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33
제33화 – 아!
“어딜 도망가려고. 너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해.”
“무슨 소리요?”
“귀가 먹었어? 아니면 까마귀 고기를 먹었어?”
나는 몸을 돌렸다.
“야! 말하다 말고 어딜 가? 거기 안 서!”
여자의 명을 무시하고 내쳐 걸었다. 여자가 소리쳤다.
“우린 같이 있어야 한다니까. 내가 가면 사부가 올 거라고!”
불현듯 전날 양 관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개를 때리면 주인이 나오는 법이죠.’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와의 재회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천지조화지경에 이를 때까지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진인에게 일러바칠 거란 말이오? 나한테 깨졌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여자는 풀이 죽었다.
“누가 그런대. 하지만 사부는 분명 어찌 된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거야. 그러면 나는 오늘의 일을 실토해야 할 테고. 그다음엔…….”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듣지 않아도 알고도 남았다.
재수 없는 늙은이는 제 후인이 나에게 지리라는 걸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결과에 승복할 리도 없었다. 내가 마력을 동원했으리라 여기고는 징치한답시고 난리를 칠 게 뻔했다. 직접 대면하면 자기가 잘못 짚었음을 알 터이지만 착각을 인정하고 순순히 돌아갈 위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말했잖아. 너하고 함께 있겠다고.”
“나를 따라다니겠단 말이오?”
“누가 그런대? 그냥 같이 있겠다는 거지.”
그게 그 소리 아닌가.
양 관주 흉내를 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긴 한숨을 내쉬자 여자가 울상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나는 네가 좋은데.”
이건 또 무슨 개구리 옆차기하는 소리야.
제멋대로 고백을 해놓고는 부끄러운지 여자가 뽀얀 볼을 홍시처럼 붉게 물들였다.
엥? 이건 뭐지?
갑자기 여자가 귀여워 보였다.
당혹감을 감추며 여자에게 중요한 사항을 확인했다.
“당신이 나하고 있으면 그 재수……, 아니 진인이 나오지…….”
여자가 툭 뱉은 말이 내 말을 잘랐다.
“진.”
“뭐요?”
“나는 진이라고. 안진. 그냥 이름으로 불러.”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알겠소. 안 소저가…….”
“진이라니까. 고리타분한 유생들도 아니고 소저가 뭐야, 소저가.”
이런 제길.
욕을 뱉을 새도 없이 여자, 아니 안진이 내 실언을 물고 늘어졌다.
“근데 좀 전에 뭐라고 했어? 재수? 너, 설마 내 사부더러 재수 없는 노인네라고 하려던 건 아니지?”
흠, 맹한 줄 알았더니 눈치가 제법이군. 노인네를 늙은이로 바꾸면 완벽했다.
여하간 뭔 모함이냐고 시치미를 떼려는데 안진이 싱긋 웃었다.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사부가 좀 재수 없긴 하지. 하지만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사부가 알면 너는 물론이지만 나도 껍질을 벗기려 들 테니까.”
어라? 의외로 통하는 데가 있네?
혹시라도 낚시질일 수도 있었기에 나는 맞장구를 치지 않고 정색했다.
“다시 묻겠소. 진 소저가 나와 같이 있으면 오히려 진인이 찾으러 오지 않겠소?”
“그 반대야. 애초에 너를 감시하러 내보낸 거니까. 마침 삼재에 들어 속인(俗人)들을 접하고 바깥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네가 없었다면 사부는 일러야 스무 살이 되는 내년에야 출원(出源)을 허락했을 거야.”
“그러면 나와 무관하게 혼자 돌아다니면 되잖소?”
“아무리 재수 없는 노인네라지만 그래도 사부는 사부야. 천애 고아였던 나를 거두어 지금껏 금이야 옥이야 귀히 여기며 온갖 정성을 쏟았는데 은혜는 갚지 못할망정 안 보인다고 기만할 수는 없어.”
억지스러운 논리지만 왠지 수긍이 갔다. 나도 ‘노인네’에게 유사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일단 안진의 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내 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동행을 허하겠소.”
“물론이야.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곤 일절 네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나는 ‘한 가지 경우’가 뭔지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대체 왜 그런 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선인들은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세사불개입의 원칙을 지킨다고 들었는데.”
“틀은 깨라고 있는 거요. 수천 년이나 묵었으니 이제 바꿀 때가 되었소.”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도에 이르는 길이 아닌데? 너, 혹시 사부가 의심하는 것처럼 교활하고 악독한 야욕을 품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오. 그리고 악독한 야욕? 그게 공공문의 당대 문주에게 할 소리요?”
“화내지 마. 수많은 선사들이 몸소 검증했던 정도를 벗어나는 걸 보통 사도(邪道)라고 하잖아. 나는 네가 그리로 빠질까 봐 걱정돼서 그래.”
“내가 어느 길을 택하건 전적으로 내 권리요.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고.”
“그게 인세를 지옥으로 만드는 악마지로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잖아?”
“누구도 남의 미래를 예단할 수 없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 나서든가.”
“그럴 거야.”
나는 안진을 노려보았다. 의외로 나와의 눈싸움을 피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
부러진 손목과 부러질 뻔한 발목의 부상이 덜 아물었지만 나는 출정을 감행했다.
양 관주에게 총력을 쏟아 반드시 시일 내에 준비를 마치라고 닦달했는데 내 사정을 핑계로 행사를 미룰 수는 없었다.
사냥감인 귀면수라가 십대악인 중 무력 면에서는 하위권임도 고려했다. 그의 무위는 초절정 하(下) 정도로 추정되었다. 석진에게는 어림도 없고 한월노모와 비슷한 수준이니 한 손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귀면수라의 은신처는 보양에서 서북으로 사오백 리가량 떨어진 고흥이었다. 공교롭게도 석곡을 나올 때 내가 보양 다음으로 점찍었던 행선지였다.
