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2
#541화
하남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땅이다.
개봉(開封), 낙양(洛陽)과 같은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천년 고도의 대도시. 그리고 네 개의 명산을 비롯하여 기가 막힌 자연경관과 각종 명승고적을 구경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사시사철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고, 당연하게도 객잔과 기루 등 유흥 및 숙박을 위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 거리가 들끓었던 적은 없었노라고, 삼대째 한 자리에서 객잔을 운영 중인 늙은 주인장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아연한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보는 늙은 객잔 주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라 불릴 만큼 엄청난 인파였다.
“거기 잠깐! 은근슬쩍 새치기하지 마시오!
“어허, 누가 자꾸 미는가!”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아까부터 건방진 눈빛을 보내는군. 진정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나?”
“뭐라? 보자 보자 하니 이 낭인 나부랭이가…….”
“허허. 다들 혈기가 넘치는군. 보기 좋으이.”
“보기 좋긴요. 아까부터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흡사 거친 늑대를 연상시키는 낭인 무사와 이름 있는 명가(名家)의 핏줄로 보이는 사내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반백의 중년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미부인은 혀를 찼다.
거기에 더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이, 이것이 당최 무슨 일이여.’
극심한 혼란 속, 반쯤 혼백이 빠져나가던 객잔 주인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예?”
“거기 말고. 이쪽일세.”
깜짝 놀라 재차 돌아선 객잔 주인의 눈에 한 사람이 닿았다.
길게 줄을 서고 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탁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이었다.
“저들도 다 생각이 있을 테니,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을게야.”
작은 체구에 제멋대로 자라난 흰 수염. 그리고 취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안색.
혹시 무림인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영락없는 주정뱅이 노인네다. 슬쩍 노인을 살핀 객잔 주인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저마다 성공 시대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게지. 자네도 그 노래를 들어 봤을 텐데. 무림맹 이룡각에 들어오고-”
이내 노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흥겨운 곡조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던 객잔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혹시 그, 이룡각인가 하는?”
“바로 맞췄네. 그 이룡각의 젊은 각주가 바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지.”
“허어.”
객잔 주인이 외마디 탄성을 흘렸다.
별채에 머무르는 이가 강호에서 이름 높은 청년 협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 소문의 이룡각주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하여 저토록 많은 무림인들이 찾아온 게로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끌끌. 좋은 기회 아니겠나. 출신 성분도, 성별과 나이도 따지지 않는 곳은 흔치 않지.”
“그렇지요. 듣자 하니 팔순 먹은 노인도 지원할 수 있다던데.”
노인이 조용히 대꾸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일세.”
“껄껄. 농담도 잘 하십니다.”
“농담으로 들리나?”
“예?”
“농담으로 들리느냐 물었네.”
순간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객잔 주인이 떨리는 눈동자로 노인을 응시했다.
“하, 하면 노인장, 아니 어르신께서도?”
“그야 뻔하지 않나.”
노인이 술에 흠뻑 젖은 수염을 소매로 훔쳤다. 동시에 슬쩍 들린 옷 사이로 낡은 검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역시 무림인이라네. 저들과 같은. 그리고 자네와 다른.”
“헙.”
“그리 겁먹을 필요 없네. 노부는 양민을 건드리지 않거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노인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어지간해서는 말일세.”
“……!”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이제 한 방울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순간 스쳐 지나간 눈빛은 광포한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은연중 오싹한 한기를 느낀 객잔 주인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바로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저벅, 저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노인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슬슬 시작인가?”
그리 짐작한 것은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길게 줄을 선 채 기다리던 수십여 명의 절정 고수부터, 그보다 열 배는 되는 듯한 구경꾼들까지.
순식간에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왔는…… 어이쿠,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는 청년, 혁무진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 위로 작은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일찌감치 기파를 느끼고 있던 절정 고수들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열화신룡이 아니군.”
“심부름꾼을 대신 내려보내다니. 벌써부터 상전 행세를 하는 건가?”
