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72
#671.
달려들다 (1)
‘이현주라…….’
이현수는 눈앞의 여자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래, 물론 알고 있다. 이 여자가 누구이고, 어떤 여자인지 말이다. 어쩌면 이현주 본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현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른함, 그리고 살짝 밀려드는 곤란함.
아무래도 이 어색함만은 어쩔 수가 없다.
이현수는 이현주의 삶을 뭉개 버린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아니, 그중 하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도하게 핵심적인 일을 맡지 않았는가.
이현주가 그를 원수라 여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한 일이 정당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본디 감정이라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니까.
그래.
이건 껄끄러움이라 불러야 할 감정이다.
이현수는 내부로부터 밀려오는 껄끄러움에 조금 생소해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누군가에게 껄끄러움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건 최근 몇 년간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자신에게 고문받는 이가 보내는 증오 가득한 눈길도 흘려보내던 이현수가 껄끄러움이라니.
이현수는 새삼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불과 반년 전이었다면 이현주와의 조우에서 껄끄러움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다고 했습니까?”
이 생소한 감정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현수는 이 여자와의 조우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이현수를 바라보는 이현주의 눈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 적이었다. 이중걸의 손녀와 김석일의 오른팔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사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지금 서로 마주한 채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전벽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입지의 변화를 겪은 뒤가 아닌가.
사람인 이상 기분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현수가 이중걸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현주는 깊은 심호흡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강진호 씨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회주님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이현수가 흥미롭다는 듯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입에서 강진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 사람에게 회주님은 어떤 의미일까?’
증오스러운 적?
아니면 대적할 수 없는 거악?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리 호의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강진호는 그 이중걸의 숨을 끊어놓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이현주는 굳이 그를 찾아와서 강진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었다.
“말씀해 보시죠.”
그렇다면 들어줘야겠지.
“그전에…….”
이현주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저를 감시할 생각이시죠?”
“흠…….”
이현수가 볼을 긁었다.
역시나 이 여자와 대화하는 건 껄끄럽다.
“이쪽의 상황을 모두 이해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니요.”
이현주가 단호하게 이현수의 말을 잘랐다.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알고 싶은 건, 이 감시가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하는 것뿐이에요.”
“글쎄요. 그것 역시 확답을 드리기는 힘드네요. 굳이 말하자면, 그쪽에 대한 의심이 풀리는 순간이겠죠.”
“제가 더 이상은 총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없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라는 거죠?”
“말하자면 그렇겠죠.”
이현주가 가만히 이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누가 결정하나요?”
“음…….”
“딴지를 걸거나 당신을 무시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걸 당신이 결정하는 게 월권이 아닌가 하는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이현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논리적인 지적에 덮어놓고 ‘아니오’를 외칠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좀 문제이기는 하지.’
과거 이중걸 시절 때는 중간 계층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중걸은 독재자이지만 자신의 공신들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신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명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떠한 일은 어느 선에서 해결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 총회에는 그게 없다. 모든 권한은 강진호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딱히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바토르와 나이트 위긴스는 아직 총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판단은 내릴 수 있겠지만, 그 판단을 명령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현수는 특성상 완벽한 이인자가 될 수 없다.
결국 지금 총회에서 강진호의 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방진훈밖에 없는데, 방진훈은 권력을 내려놓고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그 아픈 부분을 이현주가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확실히 이현주에 관련된 일은 처리할 사람이 애매했다. 이현수가 처리하기에는 가진 권한이 충분치 않고, 강진호가 처리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게다가…….
‘강진호 씨에게 말해봐야 빤한 대답이 돌아오겠지.’
내버려 둬.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혹시나 그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이라 생각할 사람이다. 물론 이현수는 그런 강진호의 판단을 1000% 존중한다. 강진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문제는 하나다.
‘그 뒤처리는 제가 한단 말입니다!’
해결이 된다고 끝이 아니다.
강진호야 사건만 후려쳐서 해결해 버리고 갈 길을 가버리겠지만,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그 뒤처리를 하는 것은 이현수 자신이 아닌가. 경험상 사건은 터지고 해결하는 것보다 터지기 전에 틀어 막는 게 백배는 더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현수였다.
“월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월권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결국은 강진호 씨라는 거네요.”
“말하자면.”
이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요구할 것도 하나뿐이네요. 강진호 씨와 대면시켜 주세요.”
“거절합니다.”
