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02
#801화
“곧 출발할 거야. 준비해.”
다시 찾아와 불쑥 건넨 그 한 마디에, 야마모토 겐지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처음 깨어났을 때만 해도 조센징 운운하던 놈치고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다.
만약 허준이 이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면, 동의보감의 첫 줄에 이렇게 적었을지도 몰랐다.
[매가 약이다.]자고로 육신의 상처는 포션으로, 썩어 빠진 정신머리는 주먹으로 해결해야 하는 법.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난 야마모토 겐지가 훈련병처럼 차렷 자세를 취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벌써?”
“하잇.”
“그 복장으로 싸우게?”
“엣?”
야마모토 겐지가 눈을 깜빡였다. 저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아예 제대로 듣지 못했거나.
그래서 친절하게 다시 말해 줬다.
“환자복 입고 싸울 생각이냐고.”
“……!”
짧은 침묵.
마침내 내가 말한 출발의 의미를 깨달은 야마모토 겐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전장으로 가는 겁니까?”
“그럼 어디 가는 줄 알았는데.”
“저야 아직 환자니까 당연히 본대로 후송될 거라고 생각…….”
“후송?”
“하, 하잇.”
“음. 그래. 아직 환자구나, 환자.”
세상에. 그 중요한 걸 깜빡했네.
작게 중얼거린 나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을 걷어찼다.
“거기, 밖에 누구 없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무대에 소속된 힐러 한 사람이 빠릿빠릿하게 뛰어왔다.
“Yes, Sir.”
“그 뭐야. 아직 본대로 가는 후송 차량 출발 안 했죠?”
“예, 아직 대기 중입니다.”
“다행이네. 거기 팀장한테 바로 연락해서 한 구만 더 싣고 가라고 해요, 뒷수습은 내가 깔끔하게 해 줄 테니까 와서 들고 가기만 하면 될 거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잠깐만.”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야마모토 겐지가 불길함이 감도는 얼굴로 물었다.
“한 구? 뒷수습?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엄청나게 별거인 것 같은데요. 거기, 당신. 폰 내려놔. 지금 누구한테 연락하는 거지?”
힐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보스 지시대로 존스 팀장한테 연락 중입니다만.”
“존스 팀장이 누군데.”
“시신 수습을 전담하는 분입니다. 본대로 전사자들을 후송하시는.”
“……!”
나와 힐러를 번갈아 바라보던 야마모토 겐지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무라이의 명예를 걸고, 이 한목숨 바쳐 싸우겠습니다.”
“너한테 명예가 어디 있냐. 인터넷 보니까 별명이 질풍불참이던데.”
“…….”
“개소리 그만하고 장구류 갖춰서 나와.”
“옙. 그런데 혹시…….”
“혹시 뭐.”
“아직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정말 후방으로 빼 주실 수 없는…….”
빡!
“억!”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내뺄 생각만 하다니, 역시 이런 새끼는 좀 맞아야 한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놈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두들겨 패고 싶은데, 저런 개똥 같은 놈이라도 필요하다는 사실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야.”
“왜, 왜 그러십니까.”
“안 때릴 거니까 쫄지 마. 그냥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놈이 했다는 그 말. 확실해?”
그리고 야마모토 겐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 귓가에는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그 한 마디가 다시 한번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룹 알 할리(Rub’ al Khali). 더 늦기 전에 검은 보석이 잠든 땅으로 나를 찾아와라.’
선지자의 긴 로브 자락이, 금세라도 손에 잡힐 듯했다.
* * *
중동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라비아 사막은 예맨에서부터 오만, 페르시아만을 거쳐 요르단과 이라크에까지 걸쳐 있다.
무려 230만 킬로미터가 넘는 광활한 면적.
UN에 제출된 대한민국의 공식 면적이 20만 킬로미터를 약간 웃도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미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넓은 땅을 샅샅이 뒤지려고 했으니 그렇게 예상 시간이 길게 나왔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날이 상승세를 찍는 마나 분포도와 짙은 농도 앞에서는 최첨단 기기조차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 면적을 커버하려면 10만 명의 헌터가 발로 뛰어다니는 수밖에.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리는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이 드넓은 사막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선지자가 스스로 한 장소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룹 알 할리 사막.
아라비아 사막이 중동 전체의 사막 지대를 포함하는 큰 틀이라면, 중심부에 자리 잡은 그곳은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사막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사하라 사막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사막이었지만, 선지자가 남긴 말에서 특정 범위를 유추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최 팀장에게는.
“공백 지대.”
“그게 뭡니까?”
“룹 알 할리(الربع الخالي)는 아라비아어로 공백 지대라는 뜻이더군요. 누구도 살지 못하는 땅. 뜨거운 햇빛과 모래만이 있는 땅. 그래서 그처럼 황량한 이름이 붙었을 겁니다.”
“그럼 검은 보석이라는 건…….”
