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1
201
마야 9
원귀색명(冤鬼索命) ―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원수를 갚으러 오다
제1장 피활착(被活捉) ― 적에게 사로잡히다
1
마인들은 남과 여, 두 부류로 갈렸다.
마도, 수검, 혈유가 세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금연화, 다담선자, 절혼마녀, 일령도 한 덩어리가 되어 치달려 나갔다.
출발한 것은 사내들이 먼저였지만 사라지기는 여인들이 더 빨랐다.
여인들은 절륜한 신법을 지녔다. 사내들은 마공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죽음의 절기를 익혔다.
손속에 사정을 담지 않았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많은 살상을 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내기라도 걸어야 결과를 알 수 있을까?
“십팔…… 아니, 십이밀막검을 남겨둘게.”
천멸도주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마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팔밀막검을 옆에 남겨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밀막검을 십팔밀막검에서 현재 생존자들만 헤아린 십이밀막검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이다.
천멸도 살수들은 죽어서도 소속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십팔밀막검의 신분을 얻으면 영원히 십팔밀막검이 된다. 한두 명이 죽을 수도 있고, 전원 몰살당할 경우도 생기겠지만 어느 경우에나 그들은 십팔밀막검이다.
죽어서 육신은 사라질지언정 영혼은 언제나 함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여덟 명밖에 남지 않은 백인수도 여전히 백인수라 불렀고, 예순여덟 명이나 빠져나간 팔십일전혼도 여전히 팔십일전혼이었다.
마야는 천멸도 살수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한 우애(友愛)’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이상해?”
“많이.”
“풋!”
천멸도주는 해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나 슬프게 우는 것보다도 더 진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십팔밀막검 중 여섯 명이 죽었어.”
“그 사람들…… 십이밀막검과 같이 있잖아.”
“그래. 같이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같이 있는 게 느껴져. 그들이 남은 사람을 보호해 주고 위험을 알려주기 때문에, 남은 사람은 더욱더 강해지는 거야.”
“그런데 왜……?”
“뜻이 또 하나 있었어. 죽은 살수들의 빈자리는 천멸도에 가기만 하면 채워졌어. 새로운 살수는 망자가 이끌어준 거야. 망자는 새로운 살수를 자신의 자리에 채워 넣은 후에야 홀가분하게 훌훌 떠나갈 수 있었던 거지.”
그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이 죽었잖아. 천멸도에 돌아가도 자리를 채울 수 없어. 더군다나 천멸도까지 잃고 망도로 쫓겨 간 신세에서 뭘 하겠어.”
“도주, 약해졌구나.”
“아니. 더 강해졌어. 우리 모두 중원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해서 몇 명이 남았나 헤아리기 좋게 생존자 수만 부르기로 했어. 마지막 한 명은 누가 될지 모르겠는데…… 꼭 네가 불러줘. 일밀막검? 일인수? 아니면 일전혼?”
“도주.”
“도주는 아냐. 내가 마지막 일인이 되면 너무 치사하잖아. 수하들을 모두 죽이고 대장만 살아남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리고…… 나도 알거든. 네가 비위가 강해서 날 받아들였지, 팔 한 짝도 드러내지 못하는 이런 몸으로 언제까지 네 품에 안길 수는 없잖아.”
“너 지금!”
“간다. 실컷 칼부림이나 해봐야겠다.”
천멸도주는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는 휑하니 사라져 갔다.
마야는 한참 동안 천멸도주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가 신법을 전개하며 흘린 그림자는 아직도 허공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십이밀막검.”
“넷!”
마야의 전면에서 대답 소리만 들려왔다.
“너희도 가라.”
“저흰 도주님의 명령만 받듭니다.”
항명? 천멸도주가 단단히 윽박질러 놓은 모양이다.
마야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군. 손님이 있다는걸.”
“넷?”
“걱정 마. 손님도 너희를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단지 존재한다는 느낌 정도만 있는 것 같아.”
“…….”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십이밀막검은 벌써 싸울 태세를 완전히 갖췄다.
“여기 오는 게 야광과 추혼단뿐이라면 너무 싱겁지 않나. 천하제일지자라는 만사무불통지는 뭘 하고 있기에 남도문 정예들이 빠져나가는 것도 수수방관한단 말인가. 아니지. 만사무불통지는 야광의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어. 내가 준비한 계획까지도. 다시 말하면…… 만사무불통지에게 이번 싸움은 날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
역시 조용했다.
