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an’s Shooter RAW novel - Chapter 1005
마탄의 사수 (1005)
이하를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이하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런 눈이었다.
“오라방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모두가 뜯어말리는 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우직하게 밀어붙이곤 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주변의 비난을 받을 때에도……. 나는 언제나 쿳시 오라방의 편이었다. 적어도 마음만은……. 오라방의 편이었어.”
이하는 플람므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굳이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플람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는 걸 안 순간, 더 이상 이하가 자기 주장으로 무언가를 피력할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나서고 싶었지만 오닉스의 힘은 너무나 강했다, 너무나……. 무엇보다 라바틀, 그 어리석은 녀석이 오닉스를 뒤따르고 있었으니 나는―”
“할머님.”
“괜찮다, 아레브 아이야.”
아레브가 플람므의 곁으로 다가오려 했으나 플람므는 그것을 막았다. 플람므는 잠시 호흡을 고르곤 이하를 보았다.
이하는 그녀에게 강대한 기세가 있음엔 틀림없으나, 신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이 육체적 질병에 걸릴 리는 없을 터. 쿠즈구낙’쉬와 라바틀을 생각하는 그녀의 말과 태도로 보아 그것은 분명 마음의 병이리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AI로 설정되어 있나 보군.’
그렇다면 잘된 것이지 않은가. 이하는 플람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레브가 잠시 움찔거렸으나 플람므는 이하를 그대로 두었다.
이하는 붉게 쪽진 머리를 하고,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플람므 님. 앞으로 메탈 드래곤과 컬러 드래곤, 양측 모두에게 그런 아픔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제2의 쿠즈구낙’쉬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돕겠다. 그러나 인간 아이야, 너는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어찌 나를 돕고자 하느냐.”
“저는 컬러 드래곤에게 미움을 산 인간입니다. 아마 쿠즈구낙’쉬 님의 전언을 듣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조차 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셨겠지요. 다른 컬러 드래곤들은 실제로 지금도 그러려고 들 겁니다. 하지만……. 컬러 드래곤의 장로를 선출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는 있을 겁니다. 맞나요?”
〈업적: 드래곤에게 자유를!(S)〉
보상: 차기 수장 선출 자리 참석 가능
이하는 업적의 보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닉스를 죽인 너의 이름은 우리 일족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 회의가 끝나는 순간 널 죽이려 들겠지만, 회의 자리에서는 괜찮을 게다. 나 또한 너를 막아 줄 수 있다.”
“좋습니다. 그럼……. 무례한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하의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떠돌았다.
람화연의 조언을 막 들었던 덕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컬러 드래곤들이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무례한 질문이라면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다, 인간 아이야.”
“그, 그렇죠. 크흠, 우문현답이었네요. 그러나 꼭 필요한 질문이어서 미리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제가 알고자 하는 건…….”
이하는 플람므의 현명한 조언을 들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색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컬러 드래곤들이 과연 이 문제를 받아들일까.
이하는 조용히 물었다.
“플람므 님보다 강한 블랙 드래곤은 얼마나 되고, 그들의 레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들을 죽이려는 건가.”
“네.”
“나보다 강한…… 드래곤이라 물어 놓고, 그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말하자면 레드 드래곤 플람므도 당장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지 않은가.
아레브는 그제야 의미를 이해하고 발끈하려 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플람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그래서! 제가 무례한 질문일 수 있다고 말씀드린 건데요.”
“오호홋……. 그렇구나. 재미있어. 허나, 인간 아이야. 피로 만든 자리는 피의 복수를 부르는 법이란다. 나와 비슷하거나 내 이상의 실력을 지닌 블랙 드래곤 셋을 모두 죽인다 해도……. 그들은 결코 의심을 풀지 않을 거다. 이미 만나 보았겠지만 오닉스의 친손자인 스여흐는 더욱 그렇지.”
“스여흐, 그 블랙 드래곤이죠?”
이하는 아레브에게 물었다. 아레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야심이 많소. 스스로 장로가 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기에 나서서 행동하진 않지. 실제로 이번 장로 후보로 거론되는 블랙 드래곤들은 모두 오닉스와 다른 혈통이라 그는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차기 장로는 블랙 드래곤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빚을 지워 놓고 자신은 차차기 장로 정도를 노리겠다, 뭐 이런 건가요?”
“하물며 내가 레어로 돌아가자마자 나에게 연락을 해 올 정도로 우리 레드 일족을 의심하고 있으니, 만약 하이하 당신이 블랙 드래곤 어르신들을 배제할 수 있다 해도…….”
뒷감당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 죽인 이후의 수습이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당연하니까.
플람므와 아레브의 심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블라우그룬도 사뭇 진지해졌다. 이하가 블랙 드래곤을 죽이겠다는 건 이미 이해한 상태였다.
그러나 방법은? 의심 많은 스여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사후 처리에 대한 방법은 있으십니까, 하이하 님. 혹 스여흐라는 드래곤까지 같이 죽여야 한다면……. 같이 왔던 블루 드래곤에 대한 처리도 해야 할 것이고,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을 때 아레브라는 레드 드래곤은 다른 컬러 일족으로부터 의심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블라우그룬 또한 모든 흐름을 파악한 상태였다. 따라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성장한 어덜트급 드래곤의 AI로도 즉답을 찾아낼 수 없는 상황. 이것을 어떻게 헤쳐 나갈 작정인가?
