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46
#645.
처리하다 (5)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최연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사실 뭐라고 할까.
솔직히 인정하자면 최연하는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순진한 남자를 상대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자신만만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하잖아!’
냉정하게 말해 이쪽으로 있어서는 최연하가 더 문외한이다.
물론 뭐라고 할까, 거부감이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눈에 차는 남자가 없었을 뿐이다. 애초에 시작부터 아무나 잡고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마음에 드는 사람이 근 삼십 년에 이를 동안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다.
‘나 키스도 못해봤다고.’
뽀뽀야 해봤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데 뽀뽀 없이 넘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키스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 죽는다고 발악을 하고 입술을 이리저리 격렬히 비벼대는 격렬한 뽀뽀(?)로 장면을 바꾸었다. 카메라 각도만 잘 잡으면 키스처럼 보이니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녀는 속빈 강정일 뿐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없는 분야에서 허세를 부린 대가는 처참했다.
최연하는 손가락 하나 꼼지락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여기서 조금만 움직이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정말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숨도 못 쉬겠네, 진짜.’
지금 강진호가 어떤 표정인지 확인하고 싶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최연하의 얼굴은 그대로 터져 버릴 것이다.
‘배우 최연하, 호텔에서 의문사’라는 헤드라인이 한국 신문에 쫙 깔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무섭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게 있지 않은가.
그녀는 배우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을 상정할 때, 나름의 시나리오를 쓰는 게 버릇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시나리오라는 게…….’
위기의 상황에 여자 주인공를 구해준 남자 주인공. 의연한 척하지만 떨고 있는 여주.
그리고 불이 꺼진 방에서 가만히 손을 뻗어와 여자 주인공의 손을 잡아주는 남자 주인공.
그런 로맨틱한 장면을 상상했는데…….
‘이게 로맨틱이냐? 이게? 누가 보면 스릴러 영화 찍는 줄 알겠네.’
범인이랑 같은 곳에 갇혀 있어도 이렇듯 얼린 고등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상상, 그러니까 시나리오와 현실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장르가 뒤바뀔 정도의 차이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스슷.
그 순간, 강진호가 몸을 뒤척였다.
‘히익!’
최연하의 몸이 움찔한다.
이미 돌처럼 굳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더 굳을 게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아니겠지? 아니지?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그지?’
아닐 것이다. 저 인간이 그리 경우 없는 인간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는 다 난봉꾼이라고 그랬어.’
혹자는 동물의 세계 같다고 말하던 연예계.
야생이란 단어는 살아 있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연예 사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은 한국어 능력이 부족한 건지, 연애 사업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기가 무섭게 파트너가 바뀌지를 않나, 그보다 더한 상황도 쉽게 벌어졌다.
기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연예계에 폭탄이 떨어질 정도로 말이다. 기자들 역시 스캔들을 마구 내서 연예계에 화제성을 떨어뜨리고 나중에 밥줄이 끊기는 것보다는 소속사에게 적당히 대접받으며 길게 먹고사는 게 낫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는 것들을 다 기사로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부인들에게 소문은 돌기 마련이고, 그 소문을 항상 듣는 최연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남자는 짐승이다.
그리고 그 짐승은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아냐! 아닐 거야!’
하지만 강진호도 혈기 왕성한 남자이지 않은가.
사람이 다 이성적이라면 세상에 사고가 왜 일어나겠는가. 머리에 피가 몰리면 생각이 제대로 안 되니까 사고가 나는 거지.
아니, 이건 머리가 아니라 다른 데 피가…….
‘미쳤나 봐, 진짜!’
몸이 굳은 게 다행이었다.
몸이 뻣뻣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다리는 이불을 다섯 번쯤은 걷어찼을 것이고, 분위기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린 시저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을 테니까.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지만.
‘아니지? 그지?’
최연하의 목이 아주 천천히 돌아갔다.
확인하고 싶다.
저 예측할 수 없는 남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멍하니 누워 있을지, 아니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스르륵.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침을 꿀꺽 삼킨다.
그러고 나서 최연하는 보았다.
눈을.
강진호의 눈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끅.”
최연하의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이 남자 앞에서 딸꾹질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불 킥 각이지만, 지금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 눈빛이 정열적이야!’
강진호의 눈이 살짝 불타고 있었다.
뭐랄까, 저 농익은 정염의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온다.
‘어떡하지? 저거, 달려들면 어떻게 하지?’
