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6
#35화
약왕당의 한 병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혁무진이 끙, 신음을 흘렸다.
“죽겠네.”
옆자리에 비슷한 몰골로 누워 있던 한엽이 대꾸했다.
“안 죽은 게 기적이죠.”
“그치?”
“그렇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 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필의 일장(一掌). 알아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눈만 감으면 붉게 달아오른 놈의 손바닥이 생각났다. 어쩌면 평생 따라다닐 악몽일지도 모르겠다.
“괴물 같은 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절정 고수잖아요.”
허탈해하는 혁무진과 달리 한엽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야, 인마.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요?”
“그…….”
혁무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알고 있어요.”
“응?”
“부조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살았다는 안도감.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내 무공에 대한 절망감.”
혁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한엽의 말은 정확했다. 조필의 화염신장은 뼈를 부러트리고 심맥을 찢었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따로 있었다.
그날 이후 머릿속을 맴도는 한 가지 질문.
‘내가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압도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송두리째 뿌리 뽑혔다.
“넌 그걸 전부 털어 낸 거냐?”
한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어요. 항상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
“강해질 겁니다. 조필만큼. 아니, 조필보다 훨씬.”
한엽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까 기뻐지더라고요. 나도 절정 고수가 된다면 저렇게 강해질 수 있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요.”
“절정 고수라…….”
절정의 경지는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다. 고작 이, 삼류에 불과한 한엽의 선언은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혁무진은 비웃지 않았다.
‘변했구나. 이 녀석도.’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상황도, 사람도.
소심하던 이류 무사도 어느새 그 흐름에 동참했다. 혁무진은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음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내가 더 강해질 거다.”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한엽이 이내 씩 웃어 보였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우선 한 사람부터 따라잡아야죠.”
그들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진태경. 이미 저 앞에서 뛰고 있는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의 등 뒤로 빠끔히 열려 있던 문이 스르륵 닫혔다.
* * *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후, 씨.”
이것들이 병실에서 청소년 성장 드라마 찍고 있네. 무슨 얘길 하나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아주 가관이다, 가관.
들어갔으면 의형제 맺을 뻔.
‘그래도 좀 기특하긴 하네.’
나름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 아닌가. 게다가 저 두 사람은 날 돕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었다. 정나미 한 톨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이게 마지막이려나.’
이틀 뒤, 나는 조만간 본대 후위를 맡아 출정할 것이고 저 둘을 비롯한 정찰조원들은 부상자로 가문에 잔류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때쯤에는 로그아웃하게 되겠지.’
로그아웃 퀘스트의 마지막 조건인 명성 500 달성이 머지않았다. 오늘 약왕당 방문은 나름의 작별 인사인 셈이다.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의 추억 보정이라 해도 좋고.
‘뭐, 굳이 알릴 필요 없이 얼굴만 보면 되지.’
이미 다른 정찰조원들도 쓱 훑어보고 왔다. 한엽과 혁무진도 봤으니 한 곳만 더 들르면…… 어?
“어!”
한 손에는 헝겊 인형. 다른 손에는 과자.
귀엽게 댕기를 묶은 꼬마가 땡그란 눈으로 외쳤다.
“관심법 아저씨다!”
“…….”
오빠라고 불러 주면 안 되겠니. 나는 슬픈 눈으로 소율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진 공자.”
“은인!”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직 파리한 안색의 공야청이 일어나려는 것을 제지하고 넙죽 절하는 소천을 일으켜 세웠다.
“누워 계세요. 너도 일어나, 인마. 내가 절 받을 나이냐.”
“백번 절해도 부족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벌써부터 두 사람의 눈가에 물기가 고인다. 멋모르는 소율은 헝겊 인형을 꼭 끌어안고 제 오빠한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오라버니 은혜 입었어? 나도 은혜 보여 줘. 예뻐?”
어. 그거 옷 아냐.
조잘거리는 소율을 뒤로하고 공야청에게 말을 걸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더할 나위 없이 좋소. 한동안 요양해야겠지만.”
공야청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모두 공자 덕분이오.”
“공치사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한 번은 그대로 놓고 간 적도 있고요.”
“내 선택이었소. 그리고 공자는 돌아왔지.”
조필에게 쫓기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공야청은 심각한 중독 상태였고 스스로 남기를 원했다. 그가 그랬듯 나도 선택해야 했다.
수많은 갈등 끝에 내가 내린 결정은 그에게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후회했지.’
미친 짓이었다. 고작 게임 속 NPC를 위해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다니.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에게 무엇을 보았고 공야청과 정찰조원들에게서 누구를 떠올렸는지…….
“진 공자?”
공야청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아, 나도 소식은 전해 들었소. 혹 그것 때문이오?”
“무슨 소식이요?”
“조만간 큰 전투가 있을 거라 하더이다.”
이거 군사기밀 아니었냐.
병실에만 머무르는 공야청이 알 정도면 태원진가에 눈 있고 귀 달린 놈들은 다 안다고 봐야 한다.
첩자라도 하나 있으면 대북 확성기가 따로 없겠군.
‘이 전쟁, 이대로 괜찮은가.’
문득 드는 생각을 휘휘 저어 흘려보냈다. 뭔 상관이냐, 어차피 곧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텐데.
이 순간에도 울리는 시스템 알림이 그 증거다.
