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3
#542화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특히 무림인의 경우에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가 걸음걸이에 담겨 있다.
우악스러운 힘을 바탕으로 무공을 펼치는 이의 걸음을 무겁고 거칠다.
반면 유려한 무공을 익혔거나, 살수와 같은 특정한 경우에는 발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가볍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누군가의 걸음걸이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 못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사운드 보소.’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육중한 소음.
보보(步步)마다 제법 단단하게 설계되어 있는 계단이 삐걱거리고 미세한 진동이 전해진다.
어느새 옆구리에 찬 호리병을 꺼내 술을 홀짝이고 있던 적천강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암천. 그놈들이 하다 하다 이제는 사람으로 괴물까지 만드는군. 도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거지?”
“예?”
순간 뭔 소린가 했네.
곧장 적천강의 말을 이해한 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한데 지금 올라오는 놈은 암천 아닌데요.”
“음. 그래도 걱정할 만한 수준의 상대는 아니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즉시 네 녀석이 때려눕히거라. 무림맹에 던져 주면 뭐라도 나오겠지.”
“……아니, 암천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문은 노야께서 이미 박살 내셨으면서 뭘.”
“뭣이?”
눈이 화등잔만 해진 적천강이 침까지 튀겨가며 말했다.
“그럼 지금 올라오고 있는 저놈이 순수한 인간이란 말이냐?”
“놀랍게도, 자연산입니다.”
“허어, 인생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로고. 그런데 느껴지는 기파가 그리 정순하지는 않던데.”
응급환자를 내려보내고 돌아온 혁무진이 일양노의 피가 흥건하게 묻은 손바닥을 바짓단에 문지르며 대답했다.
“이야, 역시 적 대협이십니다. 사마외도를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사마외도?”
“예. 흑룡마문(黑龍魔門)의 소문주와 그 수하지요.”
커다란 소음에 가려져 있어 잘 들리지 않았을 뿐, 처음부터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적천강의 난입으로 뻥 뚫려 버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말학 사마표가 화왕 적천강 대협을 뵙습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의 사내. 그를 마주하자마자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거린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세 글자 때문이다.
‘정혼자.’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천강을 향해 포권을 취한 사마표가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덩어리를 툭 쳤다.
“뭐 하느냐.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
별호와 이름이 찰떡처럼 어울리는 호거아(虎巨兒) 태산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
“반갑다. 태산이. 화왕 봤다.”
“…….”
신박한 인사법일세.
슬쩍 적천강의 표정을 보니 화왕이 아니라 염라대왕을 보여 주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듯 사마표가 신속하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적 대협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어휘력이 부족해서 이게 최선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적천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별 해괴한 놈을 다 보겠군. 그래, 노부도 네놈 봤느니라.”
“헤헤.”
순진하게 웃은 태산이 대뜸 쌍따봉을 날렸다.
“화왕. 강하다. 태산이. 강자 좋다. 반갑다.”
“오, 오냐. 노부도 반갑다.”
“그런데 태산이. 배고프다.”
“뭐, 뭐라?”
“저거 먹고 싶다. 화왕 허락해 주면 고맙다.”
식탐이 가득한 눈빛은 어느새 우리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다과의 존재를 깨달은 적천강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라.”
“와! 다과! 태산이, 잘 먹겠습니다!”
쿵! 콰직!
객잔 주인이 피눈물을 흘리겠구만.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엄청난 덩치가 그나마 남아 있던 문짝의 잔해를 박살 내며 돌격한다.
기다렸다는 듯 탁자 위의 모든 것을 쓸어 담는 태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적천강이 중얼거렸다.
“노부가 너무 오래 살았나.”
아무리 적천강이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까지 화왕이라는 두 글자만 대면 설설 기는 사람들만 상대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청풍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강적의 등장이 아닐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뒤통수를 긁적인 나는 사마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무슨 일로?”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좋겠는데.”
“아니, 별로 괜찮지 않아서 그래.”
사마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예의상 물어본 건데, 역시 평범하진 않군. 자네도 사마외도에 악감정이 있었나?”
“악감정이라기보다는…….”
제기랄. 막상 이렇게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녀석과는 겨우 한 번 만난 것이 고작이지만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고, 내가 틈만 나면 사마외도 척결과 정파 짱짱맨을 외치는 골수주의자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건 적천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 서서 뭔 짓거리들이냐? 정분났어?”
적천강까지 저리 말하니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고민을 끝마친 나는 사마표를 향해 턱짓했다.
“젠장, 들어오든가.”
“고맙군. 감사합니다, 적 대협.”
정중한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사마표의 모습에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놈이 제법 싸가지는 있구나. 아니면 음흉한 핏줄을 이어받은 건가?”
순간 멈칫한 사마표가 빙긋 웃었다.
“아마 후자일 겁니다. 그나저나 제 아버님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네놈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잊고 있었지. 흑야왕(黑夜王), 그놈의 소싯적 모습을 쏙 빼다 박았군.”
