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3
2. 붉은 이정표
좀 더 빠르고 좀 더 선명하고 그리고 액정 화면은 더 컸다. 훨씬 좋은 것이다. 재희는 책상 위에 둔 핸드폰을 들었다가 놓았다. 손마디에 닿는 감촉은 조금 더 각이 선 느낌이다. 새 것, 좋은 것, 그리고 낯선 것이었다.
“어, 한 팀장님, 핸드폰 바꿨네요. 오우, 최신형인데요.”
태진이 얄팍한 핸드폰을 들고 앞뒤로 살폈다.
“핸드폰 잃어버려서요.”
“그래서 번호도 바꾸신 거예요? 요즘 신규 가입에 보조금이 있던가?”
“네, 있던데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에이, 돈도 잘 버시면서. 그거죠? 결혼 전에 핸드폰 번호 바꾸기. 그러면서 쓸데없는 남자도 같이 정리.”
손바닥으로 뭔가를 쓱 날리는 시늉을 하는 태진에게 재희가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나경이 ‘다 태진 씨처럼 불량하게 사는 줄 아냐.’고 쏘아 줬기 때문이다.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해 가면서 반박과 구박을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 재희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회의실을 나왔다.
제 방에 들어가서 책상 정리를 마쳤을 때 데스크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서준우였다. SJ파이낸스에서 에너지 관련 신소재 개발 비즈니스 플랜에 대한 투자 프로젝트는 ENP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다. 재희는 지금까지 진행된 ENP 상황과 앞으로 보충할 부분에 대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다음 주 월요일, 일부 투자자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까 싶은데. 괜찮겠어?”
준우가 한 손으로 턱을 가볍게 괸 채로 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닷새,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재희는 남은 시간과 남은 분량의 일을 빠르게 계산했다. 준우 역시 일정표를 화면에 띄운 채로 시간을 조절해 보는 듯했다.
“네, 해 볼게요.”
“평상시랑 비슷해. 대상자들도 거의 다 한 팀장 아는 사람들일 테고. 그러니 알아서 해요. 필요하면 최 팀장 쪽에 지원 요청할게. 시간 빡빡하면 백업(back up) 슬라이드는 많이 안 만들어도 상관없어. 그냥 말로 설명하든지 다음번에 보충해서 하면 되니까.”
재희는 슬며시 웃었다.
“왜 웃어?”
“봐주시는 거 같아서요.”
준우가 괴었던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웃었다.
“어, 봐주는 거야. 바쁠 텐데 너무 부담 주는 거 같아서.”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희는 씁쓸한 웃음을 삼키고 답했다. 꼬박 인사하며 돌아서는 마음이 바빴다. 숨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파혼한다는 거, 엉망진창으로 마음이 망가졌다는 거, 억지로 괜찮은 척한다는 거, 그래서 누구든 조금만 마음 써 줘도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거,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거…….
“재희야.”
문을 열다 말고 멈춰 섰다. 재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돌아섰다. 준우가 똑바로 앉아 살피듯 바라보고 있었다. 생긋 웃으며 답해야 했다. 저렇게 쳐다볼 때는. 하지만 재희에게 최선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는 것이 전부였다.
“……네.”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무거워지는 눈동자를 아래로 향했다. 그가 말하는 필요한 일이란 것이, 결혼 준비에 필요한 것인지 ENP 발표 준비에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필요……해요. 지금. 아무나 붙들고 내가 얼마나 한심한 꼴인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끝없이 하소연하고 싶어.
재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게요, 사장님.”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도와줄게.”
몹시 다정하게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만, 재희는 조금 웃었다.
“있잖아요. 어릴 때, 나이 차이 나는 큰오빠가 있었으면 했어요. 무턱대고 든든한 기분이 들 거 같아서. 가끔……, 그렇게 말해 주실 때는 착각해요. 사장님이 큰오빠 같다고.”
“듣기 좋은데. 나도 여동생 있다면 재희같이 똘똘하고 예쁘면 좋겠다.”
준우가 미소 지었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정말, 어미 잃은 강아지인가 보다. 의미 없는 말이 가슴 밑바닥까지 곧장 내려왔다.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거리기 전에 돌아서야 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 거의 밤을 새우겠는데요. 오늘 푹 자 둬야겠어요.”
재희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그의 방을 나섰다. 연숙과의 약속 시간에 대려면 서둘러도 늦었다. 파혼 사실을 말하고 어쩌면 그녀에게 좀 하소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걸음을 재촉하면서 어젯밤을 떠올렸다. 잠결에 벨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드문드문 들렸다. 현석이었다.
오늘도 찾아올까? 내일도?
오늘은 연숙의 집에서 어렵게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집에도 새벽에나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못 들어가는 날도 있을 테지…….
*
ENP의 새로운 비즈니스 플랜 전망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에너지 비용 절감은 최근, 그리고 향후 몇 년간 기업들의 최대 화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국제 특허 출원에 성공한 대체 소재의 사업 타당성 검토가 1차 투자 계획 설명의 주요 부분이었다.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월요일까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모두 마치기엔 상당히 벅찼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닷새 동안 재희는 SJ파이낸스와 ENP를 오가며 투자 설명회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대로 잘 해낸 모양이었다. 일요일 저녁, 서준우 사장과 최종 리뷰가 있었고, 지적받은 부분을 수정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좋은데요. 오타 몇 개만 체크했어요. 본문 슬라이드는 이걸로 손 텁시다.”