누가 되었든 한 걸음도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뜻이다.
“답답한 사람들하고는. 이것 봐. 너희가 사라져 줘야 날 잡을 자들이 나타날 거 아냐. 설마 내가 순순히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희가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내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데 황금으로 만 냥 걸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맞는 말이다.
권각(拳脚)이나 병기만을 사용하는 싸움이라면 마야 정도 되는 사람은 촌각 만에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미지의 정신적 능력을 동원하면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남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천멸도 살수들이지만 마야 눈에는 환히 드러나 있다. 그들은 무척 빠르게 이동하지만 마야가 소리를 내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다.
마야 곁에 이르기 전에 전신 공력은 모두 흩어지고 없으리라.
간신히 곁에 이른다고 해도 오랫동안 지병을 앓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흐느적거린다면 곤란해진다.
또한 마야에게는 왕벌이 있다.
육, 칠 할에 이르는 벌들이 황색 연기를 쐬고 죽었지만 아직도 전각 하나쯤은 새카맣게 에워쌀 만큼 많은 수가 남아 있다.
진정코 마야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가. 가서 도주나 엉뚱한 행동 못하게 옆에서 도와줘. 너희 열두 명이야말로 현재로서는 천멸도 총 전력의 절반이 넘잖아.”
“그럼!”
간단한 대답이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스스스스……!
뱀이 기어간다. 거미가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다.
귀로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방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은 오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상당한 수준이군. 능히 천멸도 살수들에 버금가.’
천멸도 살수들은 완벽한 은신술과 무음, 무형의 절대 암습법을 지니고 있기에 살수계의 으뜸으로 불린다.
살법(殺法)뿐만이 아니라 정공법(正攻法)에서도 최강으로 불리기는 쉽지 않은데, 천멸도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 손에 걸머쥔 최강 살수 집단이다.
단연코 천멸도 살수들에 버금가는 자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응?’
마야는 갑자기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만난 듯 인상을 찡그렸다.
기어오는 자들의 비기를 알아내지 못하겠다. 굉장히 뛰어난 움직임인데,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넓고 넓은 게 세상이다. 많고 많은 게 절학이다.
머릿속에 수천, 수만 개의 절학이 들어 있어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절학을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마야가 모르는 절학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무학일지라도 겉치레에 불과한 행동은 모두 배제하고 근원적인 요소만 분석하면 원류(原流)가 보인다.
일견후즉파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찰나간에 원류를 파악해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류만 파악하면 화공이 그림을 그리듯 파해법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니까.
마야는 다가오는 자들의 움직임을 온 감각으로 느꼈다.
두 번, 세 번 느껴봐도 역시 뛰어난 자들이다.
이들은 천멸도 살수들이 빠진 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스며들었다.
굳이 천멸도 살수와 비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느끼기는 하지만 탐지하지 못하는, 그래서 부딪치게 되면 어느 쪽이 꺼꾸러질지 알지 못하는 비등한 무위(武威)다.
‘팔방(八方)을 감싸고 외(外) 십방(十方)을 둘러친다. 열여덟 명. 십방 밖에 한 명은 중추(中樞). 진에 가담하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지휘만 한다. 연결 매개는 소리.’
마야는 주위를 감싸는 기운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냈다.
근원은 포위진의 일종으로 팔괘진(八卦陣)과 십방진(十方陣)을 혼합한 내위포살진(內圍捕殺陣)이다.
이들은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하나 진을 지휘하는 자가 십방이나 팔괘에 있지 않고 진 밖에 있으니 내위포살진으로 상대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한다.
‘외추포살진(外樞捕殺陣)은 제이무신가의 백절(百絶) 중 하나.’
역시 제이무신가에서 왔는가.
옛날, 만사무불통지는 동서고금의 진법을 모두 모아 연구한 적이 있다. 근원이 같은 것은 하나로 묶고, 다른 것은 분류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더할 부분은 더하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백절진(百絶陣)이란 것으로 세상의 모든 진법은 결국 백 가지 원형(元型)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백절진만 알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진법을 창안할 수도, 파해할 수도 있다는 광오한 외침이었다.
