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44
#743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어느 공간.
어둠을 흐릿하게 밝히는 불빛 속에서,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득.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린다. 거대한 기운이 심장의 맥동을 따라 요동치며 변화를 일으켰다.
나약한 것은 강하게.
강한 것은 더욱더 강하게.
핏줄이 도드라진 사내의 전신은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 줄기의 핏물은 턱을 타고 미끄러졌다.
투둑.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
그러나 전신을 쥐어 짜내는 듯한 그 끔찍한 격통에도, 사내의 회색빛 눈동자에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고통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이 고통은, 그에게 있어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고통을 감내한 보상은 언제나 달콤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스아아아.
어느새 멎은 파육음.
그와 동시에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내부의 기운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섬뜩하리만치 도드라졌던 전신의 핏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자극에 따라 자연스럽게 경련하던 근육 역시 떨림을 멈췄다.
그리고…… 사내는 이번에도 ‘보상’을 얻었다.
화아아악, 파앙!
찰나의 순간.
사내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기파(氣波)가 사방을 휩쓸었다.
흐릿하게나마 공간을 밝히던 빛이 사라지고 반경 십여 미터의 모든 것들이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그것은 힘이었다.
압도적인 힘.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확인한 사내, 미카엘 실베르트가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때.
우우웅.
어디선가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그 진동의 의미를 익히 알고 있던 미카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손을 뻗자 숨겨져 있던 비밀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빛이 쏟아졌다.
저벅. 저벅.
조금 전의 상황이 무색할 만큼 힘 있는 발걸음.
넓은 것을 넘어 광활하기까지 한 자신의 집무실을 천천히 가로지른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거울 앞이었다.
희미한 진동과 함께 빛나는 전신 거울.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던 미카엘이, 매끄러운 표면에 손을 얹었다.
툭,
그리고 다음 순간.
솨악!
짧은 섬광과 함께 거울 속의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미카엘 자신과 집무실 안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끝없이 뻗은 수평선과 서서히 움직이는 건물, 그리고 한 사람의 모습이 거울 표면을 채웠다.
검은 피부와 황금빛 눈동자. 요즘 시대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실크해트와 외 알 안경까지.
미카엘은 오래전부터 함께한 충복(忠僕)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고생이 많네, 후긴(Huginn).”
상관을 마주한 후긴이 실크해트를 살짝 들어 올렸다.
– 아닙니다, 길드장님.
인사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 한 시간 전, 스위스 연방 경찰국에서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놈들은?”
놈들.
짧은 물음이었지만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후긴은 즉각 자신이 아는 사실을 말했다.
– 모두 가볍게 참고인 조사만 받고 풀려났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국제 사법 재판소까지는 끌고 갈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자네 혼자만의 생각으로 내린 결론은 아닐 테고. 정보의 출처는 어딘가?”
– 우선 스위스 내에서는 베르세 장관입니다.
“베르세가?”
내년 스위스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내무부 장관의 이름이 나오자 미카엘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어 볼 것도 없군.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어.”
– 저도 길드장님과 같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놈들을 오물 구덩이에 처넣자?”
– 멱살이라도 붙잡고 집어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이 알려지는 즉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이고, 사인을 알 수 없는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음모론이 팽배하겠지. 놈들이 그 음모론의 일 순위 타깃이 될 테고.”
– 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미카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음모론의 본질은 결국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불과해. 가십거리에 집착하고 머릿속에 망상만 가득 찬 얼간이들이나 놈들을 의심하겠지.”
지크프리트 바스만은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위상을 지닌 거물.
그의 죽음을 이용해서 적들에 관한 음모론을 퍼트리는 것은 미카엘에게 있어 손쉬운 일이었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게 뻔했다.
적들을 억지로 오물 구덩이로 끌고 간다면, 자신에게도 오물이 튀고 말 테니까.
“대부분의 대중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걸세. 오히려 놈들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이 작위적이라며 의심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겠지. 오늘까지 놈들을 욕하던 이들이 바로 내일 돌아설 거야.”
미카엘이 알고 있는 한 인간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었다.
아주 작은 거짓된 일면(一面)에 속아 섣부르게 비난하고, 모든 진실이 드러나면 금세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욕하던 사람을 상냥하게 감싸 안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온 세상이 그를 욕했지만, 자신만큼은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미카엘이 바라지 않는 전개였다.