흑야왕 사마공.
사마표의 아버지이자, 지금의 흑룡마문을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별호만 보면 십왕(十王)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궁기방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십왕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녹림맹주인 녹림투왕(綠林鬪王)과 용봉표국의 표왕(鏢王)처럼.’
그들 역시 범접할 수 없는 무위를 지닌 초절정 고수였지만, 십왕이라는 전설의 한 자락으로 인정받기에는 무리였다.
사파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이자 흑룡마문의 문주인 흑야왕 사마공 역시 같은 맥락으로 그러한 별호를 얻었다고 했다.
“그나저나……”
사마표를 지그시 바라보던 적천강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흑야왕에게 이렇게 젊은 아들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위로 형님 일곱과 누이 아홉이 있습니다. 제가 막내지요.”
“허, 정력도왕이 들으면 울고 가겠군. 그럼 네 녀석이 소문주렸다.”
사마표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렇습니다만, 그건 어찌…….”
“뻔하지 않느냐.”
코웃음 친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흑야왕, 그놈 성격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지. 자질이 뒷받침된다면 다른 자식들은 순장(殉葬)해도 신경 쓰지 않을 놈이니까.”
“…….”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군.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었지. 여우처럼 약삭빠르고, 독사처럼 교활했어.”
면전에 대고 패드립 박는 클라스 봐라. 가슴이 웅장해진다.
사마표의 자질을 인정한다는 속뜻이 있긴 하지만 결국 패드립은 패드립. 나는 아빠 욕에 발끈한 효자 아들이 일을 벌이기 전에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흠. 글쎄.”
생각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마표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무림에서는 제법 비싼 취급을 받는 종이. 그리고 종이의 최상단에 적힌 문구가 단번에 눈에 띈다.
★무명 소졸이었던 내가, 이룡각에서는 무림 영웅?!★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나는 턱을 문질렀다.
“제법 눈에 익은데.”
사마표가 피식 웃었다.
“눈에 익을 수밖에.”
“누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재적이야.”
“파격적이기도 하고.”
툭.
사마표의 길쭉한 손가락이 종이의 한 부분을 짚었다.
혁무진이 악필로 휘갈겨 쓴 모집요건(募集要件).
바로 그 아래에 존재하는 여러 항목 중에서도 손가락은 정확히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별 및 출신 문파 안 따지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특히 이 부분이 마음에 들더군.”
“그래서?”
“지원하겠네. 이룡각에.”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기분이 복잡미묘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유는?”
“노래를 듣는 순간 느낌이 오더군. 딱 내가 원하던 곳이지 뭔가.”
“응. 헛소리.”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성공 시대가 시작되고, 찾는 문파가 많아지고,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노래 가사는 사마표에게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니까.
흑룡마문은 사파 무림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지닌 문파.
설령 사마표가 소문주가 아니었다 해도 흑야왕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어느 정도의 부귀영화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놈이 이룡각에 들어오길 청한다?’
아무리 정파 골수분자들이 피켓 들고 시위를 벌여도 사마표는 무림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놈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사마표를 지그시 응시했다.
“농담이라면 재미없는데.”
“다행이군. 전부 진담이거든.”
“헛소리 집어치우고. 진짜 이유가 뭐야?”
“이유를 대야 한다는 건 방에 적혀 있던 내용에 없었네만.”
“가라. 멀리 안 나간다.”
사마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룡각에 들어간다면, 사마외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딱히 떼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정말 그렇게 보이나?”
“믿음이 안 가는 게 사실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럼 이참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겠네.”
“털어놔. 개 털리기 싫으면.”
피식 웃은 사마표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거스러미 하나 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날 위해 자네를 이용할 생각일세. 때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유용한 패가 되겠지.”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쉴 새 없이 쩝쩝거리며 음식을 씹던 태산도 움직임을 멈췄고, 혁무진은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나와 사마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침묵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재미있는 놈일세, 그려.”
목소리의 주인은 적천강이었다.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사마표를 응시하던 그가 나를 향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네놈은 어찌 생각하느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주 강렬한데요. 면접 한두 번 본 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받겠느냐?”
“글쎄요.”
흑룡도 사마표. 저놈이 했던 말 중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재미있는 놈이네.’
툭툭.
침묵 속에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사마표를 똑바로 응시했다.
“우선 하나만 확실하게 하고 가자.”
“얼마든지.”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마표가 대답했다.
“즉결 처분. 그래, 명심하지.”
“허. 시원시원하시네.”
“당연한 일이니까. 그럼 이제 끝난 건가?”
“아직 합격 아니야. 우선 염두에 두는 거지. 우선 오늘은 이만 가라.”
“그러도록 하지.”
도대체 이놈의 목적은 뭘까.
커져만 가는 궁금증 속에서, 떠나려는 사마표와 태산을 바라보던 나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 더.”
“……?”
“저놈 식비는 네가 부담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