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22
#621화
“가세. 자네들의 목표가 어디든, 내가 앞장서지.”
나는 고령에 접어들었음에도 굳은 의지를 보이는 늙은 은영각 요원, 남호를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설령 저승길이라 해도 앞장서시겠다니. 남 노인께서 보여 주신 의기(義氣)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저승길까지 따라간다고 하진 않았는데…….”
“요즘 들어 뼈마디도 시큰거리고, 기억도 자주 깜빡하실 텐데 이렇게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참 고맙군. 자네 말을 듣고 있자니 이 늙은이의 전신에서 힘과 의욕이 샘솟는 것 같아.”
“천만에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떫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남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한데 어디로 갈 셈인가? 내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우선 자네들이 원하는 목적지를 듣고 싶군.”
목적지라. 나는 대답 대신 허공을 힐끗 바라보았다.
허공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껏 수도 없이 그랬듯, 내 눈에는 저 허공에서 이 자리의 누구도 볼 수 없는 정보가 읽혔다.
퀘스트
[남만야수궁]남만야수궁은 새외(塞外)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거대 세력 중 하나로, 지극히 폐쇄적인 남만 땅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중원 무림은 곧 다가올 대전쟁을 위하여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이제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밀림의 맹수를 깨워야 할 시간입니다.
혹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기에 처한 맹수를 구하거나.
등급 : 초절정
제한 : 진태경 및 화룡각 인원
임무 : 남만야수궁에 도착 (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
실패 : ???
그건 남호를 만난 직후 새롭게 갱신된 연계 퀘스트였고, 내 생각과 일치하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남만야수궁. 남만야수궁으로 갈 생각입니다.”
뒤늦게 흘러나온 내 대답에, 남호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만은 광활하면서도 험준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대지 면적으로 치자면 사천(四川)보다 좁지만, 이동하는 것에 있어 들어가는 수고는 중원 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전에 각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 남만에서의 십 리는, 중원의 백 리와 같다고.”
이런 남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남만 땅을 밟아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나를 비롯한 화룡각 대원들은 불과 한나절 만에 남만이 얼마나 좆 같은 땅인지 똑똑히 깨달았으니까.
위이잉. 탁!
“무진아, 방금 무슨 소리였냐?”
“별거 아닙니다. 그냥 모기예요. 갑자기 목덜미가 따끔하길래 뭔가 했네요.”
“아, 그래? 그래도 조심해. 혹시 모르니까 남 노인 불러서 물어볼까?”
“에이, 조장님도 참. 제가 무슨 어린앱니까. 열화신룡의 오른편에서 숱한 격전을 치른 역전의 무사 혁무진! 그게 바로 접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진 후, 역전의 무사 혁무진은 구토와 함께 쓰러졌다.
“우웨에에엑!”
“헉, 무진아!”
“이게 무슨 일인가!”
“남 노인! 무진이가 쓰러졌습니다!”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쓰러진 건 다 보여. 혹시 모기에 물렸나?”
“쿨럭, 예에. 한 시진 전쯤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놈한테…….”
“푸른 줄무늬? 그것도 한 시진 전? 해독제. 빨리 해독제 가져와!”
다행히 역전의 무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게는 사천당가의 신물인 만독지환(萬毒指環)과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해독제가 오십 개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본래는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맹수까지 사냥하는 놈들이지. 한 시진만 더 늦었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걸세.”
남호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한족이라면 눈깔을 뒤집고 달려드는 이민족들의 눈을 피해 더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그리고 그건, 더욱 위험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태산이! 태산이 배가 너무 아프다! 찢어질 것 같다!”
“남 노인!”
“또 뭘 처먹었어!”
“태산이. 배가 고파서 나무에 피어 있던 붉은 버섯을 뜯어 먹었다.”
“이런 천하의 개돼지 같은 놈을 보았나! 내 그토록 주의를 줬거늘, 단순히 허기가 졌다고 해서 호랑이도 못 버티는 혈생균(血牲菌)을 처먹어? 이건 해독제도 안 통해!”
극대노를 몸소 시전한 남호였지만 그의 분노는 이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호랑이도 못 버틴다는 혈생균인지 뭔지를 처먹은 태산이 풀숲으로 들어가 거사를 치른 뒤에 씻은 듯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태산이. 다 싸고 나니까 편안하다. 이제 괜찮다.”
“……저놈. 사람 맞나?”
진심이 담긴 남호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사마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거요.”
“태산이. 속이 비니까 다시 배가 고프다.”
“내 천지신명께 맹세컨대, 두 번 다시 버섯 따위를 처먹었다가는 영영 허기질 일이 없게 될 줄 알아라.”
“오오. 태산이. 솔깃하다.”
“……후회되는군. 만약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저놈을 일장에 쳐 죽였을 텐데.”
늙은 은영각 요원의 한탄을 뒤로하고 걸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빽빽한 밀림과 습하면서도 무더운 열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거진 풀숲과 늪지대 곳곳에 도사린 맹수들의 눈동자는 샛노랗게 빛났다.
‘혹시 남만이 아니라 아마존에 온 건가.’
말 그대로 개똥 땅.
뭔 놈의 동네가 이 모양인지, 호랑이가 대학가 원룸촌 길냥이보다 많이 보이고 악어는 청계천 올챙이처럼 우글거린다.
물론 이마저도 향만 맡아도 훅 간다는 기화독초(奇花毒草)와 제 몸통보다 큰 독침을 달고 다니는 벌에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그나마 맹수들은 덩치가 큰 탓에 눈에 띄기라도 하니까.
영인을 떠난 지 하루 이틀 만에 혁무진이 앓는 소리를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만야수궁이고 나발이고, 내일모레쯤 뒈질 것 같습니다.”
