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2
제12화 – 제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나는 건물에 들기 전부터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주태가 모아온 이들 중 살막의 살수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십 할에 가까웠다. 그들은 내가 무슨 목적으로 주태를 시켜 사람들을 불러오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 상황 자체는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사람들 틈에 살수를 집어넣어 어수선한 틈을 타 살행을 도모하려 들지 않을까.
주태가 일일이 확인을 했을 테지만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소환한 이들 모두의 면면을 잘 아는 것은 아닐 터이니 다소 간의 착오는 불가피할 것이었다. 나는 이를 염두에 두고 살수가 건물에 들어왔을 것을 전제로 암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살수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복수의 살수를 가정하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덕분에 흥분이 극에 이른 와중에도 우편에서 수상한 기미를 포착할 수 있었다.
내 주목을 끈 이는 허리가 꼬부라진 노파였다. 타인의 원사를 듣다가 동병상련의 공감과 분노로 인해 숨결이 거칠어진 다른 이들과 달리 꼬부랑 노파는 안정된 호흡을 유지했다. 그것만 가지고는 확신하기 어려웠으나 은근슬쩍 내 쪽으로 접근하며 손을 들어 올렸을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솜털이 곤두선 건 단순히 노파가 손을 쓸 작정임을 간파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갈고리 같은 손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겨냥해 긴장한 것이었다. 설마 내 의뢰인들을 노리는 건가. 먼저 그들을 해치워 혼란을 일으킨 연후 숨어있는 방수들을 동원해 나를 공략하려는 건가.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순간이 아니었기에 나는 노파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그녀를 제압한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게 붙들린 노파가 쪼그라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이 아니라 승자의 미소였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무심결에 붙잡았던 그녀의 손목은 기름을 바른 양 미끈거렸다. 그걸 느끼자마자 재빨리 놓았지만 이미 늦었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내 손바닥에는 향후 그림자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을 지독한 냄새가 배었을 터였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흑문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
소기의 임무를 달성한 노파는 미련 없이 독단을 깨물었다.
살행의 시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저항조차 하지 않고서!
이런 독종 같으니.
내게 붙들렸던 노파가 별안간 입에서 거품을 뿜고서 절명하자 건물 안에 극심한 동요가 일었다. 다들 경악성들을 토해내며 내게서 멀어졌다. 의뢰인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면 곤란한지라 나는 일단 출입구부터 막아섰다.
“진정들 하오. 이 여자는 나를 죽이러 온 살수요. 전에 처치했던 악당의 친인이 그걸 복수한답시고 나를 죽이도록 청부한 것이었소.”
내 해명은 별 효과가 없었다. 중인은 여전히 불신과 의혹으로 범벅이 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상황을 수습한 이는 주태였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소. 다들 보시오. 이 여자는 흑사파의 ‘칼귀’ 패거리에게 능욕을 당하고 숨진 아라골 연화의 할미가 아니외다.”
쓰러진 노파에게 달라붙은 주태가 그녀의 얼굴을 뜯어냈다. 인피면구가 벗겨지자 쉰 전후로 보이는 중년 여인의 낯짝이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주태가 그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다들 보았소? 이게 진실이외다. 공자님은 또 다른 적을 만들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직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한을 풀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협행에 나선 것이오. 그러니 오늘 공자님의 은덕에 힘입어 원수들을 처단한 후엔 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바치기 바라오들.”
주태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러면서 나를 주목했다.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한 나는 가까스로 자중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정말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원한을 갚을 수 있단 말입니까?”
주태가 내 눈치를 보았다. 그에게 미루지 않고 내가 답변했다.
“그렇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오.”
주태의 시기적절한 개입과 활약 덕택에 고비를 넘긴 나는 진도를 나갔다.
“그럼 계속 여러분의 사정을 들어보겠소. 시간은 넉넉하니 서두르진 않아도 되오.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가급적 상세히, 그리고 실감 나게 각자의 사연들을 들려주길 바라오.”
이렇게 원사 청취가 재개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더 이상의 살수는 없었다. 남은 이들은 모두 진짜 의뢰인들이었다.
***
무진장 수월했다.
온 보양을 돌아다니며 잡아 올 필요 없이 기다리기만 하면 사냥감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나는 그들이 건물에 들어오는 족족 마혈을 찍고서는 원한의 용광로에 던져 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두목이 자신들을 저승사자에게 팔아넘겼음을 뒤늦게 깨달은 흑도의 악당들은 원한에 사무친 칼질들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의미로는 살막의 살수들 못지않은 독종들이었다.
개중 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무려 스물여덟 명에게 난도질을 당한 애꾸눈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주먹코 중년인이었다.
전자는 간지러우니까 좀 제대로 쑤셔보라는 여유를 부리며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치를 떨게 했고 후자는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그가 해친 이들의 유족에게 참회의 언사를 남겼다.
전체적으로 순조로운 진행이었으나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여섯 명이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비수를 꽂지 못했다. 전날 포목점 중년인이 보였던 행태가 되풀이된 것이었다.
그러나 후과는 사뭇 달랐다. 청화를 피우지 못했던 중년인과 달리 처단을 포기한 여섯 명 전원이 내 상단전에 불꽃을 일으켜서 크게 놀랐다. 오히려 가장 잔인하게 원수를 처치한 묘령의 여인이 제 욕심만 채우고는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괘씸한지고.