“심부름꾼치고는 제법인데요. 저 나이에 저만한 기세라면 어지간한 명문 대파의 이대 제자보다 뛰어나요.”
“동의하오. 그리고 열화신룡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 웅성거리는 엄청난 인파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혁무진이 목을 가다듬었다.
“어, 면접을 시작하라는 조장, 아니 각주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고로 지금부터 한 분씩 호명할 테니,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무림 어디에서도 인정받는 고수라는 뜻.
저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절정 고수들은 또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입맛을 다셨지만, 그 이상으로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이 자리에 온 이상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충분히 알겠으니, 흰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어서 호명하거라.”
거친 인상을 한 중년 낭인의 말에, 혁무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진짜네.”
“뭐가 말이냐?”
“아. 별건 아니고요. 각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초면에 반말하고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떨어트리라고 하셨거든요. 저도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네요.”
“……어?”
“어디 보자, 흑혈도 노귀산 대협 맞으시죠? 이만 돌아가시면 됩니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중년 낭인, 흑혈도가 버럭 외쳤다.
“이런 개 같은 법이 어디 있느냐!”
옆구리에 찬 전낭에서 흑혈도의 신상명세가 적힌 죽간을 빼낸 혁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네요. 그런 법이.”
“자그마치 한 시진을 기다렸다!”
“아이고, 유감입니다.”
“네놈이 상전을 믿고 이리 안하무인 격으로 굴다니,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아마 무사할 것 같은데요.”
“이, 이놈이!”
“계속 이러시면 우리 각주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이놈! 하십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흑혈도는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입을 딱 벌렸다.
흑혈도는 거친 낭인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자.
지랄 맞은 성격만 아니라면 당장 일문(一門)의 문주가 되어도 중견 문파로 키워 낼 수 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그런데도 혁무진은 그가 뿜어내는 기파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탈락입니다. 가십쇼.”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진태경을 따라다니며 온갖 매운맛을 겪은 혁무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덤한 모습에 지랄 맞은 성격을 가진 흑혈도마저 할 말을 잃은 그 순간이었다.
“으하! 으하하하!”
드드드득!
어디선가 터져 나온 앙천대소에 공기가 터져 나가고 지면이 잘게 흔들린다.
주위를 짓누르는 엄청난 기파의 주인을 확인한 절정 고수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청난 공력……!’
‘나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위.’
‘이, 이게 도대체.’
경악이 가득 담긴 시선들이 향한 곳에는, 조금 전만 해도 한가로이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너무 소란 떨지 말게. 자네들은 주인장이 불쌍하지도 않나.”
엎드린 채 벌벌 떠는 객잔 주인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 노인을 바라보던 시선들 속,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이, 일양노(一陽老)!”
일양노. 그 세 글자면 족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사지간의 고수. 강대한 열양지기로 자신에게 맞서는 숱한 적들을 태워 죽였던 괴물의 별호가 바로 일양노다.
이처럼 난데없는 초절정 고수의 등장에, 좌중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진정 일양노란 말인가?’
‘저, 저 노괴가 어찌 이곳에…….’
이 자리의 누구도 일양노의 이름에 비견될 수는 없다. 아니, 모두가 합공을 가해도 쓰러트릴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불과 단 하나의 벽. 하지만 절정과 초절정의 격차는 그토록 멀고도 아득한 것이었다.
저벅저벅.
침묵 속에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일양노가 혁무진을 응시하며 웃었다.
“가서 전하게. 이 늙은이가 뵙고자 청한다고.”
“……!”
다시 한번 잔잔한 충격이 주위를 휩쓸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양노다.
거칠 것 없는 초절정 고수인 그가 핏덩이나 다름없는 이룡각주의 밑에 들어온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저토록 정중한 태도를 보이다니.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황 섞인 대답과 함께 돌아선 혁무진은 보지 못했다. 일양노의 눈빛에 어린 불길한 열기를.
‘열화문. 열화문이라. 허허. 이 늙은이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오는구나.’