띠링.
– 당신에 대한 소문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습니다.
– 명성치가 1 상승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조필을 쓰러트린 이후 내 이름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슬쩍 퀘스트창을 열어 확인해 보니 남은 명성치는 50 남짓.
로그아웃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다.
“본가의 명운이 걸린 전투가 되겠구려.”
물론 내 상황을 이들이 알 리가 없다. 공야청과 소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은인.”
아쉬운 얼굴의 소천을 제지한 건 공야청이었다.
“가시게 두어라.”
“하지만…….”
“어허.”
소천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혼자 인형을 갖고 놀던 소율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아저씨 벌써 가?”
“오빠라니까.”
“응. 아저씨.”
소율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공야청이 나를 불렀다.
“진 공자. 갈 땐 가더라도 놓고 간 물건은 가져가야 하지 않겠소?”
“놓고 간 물건이요?”
잠깐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인벤토리라는 사기 기능 덕분에 늘 손이 가벼운 나다.
“그런 거 없는…… 뭡니까, 이게?”
공야청의 손에는 긴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공자가 경황이 없어 챙기지 못한 물건이오. 주인이 왔으니 돌려주는 게 맞겠지.”
뭐지?
어리둥절한 상태로 보퉁이를 받아 들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 내용물을 확인하려 하는 내게 공야청이 말했다.
“처소에서 풀어 보시오.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금송아지라도 들었나?
* * *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보퉁이를 풀었다. 그리고 공야청이 했던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탐낼 만한 물건이긴 하네.’
낡은 책자와 조그만 상자. 그리고 낯익은 검 하나.
무림인에게 이 물건들의 가치는 금송아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가치를 어느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있었다.
‘아이템 확인.’
띠링.
아이템창
[화염신장]종류 : 무공 비급
등급 : 초절정
제한 : 열양지기의 소유자
설명 : 열화문(熱火門)의 비전절기 중 하나. 강력한 화기를 바탕으로 한 무공이다.
효과 : [화염신장]의 습득
아이템창
[열화신단]종류 : 영단
등급 : 절정
제한 : 無
설명 : 열화문(熱火門) 비전으로 제조된 영단.
효과 : 복용 시 30년의 공력을 얻는다. 단, 영단이 품은 강력한 화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
아이템창
[이름 없는 검]종류 : 검
등급 : 無
제한 : 無
설명 : 만년한철로 제작되어 매우 날카롭고 단단하다. 오랜 시간, 수많은 피를 머금은 탓에 스스로 변화했다. 검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다.
효과 : 알 수 없음
“미쳤네.”
진짜 미쳤다. 초절정의 비급에 30년 공력을 주는 영단, 거기에 정확히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좋아 보이는 검까지.
호랑이는 죽으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조필은 이런 물건을 셋이나 남겼다.
‘시바, 좋은 건 꼭 다 끝나고 주더라.’
빌어먹을 망겜. 챙겨 줄 거면 진작 좀 챙겨 주든가. 다 끝나고 나서 뒷북치는 꼴에 혈압이 오른다.
‘그래도 아이템은 진짜 좋네.’
설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혹할 정도였다. 영단 흡수하고 화염신장까지 익히면 어떨까. 조필처럼 손에서 막 불도 나오고 그러면…….
‘존나 멋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 했는데 영단 잘못 삼켰다가 셀프 화형식을 열고 싶지는 않다.
‘명심하자. 안전 제일. 안전 제일.’
이제 와서 안전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렇다고 넙죽 집어삼킬 만큼 멍청한 놈도 아니다.
‘다 끝나 간다.’
삐끗하는 순간 훅 가는 거다. 나는 아이템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처넣었다. 깊은 밤,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내 얘기라도 하는지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명성치가 1 올랐습니다.
* * *
그 시각, 대장로는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약속된 날짜와 장소다. 어둠 속 ‘그’는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 달이 참 밝군요.
– 그렇군.
그의 말처럼 오늘의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다.
– 어릴 때는 달이 참 좋았는데…… 머리 굵어질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어떤 생각?
– 달이 없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죠.
– 운치 없는 세상이로군.
– 운치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저야 밤 생활로 먹고사는 놈이니 달이 없어지면 기쁠 겁니다.
밤 생활이라. 그는 기둥서방처럼 경박하고 유쾌한 어조로 떠벌렸지만 대장로는 알고 있었다. 그가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이며 뛰어난 살수라는 사실을.
바람 사이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 아, 참.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 순조롭네. 병력 배치까지 끝났지.
–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영민한 소가주가 냄새를 맡으면 일이 틀어지니까요.
– 걱정 말게.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으니.
– 하늘이 돕는군요.
– 그쪽은 어떤가?
– 뻔한 걸 물어보시는군요.
가벼운 질책이 담긴 말에 대장로는 입을 다물었다.
‘어련할까.’
해무(海霧) 같은 자들이다. 그들의 정체는 안개에 덮여 보이지 않고 손을 뻗어 휘저어도 실체가 없었다. 축축한 손바닥과 불쾌한 감정만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힘이 있지.’
자신을 태원진가의 가주로, 산서성의 유일한 패자로 만들 수 있는 힘. 반평생 간직한 야망이다. 대장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 나 역시.
산서성의 양분하는 두 거대 문파가 격돌하는 날……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