내 고객들, 즉 귀면수라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은 고흥이 아니라 고흥 인근의 율촌에 모여 있을 터였다. 수백 명의 외지인들이 한 번에 고흥에 몰려들면 귀면수라의 주목을 끌 우려가 있어서였다.
양 관주는 상운의 지점들을 동원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객들을 율촌의 장원에 마차로 실어 날랐다고 했다. 일천 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데려온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하니 꽤 고생을 했을 것이었다. 양 관주의 노고를 치하한 나는 내 그림자 행세를 하려 드는 안진을 혹처럼 달고서 율촌으로 출발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축 늘어진 밤나무 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노래를 불렀다.
왼 다리가 불편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없었기에 예정했던 시각보다 한 시진 반이나 늦게 율촌에 도착한 나는 양 관주에게 들은 유유장(愉愉莊)으로 향했다.
장원은 볼품없었다. 담장은 곳곳이 허물어졌고 너른 마당엔 잡초들만 무성해 폐장의 분위기가 물씬했다. 먹을 게 없는지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마당 너머에 우두커니 선 네 채의 와옥들도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편의 큼직한 창고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심장이 펄떡거렸다. 잘하면 오늘 수백 건의 원사를 일시에 해결하고 수십 년 치에 해당하는 적공을 얻게 될 터였다.
크게 숨을 들이켠 나는 창고로 걸어갔다. 안진은 나를 따르지 않고 대문 옆의 소나무에 기대어 섰다.
창고 앞에서 서성이던 초로의 사내가 나를 보고는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여의공자. 저는 고흥 고월당(古月堂)의 당주로 있는 하운(河雲)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상체를 직각으로 꺾으며 예를 차리는 사내를 일으켰다.
“수고했소. 얼마나 모였소?”
“전부 사백이십이 명입니다.”
엄청난 숫자였지만 기대엔 못 미쳤다.
귀면수라에게 희생된 ‘아이들’은 세상에 알려진 것만 팔백이 넘었다. 그들과 함께 잡혀갔던 ‘형제들’을 빼더라도 부모들만 일천육칠백에 달할 터이니 피해자들의 사 분의 일가량만 온 셈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만 해도 어딘가. 석곡을 나올 때 염두에 두었던 ‘가급적 하루 세 건’의 목표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일백이십 배나 되지 않은가.
재채기만 해도 떨어질 것 같은 부실한 문을 열고 사내와 함께 창고로 들어서자 수백 쌍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죽립을 벗으며 내 고객들을 둘러보았다. 창고에 운집한 이들은 연령대가 다양했다. 노인들도 많았지만 중년의 남녀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젊은이라 해도 무방할 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는 귀면수라의 악행이 물경 반백 년에 걸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십 년 전에 그 악귀에게 어린 자식을 잃은 부부들은 이제 팔구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테지만 그의 엽기적인 행각이 중단된 사오 년 전에 참척의 변을 당한 이들은 서른 살 어림일 수도 있었다.
창고 안엔 내 고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회색 무복을 차려입은 장정들이 스무 명가량 그들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하운의 수하들일 터였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양 관주는 최소한의 심복들만 부려 최대한 은밀히 일을 처리하도록 신신당부했다지만 수백에 달하는 인원을 통제하려면 불가피한 조치였을 터였다.
이미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기 위해 하운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여의공자께서 오셨소. 여러분의 피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 먼 길을 오셨으니 우선 감사의 인사들부터 올리길 바라오.”
이런!
나는 양 관주를 통해 이른 대로 진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순서를 뒤바꾼 하운의 오지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태를 데려오는 건데.
하운의 요구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감사의 언사를 내뱉긴 했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탓인지 한 줌의 청화도 피워 올리지 못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 저희가 그 악마를 처단하도록 해 주시렵니까?”
나는 손짓으로 하운을 물러서게 했다. 구태여 그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
“그렇소. 오늘이 가기 전에 그자를 잡아 오겠소.”
다른 목소리가 내 말을 받았다.
“그자가 그 악종임을 어떻게 압니까? 가면 뒤의 진면목을 본 이들은 아무도 없는데.”
하운이 끼어들었다.
“내가 보장하겠소. 상운이 총력을 기울여 조사한 결과이니…….”
하운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소동을 잠재운 것은 난데없는 어린아이 음성이었다.
“제가 알아요.”
창고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어가자 군중이 길을 터주었다.
사람들이 갈라진 길 끝에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어미로 보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참극의 희생자들 중 한 명이 와 있을 줄이야.
나는 아이에게 가까이 갔다. 내가 두려운지 아이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아이의 모친이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껴안았다.
“진정하오. 그자를 어떻게 알아본다는지 말해 주겠소?”
군중이 은연중 술렁거렸다. 아이에게 향한 내 말투가 위화감을 준 것이었다. 아이도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질문을 반복했다.
“그 악귀를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요? 얼굴을 봤소?”
아이가 도리질을 했다.
“그러면 무엇으로…….”
“목소리요.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어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요.”
“아!”
나를 포함한 모두가 납득했다.
나는 고객들로부터 원사를 청취하기 전에 아이의 수혈을 짚었다.
원독에 찬 아우성을 듣고 있다가 아이가 정신이 나가버리면 큰일이었다. 귀면수라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아이들의 절대다수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고 살아남은 극소수도 미치광이가 되었다. 양 관주에게 듣기로 그 참극의 날 이후 온전한 삶을 산 아이는 전무했다.
그런데 멀쩡한 아이가 남아있었다니! 나로서는 귀중한 증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이 완결될 때까지는 반드시 보호해야 했다. 내가 잡아 온 제물이 귀면수라임을 확신해야 고객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 인사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