“유전(油田)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던데…… 선지자가 남긴 말뜻을 유추해 보았을 때, 지금으로서는 그곳이 가장 유력한 장소인 듯합니다.”
어려운 것은 수색하는 과정이지, 이동 자체가 아니다. 한번 목적지를 정하자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이번 출정을 위해 선별된 천 명의 헌터들은 중동에 파견된 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예였고, 우리는 최단 거리로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질러 룹 알 할리 사막에 도착했다.
그리고 옛 중동인들이 왜 이 땅에 공백 지대라는 명칭을 붙였는지 곧장 깨달았다.
망망대해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과 황야. 그 안에 암초처럼 드문드문 들어선 작은 마을들.
각종 기계와 버려진 공업 단지가 있는 그곳은 과거 세계 최대의 유전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황폐했다.
오죽하면 스켈레톤 킹조차 눈을 깜빡거리며 의문을 표할 정도였다.
“뭐야, 여기가 인간들이 사는 땅이라고? 게이트가 아니라?”
괜히 최 팀장이 ‘과거에는’이라는 표현을 앞에 붙였던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이미 두 번 버려진 땅이다.
먼 옛날 토착민들에 의해 ‘룹 알 할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때 한 번. 대격변이라는 재앙 속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버려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환상적인데그래.”
저 말이 함께 온 매직 존슨이 한 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의 주인은 스켈레톤 킹이었고 그 이유는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마력(魔力)의 농도가…… 너무 짙다.’
어느 순간부터 공기가 무거워졌다고 느낀 것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덜컹. 푸쉬익.
갑작스럽게 꺼지는 시동.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태운 채 달려가던 차량이 일제히 멈추자, 매직 존슨이 작게 중얼거렸다.
“슬슬 시작됐군.”
단순한 고장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앞서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본 야마모토 겐지는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왔어. 그가 왔어. 그가 왔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놈을 말없이 바라보던 스켈레톤 킹이 내게 물었다.
“저 인간, 죽여도 되나?”
“아니. 안타깝게도 안 돼.”
“왜? 어차피 몸으로 때우게 하려고 데려온 것 아닌가. 저 꼴을 계속 볼 바에는 차라리 언데드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오.”
이 새끼 혹시 천잰가.
제법 논리정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한 걸 겨우 참아 낸 나는 야마모토 겐지를 호되게 걷어찬 다음 차량에서 내렸다.
‘벌써 오긴 무슨.’
아직 선지자가 암시한 유전 지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을뿐더러, 마력 농도가 짙어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무언가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건 그저 징조다.
이 드넓은 사막 어딘가에 아직 조우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불길하지만 확실한 징조.
곧이어 정해진 시간마다 마력 분포도를 체크하던 측정 계원의 보고를 듣고 짐작은 확신으로 굳혀졌다.
“측정 불가입니다. 저희가 보유한 기기로는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 귀한 A급 마정석을 몇 개나 박아 넣은 측정 기기로도 불가능하다니.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찾으러 오라더니, 그냥 던져 본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최 팀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뒤로 물리고 추가 지원 요청을 할까요?”
최 팀장다운 신중한 제안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대로 계속 갑니다.”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죠. 선지자, 그 새끼가 어떤 새낀데.”
“그럼 어째서.”
“함정이 있더라도 뚫고 가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문득 목소리를 낮춘 내가 말을 이었다.
“만약 선지자의 목적이 유인 그 자체에 있다면, 더더욱 지원 요청을 해서는 안 되죠.”
선지자의 능력도, 일신의 무력도 어디까지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S급 헌터를 이곳으로 호출한다면 남아 있는 병력이 위태로워진다.
이 사막에서 선지자는 수많은 광신도를 거느린 교황(敎皇)이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병력이라도 충원했다가 빈집털이라도 당하면 곤란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싸울 생각도 없다.
평소였다면 단신으로 움직였을 내가 굳이 일천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는 무적이 아니고, 밝혀지지 않은 적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갖춘 전력은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서라도 매직 존슨과 스켈레톤 킹이라는 든든한 강자들이 있다. 거기에 더해 겁쟁이긴 해도 야마모토 겐지와 최 팀장까지 있으니,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깨부수며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기서 병력을 충원한다면, 놈이 도망칠 수도 있다.’
전방에는 우리가, 후방에는 척 헤이글과 파이 첸, 필릭스 왕자를 비롯한 몇몇 S급 헌터가 상당한 전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지키고 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어낸다면 힘의 저울추가 기울고 선지자를 처치할 기회 역시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맹수도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상대에게는 덤벼들지 않아. 선지자처럼 여우 같은 놈이라면 더더욱. 안 그래, 진?”
“맞습니다.”
매직 존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저 멀리 사막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 눈치 빠른 여우가, 이대로 겁먹고 도망치진 않은 것 같아서.”
“그게 무……!”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
내 말의 의미를 깨닫고 황급히 뒷말을 삼킨 매직 존슨이, 강대한 마나를 실어 외쳤다.
“전투 준비!”
그래.
놈들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