준우가 프린트한 수정 슬라이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말했다. 재희는 사장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다가 어찔한 기운에 머리를 짚었다. 10시를 좀 넘어서는 시각이다. 백업이 부실한 것 같아 여유만 있으면 보충할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일로 곤두선 신경과 지쳐 버린 몸은 휴식을 필요로 했지만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현석은 오늘도 사무실로 전화를 했었다. 만나자고 하는 걸 일이 많다고 거절했지만 집 앞에서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욱신거리는 두통이 몰려와 재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본문은 두고, 백업 쪽을 더 보충할게요.”
“괜찮아요. 이제 들어가서 쉬어.”
“아니요. 핸드아웃용 슬라이드 프린트되는 것도 기다릴 겸 NPV(1)쪽 몇 장 더 만들게요.”
준우가 가타부타 대답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내선 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간략하게 지시하는 동안,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태진 씨? 서준우예요. 내일 설명회 핸드아웃 말이죠. 내가 최종 컨펌(confirm, 확인)해서 이메일로 넣을게요. 오늘은 그 팀 전부 정리하고 들어가요. 여기 한 팀장도 들어갈 테니까. 태진 씨가 내일 좀 일찍 나와서 프린트 마무리하고 설명회 장소로 보내 줘요. 괜찮겠죠? 네, 부탁합니다.”
준우가 수화기를 내리면서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재희를 올려다봤다.
“됐죠? 들어가요.”
“오타 부분만 고치고 들어갈게요. 내일 일찍 나오겠습니다.”
재희는 준우의 책상에 놓인 PT용 슬라이드 최종본에 손을 뻗었다.
“한재희.”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준우의 손에 눌린 프린트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희는 프린트된 종이 모서리를 쥔 채로 준우와 눈이 마주쳤다. 서준우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가 화가 났다. 화난 눈을 바라보는 눈이 아프고 속이 울렁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저……, 그래도 오타는 바로잡아…….”
“그건 내가 해. 프린트는 태진 씨가 맡았고. 문제 있나?”
재희는 슬라이드를 움켜쥔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준우가 손을 감싸듯 쥐어 떼어 냈다.
“말 들어. 들어가서 쉬라고.”
재희가 고집을 꺾은 뒤에도 준우는 감싸 쥔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첫날, 악수했을 때처럼, 아니, 훨씬 더 그랬다. 크고 묵직하고 따뜻한 손이 주는 안온함에 완벽하게 보호받는 기분이다. 바보스럽게 눈물이 맺힌다. 충분하다. 재희는 손을 가만히 빼내려 하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느껴지는 건 조금 더 강한 힘이었다.
왜……? 깊고 차가운 눈에서도 무표정한 얼굴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대로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재희는 그의 눈만 바라보았다.
“재희야, 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데스크 위, 전화벨이 울렸다. 훅, 재희는 숨을 내쉬었다.
“네, 서준웁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준우가 재희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받아요. 한 팀장 찾는 전화예요.”
“네, 한재희입…….”
― 사무실 앞이야.
말을 끊어 버리는 성마른 목소리는 현석이었다.
“오늘은 좀 곤란해. 말했잖아.”
― 오늘은? 그래, 오늘은 꼭 봐야겠어. 너 만나려고 며칠째 이런 바보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야 되겠어?
“알았어. 지금 나갈게.”
재희는 억지로 표정을 지우고 수화기를 준우에게 건넸다.
“내가 한 팀장 약혼자한테 면목이 없어. 몸살이라도 날 거 같은 얼굴이야. 회사 다니는 것도 얼마 안 남은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니.”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자니 준우가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가 봐요.”
“사장님.”
재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떼어 냈다.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저, 결혼 안 해요. 이 사람, 그래도 한 번 더 봐야 마무리될 거 같아서 보는 거예요. 회사는 계속 다니고 싶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준우를 무시하고 재희는 사장실을 빠르게 나왔다.
작업하던 방으로 가니 막 퇴근하려던 태진이 전화를 사장실로 돌려 주었다며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인사를 남겼다. 조금 느리다 싶게 자리를 정리하고 재희도 사무실을 나섰다. 오른손에는 아직 준우의 체온이 남은 것 같다.
‘재희야, 너…….’
전화벨이 울리기 전, 그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는데 묻지도 못하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뭔가 잘못한 걸까? 못마땅한 얼굴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꾸 밟힌다.
사무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 비추는 복도는 컴컴했다. 멍하니 걸어가다가 반대편 끝 쪽 엘리베이터에 도착하기 전에 팔목이 잡혔다. 현석이 화장실로 꺾어지는 통로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놀라서 헉하고 소리를 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끌려가 열린 문으로 거칠게 밀어 넣어졌다. 바짝 다가서는 현석을 뿌리치고 재희는 벽 쪽으로 시선을 둔 채로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지하 6층에 도착하자마자 재희는 다시 손목이 잡혔다.
“놔, 현석 씨.”
팔이 빠지도록 버텨 봤지만 현석은 끄떡도 없었다. 일요일 10시가 넘은 시각, 지하 주차장은 텅텅 비다시피 했다. 소릴 지를 때마다 말소리가 크게 메아리쳤고, 실랑이를 하느라 불안정한 구둣발 소리들이 어지럽게 울려 댔다.
“이거 놓으라고!”
현석이 신경질적으로 팔목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구석 자리에 주차된 차 속으로 재희는 짐짝처럼 던져졌다. 숨을 몰아쉬며 붙잡혔던 팔목을 만졌다. 실크 블라우스 아래로 감각을 느낄 수 없도록 얼얼했다.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감정이 끓기 시작했다.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차에 탄 이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입을 다물고만 있던 재희가 처음 한 말이었다. 현석은 오기라도 부리듯 시동을 걸면서 이를 악물었다. 기어를 바꾸자 재희가 도어록을 풀었다. 문을 열기 직전 붙잡으니 재희가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명백한 사유로 끝났는데 이렇게 성가시게 사람 붙잡는 이유가 뭐야.”