블라우그룬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려오는 순간에도 이하는 멍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 흠! 네. 어…… 뭐,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두 가지잖아요? 메탈 드래곤이 저지른 일이 아니다, 레드 드래곤이 저지른 일이 아니다. 일단 두 개만 안 걸리면 되는 거죠?”
그러곤 갑작스레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는 이하.
두 개의 손가락을 꼽은 이하를 보며 플람므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 아이야, 이미 바하무트의 권속인 네가 관여하는 것 자체가 메탈 드래곤들의 간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거란다.”
“음, 음, 그럼 앞선 두 개에 더해서 ‘인간 하이하가 한 일이 아니다.’까지 있으면 되는 거네요? 그쵸?”
주의할 점은 총 세 개.
이하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 있는 모든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블랙 드래곤을 죽이는 방법이 있는가.
드래곤들의 어리둥절한 표정도 모른 채, 이하는 지도를 펼쳤다.
“그럼 플람므 님? 이제 주의해야 할 블랙 드래곤 세 기. 순서대로 좀 불러 주시겠어요? 이름이랑, 레어 위치랑 해 가지고.”
바닥에 쭈그린 자세로 지도 위에 메모를 표기하려던 이하의 곁에서 블라우그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하이하 님, 이건―”
“플람므 님도, 아레브 님도 막 칭찬을 하셨지만……. 실상 스여흐라는 드래곤도 그렇게 똑 부러지는 녀석이 아닐 수 있어요. 이런 것도 눈치 못 채고 있었으니까.”
이하가 히죽거리자 플람므도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간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던 노년의 여성은 갑작스레 폭소했다.
“하, 할머님?”
“아하핫! 오랜만에 보는 마법이로군. 너무도 미약한 마나라 아이들이 대비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가.”
“그, 그건 딱히 칭찬이 아니지 않나요, 플람므 님? 하긴, 기절했을 때 당한 거라 눈치를 못 챈 것일 테니 결국 그게 그거겠지만요.”
아레브의 당황에도 플람므는 계속해서 웃기만 할 뿐이었다. 괜스레 멋쩍어진 이하는 플람므에게 블랙 드래곤들의 정보를 알려 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앞으로 수행할 일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이하가 체카에게 얻은 미니스의 전도 속 한구석에 T1, T2, T3, T4 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레브는 좌, 우로 조금씩 걸으며 지도를 보다 황당한 표정으로 이하를 보았다. T4라는 글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까지?”
타깃 원, 투, 쓰리, 포. 그것은 람화연의 요새를 습격해 왔던 네 기의 컬러 드래곤에 대한 〈마킹〉 흔적이었다.
* * *
메탈 드래곤 측에 설명을 마친 이하와 블라우그룬은 바하무트의 레어를 빠져나왔다. 후보뿐만 아니라 자신의 투표권을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인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믿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선대 바하무트 님의 유지가 바로 남은 동족들의 끈끈한 유대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뭐……. 아니, 나야 어차피 하루, 이틀 정도 더 기다려도 되니까 블라우그룬 씨도 회의 참석하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이하가 팔짱을 껴고 아쉽다는 투로 말하자 블라우그룬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미 그와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공유한 상태에서, 블라우그룬이 서두른 이유도 따로 있었다.
“컬러 드래곤의 일들까지 빠른 시일 내에 마쳐야……. 하이하 님께서 안심하고 〈라퓨타〉로 가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거기까지 생각해서…….”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조만간 신대륙 동부로 떠나갈 인원들이 대략적으로 정해질 것이고, 그들을 기준으로 팀을 나눈 후 곧장 출발하게 되리라.
즉, 오늘 하루를 바하무트와 관련된 회의로 보낸다면 컬러 드래곤들의 일을 처리할 여유는 거의 없어지는 셈이나 다름없다는 뜻!
“이번엔 저도 가 보고 싶기도 하니까요. 지난번 하이하 님이 가져다주신 〈양자 모래〉에 대한 연구는 제법 재미있었거든요. 하이하 님과의 동행한다면 더욱 흥미로운 모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블라우그룬은 이하를 향해 윙크했다. 이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화연이가 있었다면 분명히 또 귓속말 했겠구만.’
블라우그룬은 그저 장난스럽게 한 행동이겠지만, 독특한 청록의 긴 생머리, 하물며 황금 비율에 걸맞는 이목구비를 지닌 미남자의 장난이다.
블라우그룬과 상당히 친한 이하조차 당황스럽건만, 웬만한 유저들은 그저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을 것이다.
블라우그룬과 함께 걸으며 이하는 다시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다들 많이 화난 것 같지는 않죠?”
“그보다는 당황해서 할 말이 없어진 게 아닐까요.”
“아니, 저는 블라우그룬 씨가 사퇴한다고 하면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런 거 보면 메탈 드래곤 쪽이 확실히 대단하긴 한 것 같아요.”
“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리에서 기분을 드러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블라우그룬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하는 그런가?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몇몇 메탈 드래곤은 정말로 기분 좋은 것을 참았을 수도 있지만 또 몇몇 드래곤은 블라우그룬의 사퇴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