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Kim did such a good job?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Chapter 69 – 크리스마스에 김 대리는?
“정훈아, 일어나.”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정훈은 지끈지끈 쑤셔 오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 뭐 먹을래?”
“아, 안 먹고 싶은데… 아니다. 국물 있는 거 아무거나.”
“그래.”
고갈비에 오돌뼈까지 추가 주문 하며 완전히 배를 채우고 소주를 다섯 병이나 비웠다. 정훈은 자신의 주량을 훨씬 넘게 마셨지만, 다행히 정신을 꼭 붙잡은 덕분에 실수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눈을 뜨니 고추… 아니, 남자 세 놈이 반기고 있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술을 먹고 취기에 정사랑과 실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다.
“예, 여기 순두부찌개 하나랑, 육개장, 불고기 덮밥 하나랑, 제육덮밥 하나요.”
영훈은 늘 그렇듯이 주문을 담당하여 음식점에 배달을 시켰다.
정훈은 힘겹게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거실에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문을 마친 영훈은 정훈이 있던 침대 속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만졌고, 승주는 컴퓨터 게임, 다원은 본인의 집에서 가져온 X-BOX 게임기를 TV에 연결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너네 뭐 하냐?”
예상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늘 이런 풍경이었으니까.
어차피 개인플레이를 할 거, 각자의 집에서 놀아도 되겠지만, 또 그러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한데 모여서 놀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넓은 집에 사는 승주의 집을 두고 정훈의 집에 모인 이유는 한 가지뿐. 다른 아이들이 기숙사에 살 때 제일 먼저 독립해서 자취를 시작한 게 정훈이었기에, 그때부터 모일 일이 있으면 늘 장소는 정훈의 집이었다.
이미 정훈도 해탈했기에 태클을 걸거나 싫어하진 않았다. 집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여기서 놀고먹을 때 쓰는 비용은 친구 셋이 부담하기 때문.
물론 한 발자국만 나가면 친구들이 쓴 만큼 정훈도 써야 한다.
“지금 몇 시냐?”
“11시.”
“아, 벌써?”
“너 어제 2시 넘어서 들어왔어. 뭔 놈의 술이 떡이 됐냐?”
7시부터 마시기 시작했으니 꽤나 거나하게 마셨다. 정사랑은 흑심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훈이 걱정되어 자고 가라고 했지만, 정훈은 강력한 의지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아우, 죽겠다.”
덕분에 떡이 된 술은 아직도 깨지 않고 두통을 유발했다.
“여자랑 술 마셨는데 대체 왜 집에 오냐?”
“그러니까 말이야. 저 새끼 고자라니까.”
“조심해라. 쟤 혹시 남자 좋아할지도 모른다.”
헛소리를 하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열었다. 다행히 누군가에게 전화하거나 실수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지혜와의 커피톡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5시. 점심에 약속을 잡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너희 어제 뭐 했냐?”
“술 먹었지.”
“뭐 따로 안 하고?”
“어. 우리가 옷 벗기 고스톱이라도 치길 바랐냐?”
다원의 말에 정훈은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 젠장. 상상했어.”
“크크크크큭. 어제 만난 여자는 어떻게 됐냐? 잘 안 된 거야?”
“아니, 잘됐어.”
“그럼 왜 안 자고 왔는데?”
“미친놈아, 첫 데이트에서 뭘 자고 와.”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그게 이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야.”
크리스마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주문한 음식들은 3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정훈은 포장을 뜯자마자 순두부찌개의 국물을 한 숟갈 호로록 들이켰다.
“으어.”
거북해서 슥슥 끓어오르던 속이 스르르 내려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속이 편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정훈은 국물을 몇 숟갈 더 먹은 뒤에 친구들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뭐 하냐?”
“뭐 할래?”
“눈싸움이나 할까?”
“놀이터 가서 애들한테 껴 달라고 해라.”
역시나 제각각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친구들이었다.
“할 거 없으니까 나 나간다.”
“또 어디 가?”
“어제 만난 여자랑 오늘도 데이트하냐?”
“아니, 오늘은 다른 여자.”
정훈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친구 3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몰렸다.
“뭘 봐?”
“이 새끼 미쳤네.”
“벌써부터 양다리냐?”