내일모레까진 아니더라도, 나흘 후에는 생명이 위험해 보이긴 했다. 첫날에만 네 번 정도 중독된 녀석은 지난 이틀 사이 피골이 상접 해 있었으니까.
산서성도 중원의 시각으로는 변경(邊境)에 속한 곳이지만, 남만의 수준은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러지 말고 다른 길로 가면 안 됩니까? 좀 후지고 험하긴 해도 이곳에 비하면 완전 꽃길이나 다름없을 텐데.”
남만에도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중원에 비하면 심하게 낙후되었지만, 남만에 자리 잡은 수십, 수백여 갈래의 이민족들은 저마다의 구역을 정하고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왕래를 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그러나 간절한 혁무진의 청원에도 남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불가(不可). 그 이유는 자네도 알겠지?”
“저희를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이민족 때문이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맞서 싸우고 말겠습니다. 만약 대화로 잘 풀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거고요.”
“대화?”
꿈과 희망이 가득한 혁무진의 대답에 남호가 눈을 깜빡였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마을 하나가 사라졌네. 호의로 한족들을 맞이한 이백여 명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륙당했다고. 그런데 대화가 통할 것 같나?”
“……아뇨. 사실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군. 좋아, 그럼 닥치고 가자고.”
“옙.”
혁가 놈. 빛보다 빠른 태세 전환 보소.
하지만 이번만큼은 남호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당장 우리에게 덤벼드는 이민족과 맞서 싸운다는 소리는 남만 전체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말과 동의어다.
평소에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다가도, 외부의 적이 나타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똘똘 뭉치는 것이 남만의 특징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니 정마대전 당시의 마교조차 남만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했겠지.’
한때 천하의 절반을 집어삼켰던 마교의 십만마병(十萬魔兵)도 남만 외곽에 깃발만 꽂고 물러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만의 지독한 풍토병과 험난한 지형. 그리고 온갖 맹수와 독물이 득실거리는 이 밀림에 그 이상 깊숙이 들어선다면 득보다 실이 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상을 까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족 혐오 감정이 팽배한 이민족들이 그 정도로 적대감을 누그러트릴지도 의문이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남만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암천(暗天)의 존재였다.
‘놈들은 반드시 남만을 노린다. 일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야.’
이건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괜히 우리가 무림맹 총단이 위치한 하남에서부터 밤손님처럼 은밀하게 이동한 것이 아니다.
남만까지 오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수룡채의 수적들에게 신분을 노출하긴 했지만, 입단속도 철저히 했다.
지난번 사천행에서 인연을 쌓았던 아미파와 청성파, 그리고 사천당가에 굳이 연통을 넣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민족들에게 신분을 밝힌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된다.
보이지 않던 비수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깨달은 암천은 계획에 더욱 박차를 가할 테고, ‘균열’과 함께 재앙의 문이 열릴 테니까.
‘신분을 밝히는 것은 최소한 남만야수궁에 도착한 뒤여야 해.’
남만야수궁의 궁주인 야수묘왕(野獸苗王)은 정마대전에 참전했던 전력이 있을뿐더러, 적천강과 열화문에 호의를 품고 있다고 들었다.
일의 경중이나 남만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따져 보아도, 눈깔이 뒤집힌 여타 이민족들보다는 훨씬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이다.
‘그나저나 천마표국인지 뭔지 하는 놈들 때문에 우리한테까지 똥이 튀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괜히 동족 패키지 상품으로 같이 묶여서 나나 화룡각 대원들 이미지만 개박살이 났다.
심지어 나는 한족 출신도 아닌데.
‘……이게 폰한족인지 뭔지 하는 그거냐.’
더럽게 억울해도 방법이 없다.
남만 이민족들한테 ‘사실 전 한족이 아니라, 한민족입니다. 노스말고 사우스요.’ 이 지랄 떨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게 뻔하니까.
안 그래도 전에 구화산에서 수련했을 때 향수병이 돋아서 태극기를 그렸더니 적천강이 딱 한 마디 하더라.
‘무당파냐?’
‘아닌데요.’
‘딱 봐도 태극인데 무슨 개소리냐. 태극 하면 무당파다.’
‘태극 하면 한국인데요.’
‘한국이 뭔데?’
‘그게……. 아니다. 노야는 모르셔도 됩니다.’
‘철구 이백 근 추가.’
‘……이백 근? 왜요?’
‘몰라도 된다.’
다시 떠올려봐도 눈물샘만 자극하는 기억이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차원 땅에서 개고생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개고생이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후우.”
한숨을 내뱉는 내 모습에 남호가 쌍심지를 켰다.
“왜. 자네도 지금 당장 내려가서 대화로 해결하고 싶나? 아니면 이민족들이랑 대차게 한판 붙든가?”
“……갑자기 급발진 하시네. 그럴 생각은 쥐똥만큼도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대차게 한판 붙을 일은 지금까지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다. 당장 주위를 배회하며 울음소리를 흘리는 맹수들만 해도 몇 마리인가.
빽빽하게 늘어선 밀림과 늪지대를 훑어본 나는 남호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짧으면 사흘. 길면 엿새.”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남았네요.”
“이목을 피해 이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짧은 걸세.”
부쩍 늙은 얼굴로 허리를 두드린 남호가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단 한 순간도 걸음을 늦추지 말게. 오늘 중으로 애뇌산(哀牢山)을 넘는다면, 늦어도 나흘 뒤에는 남만야수궁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남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확히 나흘 뒤, 어느 높은 산봉우리를 지나던 우리는 저 멀리 깊은 운무(雲霧)에 휩싸인 거대한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만야수궁…….”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