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58
157화 그때 지금 한 말을 기억하고 있길 바란다
조금 전까지 가장 주목받은 것은 장문경 선배와 허도진인 간의 격돌이었다.
두 분이 한편임을 알고 있는 우리야 수준 높은 비무(?)를 구경하며 식견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덕풍 윤가 입장에서는 그 결과에 따라 생사의 운명이 갈릴 테니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한데, 방금까지 살벌한 검격을 주고받던 두 분이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를 품평하고 있으니 덩달아 나도 주목받게 된 것이다.
“저거 할 수 있으십니까?”
“흉내 내기라면 어떻게 될 수도 있겠지만, 무공으로는 자신 없네. 무당과 소림의 무공은 엄연히 기의 흐름이 달라. 저런 식으로 기의 운행을 수시로 바꾸다간 기혈이 감당하지 못할 걸세.”
“그런데 저 녀석은 하는군요.”
“……신기한 일이로고.”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왜 날 신기한 별종 보듯 하는지 알겠다.
소림권과 무당권의 경계를 허물며 펼친 무공의 변화는 단순히 두 무공을 번갈아 전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수준이었다.
기라는 것은 물과 같다. 그리고 그 흐름에 변화가 생기면 반동이 생긴다.
물로 비유하면 물을 튀기며 출렁이는 거다.
강과 유. 소림과 무당의 성향은 양극단이라 할 만큼 그 반동은 클 수밖에 없다.
무당파 무공의 정점이라 봐도 무방한 허도진인조차 무리라고 선언할 재주인 것이다.
그러니 다들 놀라고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어우! 씹!! 정신 차려라, 얼간아!!’
모두의 주목이 모이면서 나는 익숙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바로 냉정히 쳐내며 마음을 굳게 잡았다.
‘특별함에 취하고 싶거든, 적어도 저분들 경지 정돈 오르고 하자.’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도 문제긴 하다. 결국, 지나친 겸양도 오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만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그 사이의 중도가 필요하다.
생각이 서니 마음에도 선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편안하게 주변의 주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겁니까?”
“무슨 대화냐니? 대화는 대화인 게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모르겠다니! 지금 누구와 태연히 말을 나누는지 묻는 거다. 허도진인!!”
팔 하나를 잃은 윤진혁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생짜로 팔이 박살 났으니 그 고통이 어마어마할 것인데, 부정하고 싶은 눈앞의 현실에 고통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네.’
윤진혁 딴에는 장문경 선배와 허도진인 사이의 격돌을 보며 내심 이상하다 여기긴 했지만, 의식적으로 이를 억눌렀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 도피에는 한계가 있다.
윤진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 듣고 싶다면 말해 주지.”
굳이 더 이상 속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허도진인의 검이 움직였다.
서걱!
윤진오의 목이 떨어졌다.
“대답이 되었는가?”
장문경 선배가 움직인 것도 그 순간이다.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 움직일 기색도 없던 덕풍 윤가 똥덩어리들의 목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피, 피해……!”
“도망……!!”
수가 많아 단번에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래 봐야 심호흡 몇 번 더 할 시간을 버텼을 뿐이다.
오랜 세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왕처럼 군림해 온 덕풍 윤가가 사라지는 순간은 그토록 짧았다.
“흐…….”
눈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본 윤진혁이 학질에 걸린 사람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흐흐…… 흐하하! 흐하하하하하하하!!”
침을 질질 흘리며 석고를 바른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웃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윤진혁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윤진혁이, 덕풍 윤가가 저지른 죄는 너무 컸다.
“시후를…… 시후를 제자로 들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냐?”
“뭔 소린지 모르겠군. 곧 파문할 녀석을 내가 왜 제자로 들이겠나.”
윤진혁의 마지막 발버둥에 답하던 허도진인께서 돌연 내 쪽을 바라보셨다.
“저 아이라면 모를까.”
나를 지목하는 말에 슬쩍 검에 감아 두었던 손수건을 풀었다.
그러자 무당파의 상징과도 같은 송문고검이 드러났다.
“그렇군. 흐흐흐…… 그런 거였어! 으하하하하!!”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윤진혁이 목이 터져라 웃었다.
그리고 속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연청운이구나!”
윤진혁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일생일대의 원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허도진인이 그 시선을 막으며 나를 보호하셨다.
“자네와 덕풍 윤가에는 감사하고 있네.”
“또 무슨 개소릴…….”
“시후라는 놈의 무재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간의 정치질에는 재능이 제법이더군. 현도당주를 구워삶은 것도 모자라, 무당파의 암덩어리들을 잘도 묶어 놨어. 덕분에 무당파 내에 있는 썩은 종자들을 쉬이 걸러낼 수 있게 되었네.”
으드득!
윤진혁이 대답 대신 거칠게 이를 갈았다.
“감사할 일은 하나 더 있네. 근래 구파가 소란스러운데, 그 선두에 있는 것이 종남파라네. 장문제자가 죽었다는 명분이 있다 보니 제지할 방도가 없었는데, 장 후배의 말을 들어보니 길이 보이더란 말이지. 덕풍 윤가의 실체가 밝혀진 덕에 도를 넘고 있는 종남파도 눌러놓을 수 있을 것 같으이. 그러니 내 어찌 자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수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중 수위를 꼽자면 분명 저것일 거다.
본인의 실책, 혹은 본인을 이용해서 원수가 큰 이득을 봤다는 말.
이제 보니 허도진인께서도 속 긁는 수준이 상당하시다.
“개 같은 늙은이!”
“칭찬 고맙네.”