결말이 불확실한 이 시나리오의 짜임새는 둘째치고,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진태경.’
혀끝에서 맴도는 한 사람의 이름.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죽음을 이용하여 압박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매직 존슨까지다.
물론 그마저도 가능성은 낮았고, 모든 것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진태경을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쓸데없는 힘 빼기에 불과했다.
“스위스 건에서는 손 떼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
담담하지만 단호한 미카엘의 지시에 후긴이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베르세 장관에게도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언론 매체들과의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 성공적입니다. 장작을 넣어 주니 활활 타오르더군요. 다만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려야 하는 일이 있는데…….
“돈인가?”
– 예. 저쪽에서 생각 이상으로 큰 액수를 요구해 왔습니다.
“욕심도 많군.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텐데.”
–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원하는 만큼 채워 주면 그만이니까요.
후긴의 대답에 미카엘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맞는 말이다.
때맞춰 상대가 가진 욕심의 크기를 채워 주면. 아니, 그 욕심마저 넘어선 무언가를 준다면 상대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내 비밀 계좌 일부를 자네에게 넘기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게.”
– 깜짝 놀랄 만큼 쥐여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정확해. 자네도 악당이 다 됐군.”
– 어떤 분께 많이 배웠습니다.
“동양인들의 격언 중 제법 흥미로운 말이 있더군. 사람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언론을 잡고 있어야 해. 지금처럼.”
– 명심하겠습니다.
미카엘은 언론의 힘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군중심리가 얼마나 얄팍하고 무서운 것인지도.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습기도 했다.
‘천태민을 제외하면 지금의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한때는 세계 최고라 불리었던 아레스 길드도, 그 빈자리를 차지한 이정룡도, 매직 존슨을 비롯한 대격변의 영웅들조차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진태경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미카엘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밖에 없던 빈민가의 청년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진태경은 달랐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두각을 드러낸 그는 불과 일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엄청난 업적과 명성을 쌓아 올렸고, 전 세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까지도 미카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과거의 누군가처럼.
‘스카이(Sky).’
일주일 전. 미카엘은 폐허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동양인 청년에게서 천태민의 흔적을 느꼈다.
생김새도, 풍기는 느낌도 달랐지만,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놈은 위험하다고.
앞길을 막아설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미카엘의 본능은 정확했다.
수많은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온갖 악의적인 뉴스를 쏟아 내는 지금조차, 진태경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테러로 인한 공포와 언론이 심어 놓은 군중심리에 휩싸인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가 더욱 클 뿐, 진태경은 아직 건재했다.
‘하지만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놈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내심 중얼거린 미카엘은 떠올렸다.
분노로 타오르던 진태경의 눈동자를.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누군가를.
한 걸음.
그토록 염원하던 고지(高地)까지는 단 한 걸음만이 남았고, 그의 손에는 자신이 이 고지를 점령했음을 알릴 깃발이 들려 있었다.
“후긴.”
혼자만의 상념에 잠긴 상관을 묵묵히 기다리던 후긴이 대답했다.
– 예, 길드장님.
“이번 임무는 조금의 실수나 변수도 없어야 하네.”
–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빈틈없이 처리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고,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충복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미카엘이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됐네.”
–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임무를 지시한 자. 그리고 임무를 이행한 자.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이들이 죽고 다치리라는 것도.
그러나 미카엘에게 있어 그건 아주 사소한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불가피한 희생.
그렇게라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넓은 세상 어디선가 죽어 갈 그들의 희생은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 * *
콰창!
마법 처리가 된 유리가 단숨에 박살 난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통신용 수정구라 불리던 무수한 파편들은, 뒤이어 다가온 파도에 휩쓸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솨아아아.
전신을 휩쓸며 지나가는 바람.
선미(船尾)에 우뚝 선 후긴은 출렁이는 바닷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늦어도 사흘. 아마 그 안에 시작되겠지.’
그가 저 깊은 바다에 버린 것은 통신용 수정구의 파편뿐만이 아니었고, 그 결과는 머지않아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계산은 완벽하다. 임무는 성공했어.’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이번에도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성취감,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약간의 의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과연 이것으로 그를, 진태경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후긴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상관은 언제나 철두철미했고, 그가 택한 길은 항상 정답이었으니까.
“복귀한다. 준비들 해.”
후긴의 짤막한 한 마디에 배가 방향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배의 뒤로, 도쿄의 빌딩 숲이 우뚝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