뗐다 붙였다.
“너, 뭐 알고 있는 거 없냐?”
“…….”
한은솔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사장이 살짝 몸을 앞으로 당겼다.
“한 실장.”
“예.”
“여기는 회사야.”
“…….”
“정 니가 네 배우 챙기고 싶으면 계약 끝난 후 쟤 데리고 독립해. 그거 나 안 말려. 막을 수도 없고. 그런데 최소한 니가 여기서 월급 받아먹고 쟤가 여기에 계약되어 있는 동안은 회사를 위해서 일해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도리고, 그게 예의잖아. 내 말 틀려?”
“맞습니다.”
“아는 거 있으면 이야기 좀 해봐. 쟤 왜 저러는 거야?”
한은솔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
“응?”
한은솔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회사에 책임을 다하고 제 배우에 대한 의리도 지키는 방법은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겠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
사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 이놈이 최연하를 설득하겠다는 건가? 저 최연하를?
“할 수 있겠어?”
“해보고도 안 되면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제가 해볼 수 있는 걸 해보는 게 제가 할 일 같습니다. 저 믿으시고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사장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할 수 있겠어?”
“예.”
“알았어. 그럼 이거 한 실장이 알아서 해. 나는 한 실장이 다시 와서 입 열 때까지 잊어버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한은솔을 보며 사장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있긴 한데…….’
따로 조사를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