현석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한재희는 첫눈에 반한 여자,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지적인 분위기, 차분하고 여성스런 성품을 가진 그녀는 마치 도자기로 만든 섬세한 인형 같았다. 이율배반적이라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쉽게 손을 대기도 무섭도록 재희는 다른 여자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현석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재희는 단 한 번도 현석을 그가 재희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재희는 완벽한 이상형이고 절대적인 이성이었지만 재희에게 그는 우정과 사랑, 연민과 배려의 복합적인 대상이었을 뿐이다. 재희를 알고 지낸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결코 그 이상을 넘어서질 못했다.
절대적인 대상 앞에서 그저 그런 상대로 머무는 일만큼 비참한 건 없었다. 못난 자격지심으로 비딱하게 나갈 때마다 조용히 받아 주던 재희는 더 절대적인 대상이 되었고, 현석은 더 한심한 남자로 처박혔다.
“할 말 없으면 나 가 볼게.”
시선도 맞추지 않는 재희를, 이렇게 무섭고 독하게 구는 재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현석은 알 수 없었다. 재희는 겉보기처럼 여릿여릿하고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지겨우리만큼 감정이든 일이든 자기 관리에 철저한, 대단히 강하고 지독한 면이 있는 여자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차 없을 줄은 몰랐다. 누구도 아닌 한재희가 제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조차 못 했다. 목소리가 비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임신했다는 말, 거짓이야.”
“이미 상관없다고 했어.”
지난 열흘 남짓한 시간은 현석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러 간 현석에게 은진은 깔깔 웃어 댔다. 그런 거 거짓이라고,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충분치 않다고 빈정거렸다. 아버지에게 쉬쉬하면서 무마해 보려던 현석 모친의 노력도 부질없었다. 은진의 수작이었을 것이다. 현석의 아버지와 고등학교 동문이라 가까이 지내는 부장검사가 파혼 이야기와 그 석연치 않은 연유를 넌지시 떠보는 물음을 현석 아버지에게 흘렸다. 당연하게도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의 불같은 분노와 추궁을 견디기에 현석은 너무 나약했다.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자와 난잡한 생활이라니 검사 생활에 치명적인 꼬리표가 될 것이었다. 재희를 잃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막막하고 충분히 두려웠지만 상황은 최악보다 더 최악이었다. 현석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탈출구는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반드시 재희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한재희, 내 말 좀 들어 봐. 다 거짓이야. 그 여자가 제 입으로 그랬어. 심술부린 거래. 이러지 말자. 우리가 왜 그런 애 때문에 이래야 하는 건데!”
재희가 고개를 창 쪽으로 향한 채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저번처럼 넘어가 줘야 해? 단 한 번이라 못 박았었고 단 한 번은 이미 지났어.”
“재희야, 그러지 마. 다시는 안 그래. 정말이야.”
“넌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보였니?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결혼 날짜 잡고도 그랬으니 결혼하고도? 애 낳고도 그럴 거였어? 그럼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바보처럼 참아 줘야 하는 건데!”
“끝낸 사이라고 했어!”
“예전에 끝내야 할 사이는 우리였어. 내 미련한 집착과 한심한 기대가……,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끌어 왔어. 내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이!”
재희는 아직 눈 한번 맞추지도 않았다. 붉어진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현석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우리 관계가 지긋지긋했다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럼! 사랑이었니? 사랑? 하, 구역질이 올라와. 더러워. 더러워.”
“뭐, 더럽다고?”
현석 역시 애써 누르던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래, 더러워. 그 입으로 그 여자랑도 침대 위를 뒹굴면서 사랑을 올렸겠지. 그 여자가 그러더라. 그렇게 정열적일 수가 없다고. 얼마나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니. 하핫, 그럼 나랑은 그래서 사랑이 아니었나 보지. 더러운 것들!”
재희가 차 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눈을 맞춘 채 퍼부었다. 재희의 몸과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렸다. 현석은 순간 눈앞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눈에 핏물이라도 터지는 듯이 화끈거리고 온몸이 화염에 싸인 것만 같았다. 재희가 차 문손잡이를 잡는 것이 붉어진 눈에 들어왔다.
“현석 씨, 그만하자. 우리 더 이상 추해지지 말자.”
재희는 숨을 고르며 억지로 말했다. 문을 열기 전, 현석이 재희의 팔을 움켜쥐었다. 마주친 현석의 눈이 핏발로 온통 붉었다. 팔을 비틀며 소리를 지르려는데 다른 팔도 잡혔다.
“놔!”
순식간에 어깨가 눌려지고 좌석 등받이가 젖혀졌다. 눈앞이 아뜩해졌다. 재희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오른팔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으나 다시 잡혔다. 부자연스런 각도로 팔목이 꺾였다. 아악, 비명이 새어 나왔지만 무시무시한 힘에 비명까지 짓눌려졌다.
“사랑? 그래, 그런 사랑을 너랑도 지금 해 보자고! 그럼 될 거 아냐!”
“그만둬!”
“사랑을 해 보자니까!”
젖혀진 목덜미 아래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후드득 블라우스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 차가운 손, 소리 지르는 입술을 막아 버리는 입술. 숨이 막히도록 움직이는 물컹한 덩어리를 피해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자 아랫입술이 터져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릿한 냄새……. 재희는 몸부림을 쳤다. 어깨가, 가슴이 그에게 눌리고 잡혀져 있었다. 지독한 고통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현석 씨! 이러지 마!”