만사무불통지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 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진법을 펼친다는 것은 차라리 막무가내로 달려드느니만 못했다. 철저하게 파해(破解)되었으니까.
하나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백절진이란 존재에 대해서 회의심을 품고 있다.
만사무불통지는 백절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당연히 진법을 모르는 자가 백절진을 습득한 후에 세상의 모든 진법을 파해한다는 꿈같은 현실은 시험해 볼 수 없었다.
만사무불통지가 백절진을 공개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각 절진에 맞는 자를 엄선하여 제이무신가에 백 개의 절진을 설치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제이무신가를 지키는 방어막 역할을 하지만 유사시에는 공격조의 임무도 띈다.
백 개의 절진이 제이무신가의 근원이니 철저히 함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사실이다. 백 개의 절진을 형성하는 데 총인원이 몇 명이나 소요되는지, 위력은 어떤지, 지휘체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상세한 부분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중에 하나가 마야 앞에 펼쳐진 것이다.
사사사삭……!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외추포살진이 완벽하게 펼쳐졌다.
만사무불통지가 장담한 대로라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구멍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마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까지 띠었다.
오귀궁의 논귀(論鬼) 역시 만사무불통지와 같은 작업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논귀는 핵심 근원이 되는 진법을 아홉 개로 줄였으며, 이 아홉 개의 진법은 단순하기 그지없어서 개개의 진법으로는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홉 가지 진법만 알면 세상의 모든 진법을 파해할 수 있다?
진실 여부는 이 세상에서 오직 마야만이 안다. 논귀의 유일한 진전이 마야에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외추포살진의 허점은 고정(固定)에서 찾아야 한다.
외추포살진은 움직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팔괘진이나 십방진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데 반해, 외추포살진은 처음 펼친 진형에서 진퇴(進退)만 허용된다.
팔괘와 십방을 알지 못한다면 단순히 포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외추포살진은 팔괘와 십방의 원리를 최대한 실용화시킨 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만사 홀로는 살 수 없는 것. 해서 팔괘 위에 십방을 얹었는데…… 이는 등이 십방에 닿는 결과도 낳고, 십방은 팔괘 때문에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고…….’
만사무불통지가 그 정도도 모르랴.
팔괘진과 십방진은 운용상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아귀가 잘 맞춰진 톱니처럼 상호 보완 및 상승 작용을 이끌어낸다.
한데 마야는 그 속에서 허점을 찾았다.
자유자재(自由自在)가 만물의 속성이거늘, 억지로 틀에 끼워 맞춰놓았으니 억압이 없을까. 팔괘 위에 십방을 얹어놓을 것이 아니라 팔괘를 변형시키는 쪽이 좀 더 오묘하지 않았을까.
마인들 중 아무나 한 명만 옆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외추포살진을 깰 자신이 있다.
‘흠! 외추포살진이 확실하군. 그럼 제이무신가에서 왔다는 것도 맞고. 떡밥을 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제대로 물었어.’
마야는 좌우를 쓸어보았다.
“한마디 하지. 외추포살진 따위로는 내 솜털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아! 천멸도의 은신술과 쌍벽을 이루는 은신술이라면 자막(刺幕)이 있는데, 제이무신가가 치사하게 자막의 비기까지 훔쳤나? 숨바꼭질 그만 하고 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은신술이란 묘한 것이다. 상대는 나를 볼 수 없고, 나는 상대를 보고…… 오직 나만 상대를 볼 수 있다는 느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절대자의 유혹을 만들어낸다.
이런 유혹은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믿지 않겠지만 난 언제든 너흴 일으켜 세울 수 있어.”
진을 형성한 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한 명, 진 밖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자만이 북에서 북북동으로 조금 이동했다.
‘축을 북에서 북북동으로 잡았군.’
진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전에는 고요함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금방이라도 목을 쳐낼 듯한 살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하하!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군. 하긴 그러니 아직도 이러고 있겠지. 하하!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잖아.”
왜애애앵! 왜애애앵……!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일이 벌어졌다.
땅 속에서, 하늘에서, 바위 속에서……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곳에서 왕벌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외추포살진을 역으로 포위해 버렸다.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음공(音功)은 기혈을 격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