나는 사냥감의 처치 여부가 아니라 의뢰인이 품은 감사의 원념이 핵심임을 비로소 알았다. 귀중한 발견이었다.
***
일사천리였다.
총 열아홉 명의 악당들에 대한 무자비한 원한 풀이는 반 시진도 안 되어 종결되었다.
상단전에 타오르는 푸른 불꽃의 향연에 취해있던 나는 처형을 끝낸 후 누군가 쏟아낸 통곡이 전염병처럼 번져 순식간에 건물 안이 울음바다가 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주태에게 뒷수습을 맡기고 어제 양 관주와 밀담을 나누었던 개울가로 갔다. 그러고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오늘의 성과를 만끽했다. 매일 이런 식으로 풀린다면 일 년 이내에 천지조화지경에 이를 터였다.
그 기적이 이루어지는 날 나는 초인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무림을 평정하고 천하의 유일무이한 절대지존(絶對至尊)으로 우뚝 설 것이었다.
***
최고의 하루를 보냈지만 마무리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아예 그날 중으로 백걸방 패까지 처리할까 하다가 자시(子時)를 의식하고는 보류했다.
백걸방은 두목인 염상태란 작자가 가장 많은 원한을 지은 악종이기에 흑사파처럼 자발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에겐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나는 이제는 듬직한 조력자가 된 주태에게 작전 구상과 준비를 일임하고 야산으로 갔다. 가기 전에 그의 혈도를 풀어준 건 살수로 인해 발생한 소동을 가라앉힌 공에 대한 보상이었다. 주태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금제를 해제하자 감읍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주태에게 선처를 베푼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내가 길어야 나흘 후면 보양을 뜬다고 했기에 그는 도주할 생각을 접었을 것이었다. 며칠만 고생하면 되는데 굳이 터전을 버리고 달아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살막도 그에겐 위협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노파로 변장하고 들어온 살수의 행동의 저의를 착각했다. 그 여자는 내 의뢰인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들을 미끼로 나를 유혹한 것뿐이었다.
사실 살막은 청부 대상 외엔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도 유명했다. 인질이나 함정 따위를 활용한 암수를 쓰지 않고 오로지 표적에만 집중하는 정공법은 그들의 자존심이자 생존 비법이었다.
각설하고 그날의 뒷맛이 찜찜했던 부분으로 넘어가자면, 운공이 말썽이었다.
한마디로 그날 획득한 적화와 청화의 불균형이 문제였다. 적화에 비해 청화의 양과 질이 적잖이 부족하고 떨어졌다. 초승달 눈썹과 전날의 두 여인에게서는 겪지 않았던 일인지라 심히 불안했다.
이대로는 일종의 절름발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이에게서 난제를 풀 실마리를 찾았다.
***
자시부터 해 뜰 녘까지 파열과 치유를 거듭하며 지옥과 극락을 오가다 간신히 운공을 마친 나는 은신했던 동굴을 나와 주태의 건물로 향했다.
저자를 지나고 있는데 거추장스러운 시선들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살막의 주구들이 보내는 은밀한 눈길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호기심을 담은 시선들이었다.
나 몰래 속닥이는 소리들을 잡아내던 나는 한순간 기가 막혔다. 그러고는 그길로 방향을 바꿔 자하옥관으로 갔다.
기루답지 않게 고색창연한 풍미를 자아내는 육 층 전각을 돌아간 나는 솔숲을 지나 널찍한 마당에 들어섰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와옥의 문이 열리더니 주근깨가 뛰어나왔다. 맨발로!
“어서 오세요, 공자님. 또 오셨네요. 관주님은 내일이나 오신다고 했는데, 설마 저를 보러 오신 건가요?”
나는 주근깨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그렇소.”
주근깨의 서늘한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정말요? 아아…….”
나는 기뻐서 말을 잇지 못하는 주근깨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소저에게 따지러 왔소.”
주근깨의 안면이 경직되었다.
“무슨 일로…….”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자를 거니는데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고자’라고 수군거리더군.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어디서 발뺌을.
내가 눈에 힘을 주자 주근깨가 울먹였다.
“정말이에요. 하도 그년들이 공자님이 제 봉야를 거부했다고 놀리기에 공자님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항변했을 뿐이에요. 그년들이 그걸 제멋대로 곡해해서는 그런 괴담을 퍼뜨린 거예요. 나쁜 년들. 소향이가 없다고 나를 따돌리고 괄시하는데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반드시 네년들한테 따끔한 맛을…….”
말을 하던 도중에 대상을 바꾸더니 주근깨가 펑펑 울었다. 그러나 그녀가 꺼내든 비장의 패는 나에게 별반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짜증을 유발하는 역효과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경솔한 처사였소.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일일이 해명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야 원. 영락없이 고자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할 판이오. 이를 어찌 책임질 거요?”
앞으로는 입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다소 엄하게 말했더니 주근깨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죄송해요, 공자님.”
사과 뒤에는 절절한 뉘우침이나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다짐의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주근깨가 쏟아낸 건 엉뚱한 사랑 고백이었다.
“저는 공자님이 고자라도 상관없어요.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만이 공자님을 연모할 수 있을 테니까.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제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게 미쳤나.
광기로 번들거리는 주근깨의 눈빛을 접한 순간 기현상이 일어났다.
엥. 이게 무슨 조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