날카롭게 찢어진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제발……. 나한테, 이렇게 하지……, 마”
울음 섞인 목소리가 먹혔다가 나왔다. 목덜미에 불이 붙는 듯한 아픔이 갑자기 사라졌다. 가슴과 어깨에 느껴지던 압력도. 현석이 넋이 빠진 얼굴로 재희를 일으켰다.
“재……희야.”
떨리는 손으로 벌어진 옷가지를 만져 주는 것을 힘을 다해 뿌리쳤다. 차 문을 열고 정신없이 뛰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차가 주차된 지하 5층으로 가면서도 재희는 뜯어진 앞섶을 움켜쥐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귓속이 윙윙 울리고 좁혀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보랏빛이었다. 겨우겨우 숨을 쉬며 몇 번을 넘어질 듯 위험하게 다리를 움직여 주차된 차 앞에 섰다. 차 키를 찾아 가방에 손을 넣었다. 아무리 휘저어도 감각이 없는 손에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따라오면 안 돼.
재희는 가방 바닥을 긁듯이 헤집었다.
“재희?”
가방을 놓치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좌르륵 바닥으로 흩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립스틱이 멈춘 곳은 남자의 구두 앞이었다. 재희는 그저 얼어붙은 듯 서서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과 차 키, 입구가 벌어진 파우치와 비죽 나온 콤팩트, 그리고 립스틱이 굴러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구두를 따라 올라간 시선 끝에 잡힌 남자의 얼굴, 그 얼굴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진 것도.
준우는 몸을 굽혀 립스틱과 핸드폰, 차 키를 주웠다. 그리고 바닥에 뒤집힌 핸드백을 주워 올려 재희의 발아래 떨어진 파우치까지 챙겨 넣었다. 주름이 잡힌 스커트 아래로 올이 고운 스타킹을 신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준우는 작게 안도의 숨을 쉬며 몸을 세웠다. 재킷을 벗어 잔뜩 움츠린 어깨에 걸쳐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 눈물이 엉겨 붙은 뺨, 터진 입술은 꾹 다물렸지만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리 와.”
팔을 벌리자 재희는 한 발 겨우 떼면서 쓰러지듯 기대어 왔다.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등 가운데쯤을 한 번 두 번 두드렸다.
“가자.”
한 팔로 안듯이 감싸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 좀 마셔 봐.”
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준우는 사정하다시피 해서 사 온 핫차이를 컵홀더에 내렸다. 이마를 짚고 차창에 팔꿈치를 괴었다. 갑자기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재희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먹이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였다. 11시가 넘은 시각이라 가까운 두 곳은 문을 닫은 뒤였고 마감을 하는 한 곳을 찾아 억지를 부려서 뜨거운 차 한 잔을 사 왔다. 이제 시각은 자정에 가까워졌다.
“재희야.”
아래로 처진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입도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한 손으로 어깨에 걸친 준우의 재킷 앞섶을 모아 쥐고선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차에 올라탄 이후 조금도 변함없는 자세였다. 독하게 울음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재희야.”
손을 뻗어 아직 헝클어져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재희가 움찔거렸다. 떨리는 어깨를 잡자 퉁기듯이 몸을 빼낸다. 준우는 팔을 둘러 다시 어깨를 잡았다. 재희가 바짝 다가간 가슴을 두드리듯 밀어내길 반복했지만 턱없이 약한 힘이었다.
“놔주세요.”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였다.
“나 쳐다보고 말해.”
“…….”
입을 가리는 손을 떼어 냈다. 턱을 잡고 억지로 얼굴을 들게 하자 고개를 반대편으로 비틀어 버린다. 조금 더 힘을 더해 방향을 틀자 재희는 고개를 젓다가 포기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터진 입술, 얼룩진 뺨이 안쓰러워 미칠 것 같다.
“나 좀 봐.”
잡고 있는 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은 눈으로 눈물이 솟아올랐다. 기대게 하자 재희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고 가슴에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재희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줄곧 이대로 차를 몰아 현석을 들이받아도 좋을 만큼 치솟는 화를 억지로 참아 내는 중이었다.
“나……, 어떡해요.”
“……괜찮아.”
“이제, 사장님을 어떻게 봐요.”
어깨를 잡아 얼굴을 들게 하였다.
“어떻게 보긴. 지금처럼 그냥 봐.”
“창피해……, 죽겠어. 이대로 꺼져 버리고 싶어요.”
재희가 얼굴을 숨기듯 이마를 준우 어깨에 붙였다.
“네가 왜. 꺼져 버릴 놈은 그 자식이지. 그 자식 내가 어떻게 해 줘?”
재희가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죽여 버릴까.”
재희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찾아가서 그 개자식, 죽여 버려?”
준우는 시동을 걸었다. 재희가 그러라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뼈 몇 군데쯤은 부러질 만큼 패 줄 생각이었다.
“사장님.”
재희가 기어를 바꾸는 손을 황급히 붙잡는다. 가만히 쳐다보자니 울듯이 억지로 웃었다.
“……고맙습니다.”
“뭐가.”
“……그냥.”
재희의 뺨에 다시 눈물이 굴러 내린다. 재희가 손등으로 턱에 맺힌 눈물을 쓱쓱 문질렀다.
“괜찮아요, 이제.”
“응.”
“죄송하지만,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그래.”
준우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
지이잉, 재희는 어렴풋이 들리는 소음에 눈을 반쯤만 떴다.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누우니 코발트색 시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햇빛이 어른어른 비치는 푸른 바다 속에 잠긴 것 같다. 깊고 짙은 바다 냄새…….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협탁 위 디지털시계는 7시 39분을 가리키고 있다.
심연처럼 아득하고 고요한 잠을 잤다. 어이없게도……. 시트를 정리한 후 머리를 매만지면서 문을 빠끔 열었다. 커피 향이다. 조심스레 걸어 나가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준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잘 잤어? 커피?”