“당신에게 거절할 자격은 있나요?”
“그 정도 자격은 있을 것 같은데요.”
능글맞게 웃는 이현수를 보며 이현주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저 느끼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뭉개 버리고 싶었다.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하다?”
“네, 과하죠. 당신은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망국의 공주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누군가 나를 옹립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을 너무 본 모양인데, 나는 폐족일 뿐이에요. 아무런 힘도 없는.”
“물론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저는 당신에게 그리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계륵 같은 사람이죠.”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잘도 지껄이는군요.”
“때로는 직설적일 필요도 있죠.”
“알아요?”
이현수가 눈에 의문을 담자 이현주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정말 재수 없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오신 건 아닐 텐데요. 서로 알고 있는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저는 그쪽과는 다르게 꽤나 바쁜 사람이라 용건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이현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말했다.
“할 말은 이게 아니었지만, 여기서 문제를 발견했네요. 이봐요, 이현수 씨.”
“네.”
“똑똑하다고 자부하시는 분이니까, 내 질문의 답을 알고 있겠죠. 말해봐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죠?”
“아뇨. 당신은 굳이 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현주는 말없이 가만히 이현수를 노려보았다.
“그냥 그렇게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몇 해, 아니, 몇 달이라도 시간이 흘러서 당신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어진다면 곱게 놓아드리죠.”
“곱게 죽이는 게 아니라요?”
“죽일 거면 진작 죽였습니다. 이쪽이 그걸 꺼려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좋은 대답이네요. 하지만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에요. 말해주세요. 제가 뭘 해야 당신들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죠?”
이현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일원이라고 한 겁니까?”
“네. 일원, 조직원, 말단. 무슨 말이든 좋아요. 당신이 말하는 방법은 결국 총회를 떠나야 한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아요.”
“그게 당신에게도 좋은 것 아닙니까?”
이현주가 피식 웃었다.
“좋아요? 네, 아주 좋죠. 총회를 떠나면 어디 한적한 편의점 알바 자리라도 알아볼까요? 그게 아니면 어디 공장에 들어가도 좋겠네요. 힘 하나는 남자도 못 따라올 테니까.”
이현주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인이에요. 그리고 한국에서 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코 총회를 떠날 수 없어요. 나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어요. 그러니!”
이현주가 가만히 이현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두 가지 중 하나만 하면 돼요. 내게 총회에 남을 방법을 알려주든가, 아니면 내가 강진호 씨에게 달려들어 울고 짜는 걸 막든가.”
“그거 섬뜩한 협박이네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현수의 머리는 지금 꽤나 복잡했다.
이현주가 누군가.
그 이중걸의 손녀다.
이 시대에 혈통을 따지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총회를 하나의 왕조라 표현한다면 이현주는 적통 중의 적통이다. 총회에서 성장한 방진훈은 귀족 정도는 될 것이고, 강진호는, 음…….
‘오랑캐 정도 되겠네.’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녀를 지지해 줘야 할 이중걸의 계파가 완전히 와해되어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럼에도 이중걸의 손녀라는 지위는 나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이토록 경계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총회에 남겠다?
강진호가 지배한 총회에?
“원수의 밑에서 칼이라도 갈아볼 생각입니까?”
“내가 칼을 간다고 그 사람 피부에 생채기라도 내겠어요?”
“무리겠죠.”
이현수가 머리를 긁었다.
“그럼 굳이 그러는 이유가?”
“자꾸 멍청하게 굴지 말아요. 나는 무인이고, 내 할아버지가 누구든 나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야 해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무인은 무인계를 떠나 살 수 없어요.”
“음…….”
“당신도 알고 있겠죠. 나를 이런 식으로 잊히게 만드는 것보다 대놓고 부려 먹는 게 낫다는 걸. 내가 강진호 씨에게 굴복하고 그 휘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니까요. 할아버지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모두 포기하게 되겠죠.”
“음…….”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니 저를 써먹으세요. 얼마든지 이용당해 드리죠. 그 대신, 그 빌어먹을 감시원들 좀 치워줘요. 그게 안 되면 외출이라도 시켜주든가.”
“쿡쿡.”
이현수는 웃고 말았다.
‘당돌하네.’
그의 앞에서 이토록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내미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현수가 가만히 이현주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
입은 웃고 있지만, 이현수의 눈을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감정 없이 가라앉아 있는 그 눈은 바라보는 이에게 섬뜩함을 안겨주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