평소의 그녀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걷어차 버리고는 내가 우습게 보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겠지만…… 지금 그녀는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고, 그녀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남자도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본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이, 이거 어떻게 하지?’
최연하는 직감했다.
이 순한 소 같은 남자가 눈이 홱 돌아가 미친 소가 되어 돌진하는 순간, 그녀는 막을 자신이 없었다. 힘으로 막을 자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여하튼!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쩌면 오늘 역사적인 무언가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연하의 숨이 팔백 미터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가빠졌다.
‘아, 안 되는데…….’
숨이 가빠지면 안 된다. 이건 건너편의 짐승(?)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최연하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순간,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최연하 씨.”
“네? 네! 네?”
‘아악! 빌어먹을!’
‘네’가 너무 크게 나갔다. 말을 내뱉고 나서 최연하도 너무 큰 소리에 당황하여 들썩했을 정도다. 이러면 이쪽이 심장마비 걸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대놓고 말하는 수준 아닌가.
그동안 잘 꾸며온 도도(?)하고 쿨한 그녀의 이미지가 이 순간 쓰나미에 쓸려 나가는 모래성처럼 으스러지고 있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무, 무슨 말을 하려고?’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진호를 보니,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 잘생겼어.’
이런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뇌를 뽑아내서 락스로 깨끗하게 빨아 다시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본능인데.
평소 남자의 외모에는 무관심하다고 자신하는 최연하이지만, 이 순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보이는 강진호의 얼굴은 그녀의 저항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 내가 이 인간이 잘생겨서 이러는 게 아냐. 절대로.’
최연하가 깊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상에 잘생긴 놈은 많다. 냉정하게 봤을 때, 강진호와 비슷할 정도로 잘생긴 놈은 연예계에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최연하에게 치근덕댔을 때는 거침없이 정강이를 후려차지 않았던가.
선후가 바뀌었다.
강진호가 잘생겨서가 아니다. 강진호라서 잘생겨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해 낸 최연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저는요.”
“네?”
“저는 준비됐어요.”
최연하가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말을 해놓고도 본능적으로 가드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저 인간이 마음먹으면 그 방어막 따위는 순식간에 깨져 버릴 텐데.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항상 상상하던 로맨틱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언제나 완벽하지는 못하다.
이 사람이 정말 그럴 마음이라면, 그녀도 그 답을 주어야 한다. 최연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강진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준비요? 무슨 준비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 제 말은…… 어, 그, 하…….”
할 말을 찾지 못한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주, 준비됐다구요.”
“뭐가 말입니까?”
최연하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이 인간은 둔감하긴 하지만 멍청하진 않다. 이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
“무, 무슨 말씀 하시려는 거였어요?”
“음…….”
강진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최연하가 쿵쾅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강진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촬영은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최연하 씨도 큰일을 겪었으니 하루 정도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촬영 일정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다 건강을 해치면 아무것도 안 되잖아요.”
“…….”
“그러니까, 내일은 쉬세요.”
최연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살짝 고인다.
이 순간, 그녀를 이만큼이나 생각해 주는 강진호가 참 고맙다. 그리고 쓸데없는 오해를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여기까지였으면 참 훈훈하게 끝날 일이건만…….
뭘까.
5번 척추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이 진득한 빡 침은?
몸이 열탕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피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머리로 피가 몰린다. 매일 이런 일이 한 번씩 있으면 반신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혈액순환이 항상 폭발적일 테니까.
“그, 그게 다예요?”
“네. 다른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니요. 주무세요.”
“네?”
태연하기 짝이 없는 강진호의 반문에 꾹꾹 억누르던 화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냥 처 자라고, 이 인간아! 자라고!”
“……넵.”
슬그머니 이불을 끌어 올리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허망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퍼먹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김칫국을 퍼 마시다가 배가 터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저 멀리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존심의 상태를 확인한 최연하가 억울함에 몸을 떨었다.
‘이 짐승 같은 인간!’
다른 의미로 짐승이다. 밝혀서 짐승이 아니라, 멍청해서 짐승이라고!
“내 팔자야…….”
“네?”
“자라고!”
끓어오르는 최연하의 분노에 찔끔한 강진호가 등을 돌리고 쪼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최연하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등 돌린 강진호에게 이불이 퍽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강진호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 마주치면 죽는다.’
등 뒤에 사신이 와 있다.
이제야 화가 난 자신을 본 다른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강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