고개를 끄덕이자 준우가 미소 지으며 머그잔을 건넸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물우물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굉장히 교과서 같은 인사야.”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재희는 흰 와이셔츠 위로 주황빛 타이 매듭을 바로잡는 손만 보았다. 오른손 셋째 마디에 발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집 앞 주차장에서 재희를 기다리고 있던 현석과 실랑이가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만큼 경황이 없었다.
‘싫어!’
내미는 손을 뿌리치자 현석이 다시 붙잡았다. 공포감에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빼어 냈고, 거의 동시에 현석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개새끼.’
준우가 주먹을 움켜쥔 채 무섭도록 낮은 소리를 질렀다.
‘한 번만 더 얼쩡거려 봐. 법조계에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욕설을 씹어 삼키는 준우도 나뒹굴고 있는 현석도 너무 낯설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가지 못하고 붙박인 듯 서 있는 재희에게 준우가 다가왔다.
‘가자.’
엉거주춤 일어서 재희를 부르는 현석을 막아서듯 버티고서 준우는 재희의 손을 잡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 다시 올랐다. 그의 집 근처까지 와서야 어딘지 깨닫고 입을 뗄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민망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하는데 준우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재희야, 내가 안 되겠어. 너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다. 한번 봐줘.’
그 말에 가슴이 쪼개질 듯이 뻐근했다.
“베이글 먹을래?”
“네, 제가 할게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희는 빠르게 움직였다. 토스트기에 툭 올라온 베이글을 집게로 집어 접시에 담다가 잠깐 한숨을 쉬었다. 반팔 셔츠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난 양 팔목 주변에는 보기 흉할 정도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재희는 셔츠 목깃을 추슬러 올렸다. 6피트, 185센티미터는 될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맞는 셔츠라 끝까지 단추를 채워도 목둘레가 허전했다. 핏물이 배어날 듯이 벌겋게 깨물린 자국이 조금만 잘못하면 드러날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 어색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마치 어제 일은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듯 준우는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재희가 커피만 홀짝거리는 동안 준우는 빵을 씹고 과일을 삼켰다. 준우가 고개를 들 때마다 재희는 목깃을 매만졌다. 그의 눈매가 가늘게 찌푸려지면 얼룩덜룩 팔에 남은 피멍을 보는 것 같아 급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준우가 제 앞의 접시를 비우고 일어서며 말하였다.
“데려다 줄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택시 타고 갈게요.”
재희는 서둘러 따라 일어섰다. 준우가 양복 재킷을 집으러 소파 쪽으로 가려다 말고 멈춰 섰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이 목덜미와 팔목에 차례로 꽂히는 것만 같았다.
“챙겨서 나와.”
양복 재킷을 입으며 준우는 한마디만 하였다.
*
“여기.”
재희가 작게 속삭이며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밀어 준다.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는 엑셀 시트다. 준우는 숫자를 흘끗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사전적으로 투자 의향을 알린, 주로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ENP 쪽 이사진이 참석한 설명회는 두 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40분 정도 소요된 프레젠테이션을 끝낸 후, 자리에 앉아 질문에 답을 하는 중이었다.
투자 설비의 구체적인 사항과 금액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옆자리에서 프린트된 백업 자료들을 조용조용 정리하는 재희를 살폈다. 그녀는 남색 스커트 정장 차림이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고 목을 가리는 옅은 색 이너웨어를 받쳐 입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올 예상 질문에 대한 자료를 챙기는 손놀림도.
재희가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앞으로 내어 놓았다. 회사 수익과 비용 예측에 관한 근거 수치들이었다. 역시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이라이트된 숫자 몇 개가 보였다. 준우가 확인할 만큼의 시간, 정확하게 하나 둘 셋을 셀 시간이 지나자 재희는 다음 장을 넘겨 투자 NPV 도출 근거가 정리된 시트들을 펼쳤다. 타이틀만 보이도록 가지런히 정리하는 손끝만 바라보자니 재희가 눈을 맞춰 본다. 다른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이었다.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NPV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투자자와 투자를 받는 자 사이의 이해 차이는 극명한 법이다. 집요한 질문들에 설명이 길어지자 재희가 슬라이드 한 장을 스크린에 띄웠다. 어젯밤까지 없던 슬라이드다. 기어이 백업 슬라이드를 더 만들었다. 저 고집스런 직원이. 대체 언제. 눈이 마주치자 재희는 미안하다는 듯 웃다가 시선을 떨어뜨린다.
“화면을 보시면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꼭 필요한 슬라이드이다. 엑셀 시트의 일부를 잘라 내어 확대한 도표 아래로 시각적으로 효과적인 동시에 설득력 있는 그래프가 뻗어 나가 있다.
어느 정도는 기계적으로 답하고 있었다. 사실, 준우는 수치에 있어서는 한번 입력된 것은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외곤 했다. 그래서 무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재희가 언제부터 자신의 마음을 읽어 정확하게 확인할 만큼의 시간 동안 자료를 차례로 보이는지. 가끔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늘……. 그녀의 존재 자체가 긴장감을 덜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왼쪽 귓바퀴로 재희가 작게 숨 쉬는 소리가 들어온다. 사각, 종이를 바꿀 때마다 은은한 향이 묻어난다. 향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비누 향인지도. 아는 사실은 그 향이 꽤 익숙하다는 것이다. 조용히 안정적인 박자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도……. 그런데도 지금은 가슴뼈 사이에 나무 막대라도 끼워 놓은 듯 뻑뻑하고 불편하다.