악에 받친 윤진혁의 욕설에도 허도진인은 덕담이라도 들은 듯 허허롭게 웃을 뿐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나온 욕설에 나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들…… 네놈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이 위선자들! 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풉!”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나는 허도진인의 그늘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섰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흐하하하! 지옥이 별거겠는가! 지옥이라고 해봤자 나 같은 이에겐 그저 고향 같은 곳이겠지!”
아무래도 저 작자는 지옥에 이상한 낭만이라도 품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곳에선 내가 이길 것이다! 이 내가!!”
내상이 터졌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찢어진 살덩어리들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귀기 어린 눈빛으로 저주를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섬뜩했다.
하지만 윤진혁이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나직이 경고했다.
“흥! 언젠가, 우린 다시 보게 될 거야. 지금은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의 일을 떠올리는 날이 오게 될 거다.”
눈을 마주하며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게 했다.
“그때 지금 한 말을 기억하고 있길 바란다. 내가 그날 꼭 다시 물을 것이니까.”
“흐흐…….”
윤진혁은 자신 있게 웃었다.
지옥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웃음이었다.
‘저 웃음이 얼마나 가려나?’
장삼풍 사부의 설명대로라면 밑바닥을 긁어 지르는 비명 소리로 바뀌는 것도 금방일 거다.
직접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숨이 끊어져가는 윤진혁의 멱살을 패대기친 나를 허도진인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지옥에 대해서 잘 알고 말하는 것 같구나.”
너무 굳은 확신을 담았나 보다.
허도진인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수많은 현인들이 논(論)했고, 지금도 논하고 있는 곳이니까요.”
사부님들에게는 그저 짜증 나는 일터일 뿐이겠지만.
지금도 천마 사부께서는 마인들을 똥물에 튀기고 계시는 곳이다.
‘아! 사부님들께 이놈들 좀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하면, 이것도 부정 청탁(?)이 되려나?’
갑자기 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허도진인은 내가 감정이 격해졌다고 여기셨는지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다독이셨다.
“허허. 그래, 그렇지. 다만, 들은 대로라면 네가 갈 곳은 아닐 것 같구나.”
‘그렇지도 않을걸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과 행동에 왠지 깊은 죄송스러움이 마음에 생겨났다.
선근(仙根)이 생긴 허도진인이시다.
일이 잘 풀려서 천상에 오르신다면, 그 짜증 나는 일터로 출근해야 할 수도 있다.
먼 훗날 지금의 대화를 떠올릴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될지 은근히 궁금해졌다.
***
한편, 그 시각.
덕풍 윤가가 자리 잡은 도시는 난리가 났다.
덕풍 윤가에서 도주한 자는 없지만, 그 담장 너머로 넘어간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하십검에 이른 두 무인의 격돌은 주변에 강한 여파를 남겼다.
공기가 술렁이고, 소름을 돋게 하는 소리들이 가득했다.
멀리서나마 그 여파를 감지한 일부 사람들은 높은 건물 지붕에 올라 덕풍 윤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폈다.
층층이 세워진 건물들과 담장으로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위로 솟는 검광들이 도깨비불처럼 번쩍거리는 것들까지 가리진 못했다.
당연히 소식은 관아에도 빠르게 알려졌다.
하지만 관아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관망하실 생각이십니까?”
안절부절못하는 관병들 일부가 현감을 찾았다.
나 현감이라 불리는 중년인이 관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그동안 덕풍 윤가에 받아먹은 게 많은가? 쏠쏠한 돈줄이 끊어질까 걱정인 겐가?”
“아니,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내 한 가지 묻겠네. 자네가 볼 때 덕풍 윤가는 무림 세력일까? 아니면 이 지역을 책임지는 호족일까?”
“그으…….”
대답을 하려던 관병은 나 현감의 차가운 눈길을 느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올 경우 경을 칠 것임을 직감한 관병이 고개를 숙이며 읊조렸다.
“무림…… 세력입니다.”
“답이 나왔군. 저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림의 일이네. 관이 개입할 일이 아니니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어.”
“예…….”
“가보게. 관아의 문은 지금처럼 굳게 닫아걸고.”
최후통첩과도 같은 굳건한 지시에 관병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돌아갔다.
“쯧! 욕심만 많아 가지고.”
나 현감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내 그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드러난 꼬리는 잘라내야 하는 법이지.”
묘한 웃음만큼이나 묘한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은 조용히 묻혔다.
***
어느 산의 중턱. 굵은 나무를 엮어 만든 목책이 성벽처럼 둘린 곳.
산중에 군사적인 용도로 지어졌으나, 병사로 보이는 자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산책 안에서 두 사내가 대화를 나눴다.
“거록채주가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고 합니다.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악군패 그놈이 상처를 입었다고? 그자가 만만한 놈이 아닌데……. 안휘에서 당한 거라면 남궁세가 창궁단이라도 움직였던 건가?”
“남궁세가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장강 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외부로 돌릴 힘이 부족하니까요.”
정보력이 남다른지 안휘에서 일어난 일을 나름 파악하고 있다.
“허면 이전에 수상한 제안을 던지고 갔던 놈들 짓인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른 산채들 쪽도 묘한 놈들이 접근한 흔적이 있었던 만큼 그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흐음…….”
누가 봐도 철저한 상명하복의 관계다.
“제대로 알아보고 와.”
“존명(尊命).”
명령은 받은 이가 짧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사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빈 허공을 노려보았다.
“남이 짜 놓은 판에 놀아나는 것은 좋은 기분이 아니지만…… 먹이가 탐나니 간과할 수가 없겠어.”
노기를 드러내는 사내의 등 뒤에서 잠깐이지만 주변의 공기를 휘젓는 어떤 형태가 일렁이다 사라졌다.
“……잘만 되면 돌아갈 길이 보일지도 모르겠군.”
어딘가 이화를 닮은 구석이 있는 사내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