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1
1091화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은 까마득한 고원(高原)에 세워진 도시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중원으로까지 이어진 황하(黃河)의 지류가 흐르고, 주위는 온통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뭇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지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녕의 높은 성벽 위를 메운 수많은 이들 중 그 누구도 눈앞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고고하게 우뚝 서 있어야 할 산이 움직이는 광경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니까.
드득. 드드득.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울림.
그에 따라 도시 전체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뒤흔들린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경악으로 물든 그 수많은 시선 끝에는, 저 멀리에서 가까워져 오는 칠흑색의 산이 있었다.
아니, 마치 하나의 산처럼 움직이는 적들의 군세가.
암천(暗天).
마침내 그들이 왔다.
푸른 하늘도, 청록의 대지도 검게 물들일 사막 너머의 악귀들이.
* * *
문득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느낀 것은 결코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두웠다. 온 사방이.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햇빛을 먹어치운 냉기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놈들이 있었다.
괴물과 인간이 뒤섞인 암천의 거대한 군세가.
“……은인.”
어느샌가 성벽 위로 올라온 청풍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미약한 떨림마저 묻어나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성벽 너머를 가득 메우며 진군해 오는 적들의 모습에 압도당해 버린 후였으니까.
누구에게도 결코 그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세상 모두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한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 두려우냐?
귓가로 흘러들어온 적천강의 전음(傳音)에,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맞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몸서리쳐질 만큼 두렵다.
지금껏 단순히 짐작만 해 왔던 놈들의 전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것이, 그 진정한 실체를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꾸욱.
나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들어간 주먹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진다. 방울방울 맺힌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나는 더욱 힘주어 주먹을 말아쥐며 대답했다.
– 예. 두렵습니다.
– 무엇이 그리 두렵더냐.
– 이미 그토록 다짐하고 각오했음에도 위축되어버린 저 자신이,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가 가장 두렵습니다.
내가 죽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건 지금껏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왔던 나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자, 가소로운 위선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 있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성벽 뒤에 머무르고 있는 수십 만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리고 적천강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 그래, 그것이 네 녀석과 노부의 차이겠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뒤이은 전음이 귓가로 전해졌다.
– 일평생 대의(大義)를 좇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갔을 뿐. 따라서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죽음은그리 괴롭지도 않았다.
세인들은 적천강을 십왕(十王)의 수좌로, 정파를 대표하는 거인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열화문의 역대 문주들이 그러했듯, 정사마(正邪魔) 어디에도 몸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샌가 꼬리표처럼 붙어버린 대협이라는 호칭이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 하지만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 아니, 틀렸다.
단호하게 대답한 적천강이 심유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 타인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자만이 대협이라 불릴 자격을 얻는다. 바로 네 녀석처럼.
– ……!
– 다만 이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두거라. 후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두려움부터 이겨 내야 한다는 것을.
다음 순간, 적천강이 나직이 덧붙였다.
– 그때서야 비로소 영웅(英雄)이 된다.
영웅. 영웅이라.
언제나 멀게 느껴지는 그 두 글자를 마음속으로 뇌까리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그런 것 따위는 원한 적도 없습니다.
– 상관없다. 영웅은 단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이 네 녀석을 그리 부를 때 자격을 얻는 것이다.
– 노야께서 대협이라고 불리시는 것처럼요?
-뭐라?
–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구태여 대의를 좇지 않아도, 그저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갔음에도 어느샌가 대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 ……!
크게 뜨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적천강이 입술을 핥았다.
– 이거 한 방 먹었군.
– 비긴 거로 하시죠.
– 혓바닥 놀리는 솜씨는 어디 안 가는구나. 이제야 노부가 알던 그 천둥벌거숭이로 돌아온 기분이야.
피식 실소를 흘린 적천강이 턱짓으로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 어떠냐, 아직도 두려우냐?
– 예.
망설임 없이 대답한 나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 하지만 저는 그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고 똑바로 직시하는 자만이,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구궁, 구구구궁!
어느덧 시시각각 더해 가는 울림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는 지면.
나는 높고 단단한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그 강렬한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동시에 보았다.
감히 눈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적의 선두에서, 정확히 이곳을 향해 히죽 웃고 있는 한 사람을.
‘혈주(血主).’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놈의 모습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지만, 삐뚜름하게 비틀려 올라간 입매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손을 대면 묻어나올 것만 같은 저 진득한 살의(殺意)와 광기는, 감숙성에서 쓰러트린 혈검마군조차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서로를 알아본 그 찰나의 순간, 놈의 입술이 달싹였다.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아픈데, 잠시 내려와서 인사나 나누지?”