재희가 눈을 조금 올려 뜨고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를 보지 않아도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있다. 왜 그러는지도.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설명을 이어 가는 품새를 보고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이 여자의 표정과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지 준우는 문득 당황스러웠다.
세 시간이 못 되어 설명회는 끝났다.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사이 재희가 랩톱을 정리하고 회의실을 먼저 나갔다.
“서 사장, 이번 투자 건은 감이 좋아.”
친분이 있다고 해도 대단히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허허 웃는 인사말에 예의 바르게 응대하면서도 맘이 바빴다. 저녁 식사 자리에 대해 슬쩍 운을 떼는 것도 매끄럽게 거절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여자가 자꾸만 신경을 당긴다.
설명회 30분 전에 도착한 재희를 챙겨 볼 틈도 없었다. 부어 있던 손목도, 하얀 팔 여기저기에 잡힌 피멍도, 그리고……. 준우는 이를 꽉 다물었다. 목덜미에 선명하던 자국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샅샅이 살피고 달래고 깨끗하게 지우고 싶었다. 마음에 남아 있을 흔적까지.
회의실을 나서자 좀 떨어진 곳에서 ENP 쪽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재희가 돌아봤다.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겨우 사람들에서 분리되어 곧장 다가갔다.
“가방 줘요.”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준우는 재희의 어깨 뒤로 손을 넣어 메고 있던 가방을 들고 먼저 걸어갔다.
“사장님, 정말 괜찮아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재희는 쭈뼛쭈뼛 손을 가방 쪽으로 내밀었다.
“병원 갔어?”
“파스 붙였더니 팔목 이제 안 아파요.”
재희가 오른손을 들어 좌우로 조금 흔들어 보였다.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이다. 오늘은 별로 속아 줄 생각이 없다. 그런 웃음에.
긴소매 재킷 아래로 드러난 팔목을 슬쩍 잡자 ‘아!’ 작은 비명을 내뱉으며 재희가 찡그렸다. 붙여 놓은 알량한 파스 한 장으로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헤어드라이어 하나도 못 들도록 퉁퉁 부었었는데.
어젯밤, 재희에게 샤워실이 딸린 침실을 내어 준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자니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천천히 차 한 잔을 다 마셨을 때, 뒤통수 쪽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사장님.”
머리에 흰 수건을 둘둘 두르고 재희가 소파 뒤에 서 있었다.
“응?”
“혹시, 헤어드라이어 쓰세요?”
재희가 스커트 위에 입고 있는 셔츠는 너무 커서 원피스 같았다. 반팔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내려왔고, 어벙하게 품이 큰 셔츠의 기장은 허벅다리 중간쯤까지 왔다. 꼭 자루를 거꾸로 씌워 놓은 아이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희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그냥……, 괜찮습니다.”
돌아서는 어깨가 물기에 젖었다. 수건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칼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톡 어깨로 굴렀다.
“있어요, 드라이어. 내가 머리도 안 말리고 다니겠어?”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로 사용하는 바깥쪽 샤워실로 가자 재희가 졸졸 따라왔다. 서랍을 열어 드라이어를 꺼내서 건네는데 ‘앗.’ 하는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드라이어가 타일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희가 잔뜩 찌푸린 채 오른쪽 팔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잡고 있는 왼손을 떼어 내자 심하게 부어오른 팔목이 드러났다. 양 팔목 주변으로 벌겋게 퍼렇게 자리 잡은 손자국도 눈에 들어온다.
제기랄.
욕설을 씹으며 얼음이라도 가지러 나가는데 허리를 굽혀 드라이어를 집어 올리는 재희가 보였다.
“그냥 둬.”
왼손으로 들고는 조금 웃으면서 답한다.
“괜찮아요.”
재희에게서 드라이어를 채고 대신 비닐봉지로 어설프게 만든 얼음주머니를 쥐여 줬다.
“이거라도 좀 대고 있을래?”
재희는 대답 없이 얼음주머니만 쳐다보았다. 꾹 다문 입술과 아래로 향한 속눈썹을 보다가 준우는 재희 머리에 있는 수건을 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퍼뜩 돌아보는 놀란 눈을 무시하고 ‘괜찮습니다.’ 하는 소리도 무시하고, 머리 위로 드라이어 바람을 날렸다. 손가락에 닿는 것은 차가운 머리칼과 뜨거운 바람이었다.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젖은 머리칼이 들어오고 건조한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손등을 간질이는 머리칼, 손끝으로 느껴지는 작은 뒤통수…….
재희가 몸을 앞으로 빼내면서 어정쩡하게 돌아보았다.
“이제 괜찮아요. 그냥 수건으로……, 잘 닦아 낼 건데 그랬어요. 왼손으로만……, 하려니까 잘 안되고……. 베갯잇도 다 젖을 것 같아서.”
흐트러진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재희의 입술은 붉었고, 볼은 핑크빛이었다. 어깨를 잡아 다시 바짝 앞으로 서게 했다.
“감기 걸려.”
준우는 잠시 내렸던 드라이어 바람을 머리로 보내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재희한테서 자신이 늘 사용하는 샤워 젤 향이 났다. 샤워를 방금 마친 여체는 막 구워 낸 빵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일 것이다. 이런, 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위이잉, 드라이어 소리가 공명처럼 귓가를 울렸다가 멀어졌다 했다.
“후우…….”
준우는 숨을 길게 내쉬며 목덜미에 붙어 있는 젖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재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오른편으로 조금 기울이자 세워 올린 셔츠 깃 아래로 새빨간 자국이 드러났다. 핏물이 터져 오른 상처는 손마디 두 개는 될 만한 크기였다. 드라이어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새끼를 죽을 만큼 패 줬어야 했다.