열화신룡 진태경? 그를 둘러싼 소문의 진위 여부는 상관없다.
그래 봤자 고작 약관을 넘긴 어린놈. 이 나이에 그런 핏덩이를 상관으로 깍듯이 모실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다만…….
‘대대로 한 사람에게만 전승된다는 열화문의 신공(神功). 그것만은 반드시 노부의 것으로 만들고 말리라.’
평생 강자가 되기 위해 살아왔건만, 열양지기의 극에는 도달하지 못한 열양노였다.
그러나 열화문의 무공이 있다면 가능하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이름 역시 가질 수 있었다.
‘믿을 만한 소문에 따르면 화왕 적천강은 이룡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남은 것은 어린 제자와 다른 떨거지들뿐.’
이룡각이 임무를 하달받아 하남을 벗어나는 그때가 바로 천기(天氣)다.
암천? 무림맹? 천하 무림의 운명이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인가. 검버섯이 가득한 입가가 씰룩거렸다.
“허허. 허허허.”
일양노의 눈앞에는, 이미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다섯 글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 *
나이 여든다섯.
이름은 원철.
별호는 일양노. 무공은 초절정.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 없는 프로필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모시게 된 특별 심사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눈빛이 딱, 기회만 오면 뒤통수칠 호로 새끼 같은데.”
“예?”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만 툭 던진 적천강이 이미 공간을 좁혀 일양노의 아구창을 후려갈기고 있었으니까.
후우웅!
막아서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극양의 기운.
헛숨을 삼킨 일양노가 황급히 두 팔을 교차시켰지만, 힘의 차이는 극명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열양지기에도 급이 있는 법이다.
일양노가 평범한 화염이라면, 화왕 적천강이 지닌 기운은 용암. 그러한 극명한 힘의 차이는 한순간에 드러났다.
우득. 뻑!
뼈가 아작 나는 소리와 함께 일양노의 눈동자가 힘없이 풀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외쳤다.
“안 돼. 에이스으-!”
하지만 한번 불을 뿜기 시작한 적천강의 주먹은 쉬지 않았다.
뻑! 뻐벅! 뻐버버벅!
팔, 다리, 배, 등, 얼굴.
되찾은 청춘을 과시하듯 옹골찬 기운이 담긴 일권이 전신 곳곳을 야무지게 후드려 팬다.
그럴 때마다 유형화된 열양지기가 주위를 감쌌다.
‘와, 저 불구덩이를 여기서 보네.’
이 오디션 장르가 힙합이었나.
목걸이를 받지 못한 원썬, 아니 일양노는 반격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정신을 잃었다.
털썩.
바스라지는 재처럼 쓰러진 일양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적천강이 문득 중얼거렸다.
“생각났다, 이놈. 일전에 본문의 무공을 노린다고 했던 그 육시랄 놈이다.”
“……이유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전 노야가 미쳐 버린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라도 알았느니 됐다. 꼴도 보기 싫으니 눈앞에서 치워라.”
일양노의 시신, 아니 몸뚱어리가 실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니 공포에 질린 지원자들이 신법까지 발휘해 가며 도망치는 중이다.
“……아니, 시발.”
이게 어떻게 마련된 자린데. 오디션 개망했네. 진짜.
내 원망 어린 눈빛을 받은 적천강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 어쩌라고.”
“좀 살살하시지 그러셨어요. 무공 좀 탐내는 게 죽을죄는 아니잖아요. 아직 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조용히 탈락만 시키면 되는 건데.”
“쯧쯧. 순진한 녀석 같으니. 저런 놈들은 꼭 일을 치기 마련이다. 불씨는 미리미리 밟아 놔야지.”
“……보통은 잡초를 뿌리 뽑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잡초는 놔둬도 그만이지만, 불씨는 산을 태우는 법이니라.”
아니, 무슨 산림 보호 협회 회장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진 내심 중얼거리던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또 뭐요.”
적천강이 창밖을 향해 턱짓했다.
“가는 놈이 있으면, 오는 놈도 있는 법이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