먹먹한 굉음과 먼지구름을 뚫고 울려 퍼진 그 한 마디에, 그렇지 않아도 혈주를 뚫어질 듯이 응시하던 적천강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거렸는데, 알아서 긁어 주는군.”
즉각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궁성이 한발 앞서 만류했다.
“격장지계(激將之計)예요. 뻔하디뻔한.”
거들어 보라는 궁성의 눈짓에, 언제부턴가 홀연히 나타나 성벽 위에 자리 잡고 있던 살성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짓인 건 맞지.”
적천강이 미간을 찌푸린 그때, 살성이 덧붙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중 제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고.”
곧바로 주름 잡힌 미간을 펴는 적천강을 향해, 내가 엄숙하게 결론을 내렸다.
“당장 하죠.”
“그래. 설마 죽기야 하겠나.”
파팟!
누가 말릴 틈새조차 없었다.
남자들의 유언 1순위를 읊으며, 우리는 동시에 성벽을 박차고 솟구쳤다.
지금껏 함께하며 들어 본 것 중, 가장 날카롭고 커다란 궁성의 외침을 뒤로한 채로.
“가지 말라니까!”
음.
미안합니다.
* * *
단숨에 아득한 창공을 가로질러 떨어져 내리는 세 개의 인영을 본 순간, 혈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놈들이군. 이걸 진짜 온다고?”
그냥 가볍게 툭 던진 말이었는데, 몇 마디 주고받나 싶더니 이렇게 망설임 없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무슨 반쯤 미친 투견(鬪犬)도 아니고…….”
적잖이 당황한 혈주가 말꼬리를 흐리던 그때, 마치 섬광처럼 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니가 내려오라며, 씹새야.”
“개보다 못한 새끼. 염병할 호로새끼. 태워 죽여도 시원치 않을 천하의…….”
“네가 말로만 듣던 혈주로군. 초면에 이런 부탁하긴 뭐하지만, 얌전히 목을 내놓고 물러날 생각은 없나?”
이상하리만치 입에 착 감기는 욕설을 구사하는 진태경을 시작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쌍욕을 퍼붓는 적천강에 이어 처음으로 대면하는 살성까지.
혈주는 잠깐의 당혹스러움에 가려져 있던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다 지껄였나?”
착 가라앉은 혈주의 음성에, 잠시 멈칫한 진태경이 살성을 힐끗 바라보았다.
“혹시 할 말 남으셨어요?”
“아마도. 어차피 초면이라 할 말도 딱히 없다.”
초면인 것치고는 이미 상당한 무례를 범했던 살성이었지만, 진태경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뒤 혈주에게 대답했다.
“이쪽 분은 끝나셨대.”
으득.
그 태연한 태도에 이를 악문 혈주는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아직 끝나지 않은 육두문자의 파도가 그를 덮치기 전까지는.
“네놈의 뼈마디 하나 남기지 않고 자근자근 갈아 주마. 살점은 남만야수궁에 먹이로 쓰라고 던져 주고, 유골은 소림사 뒷간에 뿌려서…….”
“아, 이쪽 분께서는 아직 안 끝나셨네. 조금만 기다려 봐. 솔직히 너도 은근히 뒷 내용이 궁금하지 않냐?”
그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린 혈주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갈(喝)-!”
콰아아아!
막강한 기파(氣波)가 사방을 휩쓴다.
그 외마디 고함에 담긴 거대한 공력에 끝없이 진군할 것만 같던 암천의 군세도, 일백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 성벽 위의 사람들도 숨을 삼켰다.
그러나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기파를 온전히 느낀 세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솨악!
자욱하게 솟아오른 흙먼지를 가르는 한 줄기의 예리한 바람.
그 중심에서, 어느덧 투명하리만치 맑은 창날을 내리그은 진태경이 히죽 웃었다.
그들이 성벽을 내려오기 전, 혈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왜 흥분하고 그러냐. 간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폭발은 파괴를 의미하지만, 이는 곧 소멸과도 연결된다.
분노를 끌어모아 단숨에 폭발시킨 혈주는 되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태경을 응시했다.
“그때와 똑같군. 그 빌어먹을 혓바닥은.”
그 순간, 진태경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때와는 다를 거야. 그 외의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