‘너 바보야? 지금까지 이런 새낄 믿고 결혼하겠다고 했던 거야?’
귓바퀴가 뻣뻣해지도록 치솟는 감정이 위험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조금 더 물기를 없애야겠지만 드라이어를 내려 버렸다. 꺼진 드라이어를 아무렇게나 던지듯 두고 준우는 양어깨를 잡아 재희를 돌려세웠다.
“팔, 아프시죠?”
올려다보는 갈색 눈동자에는 미안함과 불편함, 그리고 순수한 감사밖에는 없다. 불안한 진폭으로 오르내리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여전히 얼음주머니를 쥐고 있는 손과 움직이기 불편한 다른 손을 대신해서 준우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겼다.
“고맙습니다.”
재희가 눈을 맞추며 인사하였다.
“천만에.”
“그런데요 사장님……, 현석 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괜찮아요.”
“그래서?”
“……아니에요.”
그래서 다시 만나기라도 할 거냐는 물음을 가까스로 씹어 삼키는데 재희가 고개를 꼬박 숙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초등학생 같은 인사를 받자 피식 허탈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자라.”
“네.”
작아지는 뒷모습이 열린 침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탕탕 말뚝을 박는 소리였다.
한재희가 신뢰하는 큰오빠 같은 사장님.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와선 ‘드라이어 주세요.’ 해도 좋을 사장님.
뭐라 그랬더라……. 무조건 든든한 기분이 들어 좋을 거 같다고 그랬나.
‘사장님이, 가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큰오빠 같아요.’
상무님, 사장님.
처음 봤을 때부터 수년 동안 그렇게 불렀다. 그 소리가 못마땅한 건 처음이다. 한순간도 한재희에게 서준우가 남자였던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재희와 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골드만삭스에서 그녀가 가장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이 없진 않았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행정직으로 입사한 직원이나 구조조정 본부에서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대기업 고졸 사원까지 여자들이 그에게 보이는 패턴은 다양했지만, 규칙성이 명확하여 쉽게 답이 도출되는 형태였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인 남자의 관심을 끌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방식은 수위와 상관없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룰에 따를 뿐이다. 호기심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이나 비죽거리는 입술, 돌아서는 걸음걸이와 웃음소리나 몸을 흔들고 손을 움직이는 제스처까지 호감과 유혹의 스펙트럼에서 다양한 변주를 거듭하였다.
10대 중 후반, 처음 여자들의 미묘한 패턴을 접했을 때 준우는 흥분했었고 그녀들의 잔상만으로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준우에겐, 이미 오래전 파악이 끝난 시시하고 지루하며 성가신 반복일 뿐이었다. 재희는 그런 면에서 준우가 봐 왔던 여자들과 달랐다. 인형같이 예쁘고 여린 외모를 하고선 단 한 번도 예쁘게 굴지 않았다. 과하다 싶은 격무에도 묵묵히 일만 할 뿐 개인적인 관심은 일절 표하지 않았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눈길을 끌거나 존재감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한재희에게서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이 보이는 연상의 남자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나 호기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정직하고 동시에 다정한 눈빛으로 준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8년 세월을 하루같이 그녀가 발음하는 ‘상무님’ 혹은 ‘사장님’에는 변하지 않는 진정성과 성실함이 진득하게 배어났다. 처음에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준우가 제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은 더없이 편안하였다.
준우가 이혼을 한 후 SJ를 창립하여 절박하게 일에 매달리던 어느 날,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열감기를 앓았던 그날, 준우는 그녀가 정해 놓은 관계에 몰입되어 있는 자신을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사장님.”
가벼운 목감기일 뿐이라 거짓말을 하고 쉬어빠진 목소리 외에는 제법 근사하게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재희가 바짝 다가서더니 발꿈치를 들어 까치발을 하고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대체 얼마나 뜨거운지 아세요?”
“…….”
“PT 내내 조마조마했어요.”
“혹시 실수가 있었나요?”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럼?”
“사장님, 이러다 죽어요.”
“죽긴, 과장은.”
“정말 죽으면 어떡해요.”
“회사 망할까 봐? 걱정 마, 망하기 전에 골드만삭스에 도로 넣어 줄게. 약속해.”
온몸을 쑤시는 통증 때문에 숨을 쉬기도 힘들었지만, 준우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재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잠자고, 먹고, 쉬고……. 제발 혹사시키듯 일하는 거 그만해요.”
눈자위가 빨갛게 되어 재희가 화를 내었다. 화를 내는 모습이 낯설어 가만히 쳐다보려는데 재희가 손을 들어 이마를 다시 짚고, 이내 눈을 덮었다.
“제발……, 그만해요. 이제.”
그것뿐이었다. 펄펄 끓는 이마를 식혀 주며 걱정하고, 화를 내고,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참느라 충혈된 눈을 하고서도 그뿐이었다.
세상 전체와 맨주먹으로 싸우는 심정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이혼 후, 골드만삭스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오며 초라한 SJ를 시작했을 때, 시건방지게 굴더니 꼴좋다는 손가락질보다 재벌계 혼맥으로 이어지는 지연의 집안과 돌아섰기에 감내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훨씬 컸다. 마지막 순간에 애매한 웃음으로 투자를 거절하던 사람 대부분은 지연 집안과 연관이 있었고, 지연 집안에서 SJ를 죽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는 어디서도 돈줄이 열리지 않았다. 허둥거리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르며 하루하루를 견뎌 내었다.
비참한 남자에게, 순수한 친절이 야기할 뻔한 결론을 재희는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우의 감정이나 화학적 반응과 본능까지, 그로 인해 겪을 고민도 재희에겐 예상하지 못하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결과치였다. 그 무렵 재희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고 곁을 주었다면, 준우는 결혼에 실패했다는 자괴감마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불쑥불쑥 찾아드는 충동대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무모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녀가 기함을 하며 도망가는 그림이 가까스로 그를 붙잡았다. 그 시절 재희만은 결코 잃을 수가 없기에 준우는 다만 그녀가 정해 둔 안정된 관계 속으로 깊이 몸을 숨겼다. 그마저 오래전 일이다.
준우는 서재 소파에 드러누우며 ‘아주 잠깐 동안’이라 규정지은 시간 동안 자신을 풀어 주기로 했다. 눈을 감고 붉은 입술과 젖은 머리, 발개진 뺨과 따뜻한 몸, 서준우의 옷을 입고 서준우의 냄새가 나던 나긋한 여체를 차례로 떠올렸다.
오늘 밤, 잠들기 전까지만이라고, 준우는 몇 번이나 새기듯 중얼거렸다.
가방을 들어 주고 한의원에 데리고 가서 침을 맞히고 나오는 내내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으세요.’, ‘죄송해요.’, ‘고맙습니다.’를 반복해서 들었다. 말끝마다 붙는 ‘사장님’ 소리도. 어젯밤에 대한 내색은 전혀 없었다. 재희는 평소처럼 잔잔하게 웃는 얼굴이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말에 ‘제가 살게요. 너무 폐를 끼쳐서요.’ 교과서 같은 표현으로 어젯밤을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금세 표정을 걷어 내고는 웃었다.
‘어디 가시고 싶으세요? 비싼 거도 사 드릴 수 있어요.’ 말갛게 웃는데 어이없게도 가슴이 저린다. 목덜미를 만져 주고 어깨를 안아 주고 싶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무슨 감정인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아직은 환하게 비추는 도심 한복판이다. 새벽의 사무실도 아니고, 캄캄한 밤 차 안도 아니고, 젖은 머리를 내맡기던 그 밤도 아니다. 턱턱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준우는 넥타이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내렸다.
“갑자기 날씨가 무척 더워졌죠?”
잰걸음을 멈추고 재희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조금.”
“여기예요. 빨리할게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화점 모 브랜드 매장 안이었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좌측으로 백화점이 들어오자 재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랬다.
‘아, 여기…….’
잠시만 가도 되냐는 말에 그러자고 들어온 길이었다.
정신이 빠진 상태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늘 다니던 익숙한 산길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난감한 꿈. 다리에 생채기가 나도록, 등이 흠뻑 젖도록 헤매다 보니 갈림길에 섰다. 눈앞에는 커다란 이정표가 턱 버티고 있다. 붉은 화살표가 양측으로 나 있다. 익숙하고 지루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과 낯선 이름의 길. 낯선 길 입구에는 작은 풀꽃들이 한들거리지만 뒤를 이은 것은 너무 짙은 숲이라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한 길이었다. 목을 길게 빼서라도 볼 수만 있다면, 길의 끝을 가늠할 수만 있다면 가시덤불이 있다 해도, 어떤 것을 내놓으라 해도 기꺼이 택할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고개 좀…….”
턱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얼굴을 번쩍 드니 하얀 손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라이트블루가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싫으세요?”
흰 손이 들고 가슴팍에 대어 보는 것은 지난밤에 자루를 쓴 것처럼 입고 있던 흰색 셔츠와 똑같은 모양의 셔츠다.
“별로 색감에 대해 뚜렷한 선호가 없어.”
“그럼 이걸로 할게요. 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마른침을 삼킨다.
“그 셔츠도……, 세탁해서 돌려 드릴 거구요.”
재희가 표정을 감추며 계산대로 향했다.
준우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 어처구니없이 길어졌다.
동그랗고 조그만 뒤통수, 단아한 허리선과 빌어먹게 예쁘고 가는 종아리와 발목까지 가슴에 박힌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시선을 돌렸다. 이정표의 붉은 글자를 다시 확인하며 익숙하고 지루하고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생 그곳에 머무르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은 유효기간이 정확하게 정해진 육체적 감정적 유희. 서준우에겐 그것이 최선이고 최상이다.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잘할 수 없는 부분이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다만 한재희는, 재희는 서준우와 그런 유희를 해야 할 여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결코.
울부짖는 소리가 칼날처럼 살갗을 찢고 들어온다. 그래서 늘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
‘서준우, 나한테 그게 사랑이었다고 말하지 마. 아니, 넌 사랑 같은 거 하지 마. 그 사랑 같은 걸로 한 여자를 미치도록 외롭게 하지 마. 미쳐서 나가떨어지는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해. 넌, 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어. 너는, 치사하고 졸렬한 이기주의자야.’
‘지연아, 내가 잘못했어. 이러지 마.’
‘오빠, 스트라디바리는 거기 버려두는 게 나았어.’
생명의 기운이 깡그리 사라진 껍데기 같은 얼굴이었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까만 눈동자가 영혼을 잃은 껍데기 가운데 박혀 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6년 전,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지연과 열병처럼 사랑했고, 짐승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열병이든 짐승이든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은 준우에게 지긋지긋한 환멸이자 늪과 같은 공포감이다.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짐승처럼 준우는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재희가 황금색 브랜드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내밀면서 웃는다.
“사장님?”
“……사장님?”
준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 *1.NPV (Net Present Value, 純現在價, 순현재가치) 특정 투자안에 대한 현금 유입을 최소한의 보수율로 할인하여 현재가를 산출하고 현금 유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로 할인하여 각각 현금 유입과 현금 유출의 현재가의 차액(즉, 순편익[편익-비용]의 흐름을 현재 가치로 계산하여 이를 합계한 것)을 살펴 투자 타당성을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