“부럽다.”
“허.”
허공에 손을 휘휘 저어 시선을 떨쳐 내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사귀지도 않는데 무슨 양다리야. 그냥 아는 사람 만나서 밥 먹기로 한 거야.”
“그게 데이트지.”
“너만 만나지 말고 소개도 좀 시켜 주고 같이 만나자.”
“그래,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희가 못 만나는 게 왜 내 탓이냐?”
“그건 그래.”
다원이 제일 빨리 수긍하며 불고기 덮밥을 떠먹었다.
지금 여자 친구가 없어서 그렇지, 말은 이렇게 하더라도 친구들은 여자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넷은 평화롭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편하게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
“야, 근데 오늘 만나는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이냐?”
“직업?”
“어.”
다원은 별생각 없이 흘리듯 물었다.
“검사.”
“검사라고?”
검사라는 말에 휴대폰을 하던 영훈도 벌떡 일어났다.
“야, 네가 검사를 어떻게 만나?”
“그냥 우연히.”
“근데 너 저번에도 검사 만나지 않았냐? 사장 딸이라던 그 여자.”
“검사 킬러냐?”
“아니, 그 사람이 오늘 만나는 사람인데?”
“뭐?!”
컴퓨터 게임을 하던 승주까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미친놈아. 사장 딸을 만나는데 이렇게 하고 간다고?”
“야, 왁스 어디 있어?”
“내 시계 차고 가. 이거면 너도 꿀리지 않아.”
그냥 평범하게 니트를 입고 코트를 걸치고 갈 생각이었지만, 무려 사장 딸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친구들이 나서서 패션 코디를 했다.
“아니, 나 그냥 이러고 가도 돼.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거야.”
“안 돼.”
다원은 화장실에서 왁스를 가져와 정훈의 머리를 넘기듯이 밀어 깔끔하고 멋지게 정리해 주었고, 영훈은 정훈의 코트를 벗기고 자신이 입고 온 코트를 입혔다. 이에 질세라 승주는 자신이 차고 온 시계를 정훈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말려도 소용없으리란 걸 알고 정훈은 포기하고 끝나길 기다렸다.
머리를 다 만진 다원이 휴대폰 카메라의 셀카 모드로 그의 모습을 비춰 주었다.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늘 차분한 머리만 하다가 힘을 주니, 왠지 모르게 자신도 기분이 업되었다.
“야, 근데 나 코트랑 시계는 어떻게 주냐? 나 오기 전에 너희가 먼저 갈 수도 있잖아.”
“우린 네 거 쓰면 되지.”
그럴 줄 알았다.
“간다.”
그래도 자신을 챙겨 주는 친구들로 인해 든든해진 정훈은 가볍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정훈을 발견한 한지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머리 세우고 오셨네요.”
“아, 이건 친구들이 갑자기….”
“가요.”
지혜는 정훈이 한 번도 머리 세운 걸 본 적이 없었기에, 왠지 자신을 만나느라 신경 쓴 것 같아 꽤나 만족스러웠다.
정식으로 만나는 건 근 세 달 만이기에 한지혜는 신경 써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예쁜 옷을 입고 나왔다.
원래도 미모가 우수한 편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귀고리까지 한 걸 본 정훈은 새삼스레 그녀가 예쁘다는 걸 깨달았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식사 장소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어제는 정사랑에게 비싼 점심을 얻어먹었고, 오늘은 한지혜에게 레스토랑에서 얻어먹게 생겼다. 이거 왠지 모르게 의자왕이 된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네. 한지혜 이름으로요.”
“예. 이쪽입니다.”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이 정도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면 보통 며칠 전에 예약을 해서는 안 될 텐데.’
그래도 사장 딸이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한지혜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먼저 운을 떼었다.
“저번에 도와주신 거 정식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서 뵙자고 했어요.”
“아, 별거 아닌데요, 뭐. 근데 목발 없이 괜찮으세요?”
“네.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이 풀지 말라고 해서 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렇군요. 얼른 나으셔야죠. 사장님이 끔찍이 아끼시잖아요.”
정훈의 미소에 한지혜도 화답하듯 웃었다.
“과하게 아끼시죠. 다 컸는데 말이에요. 저도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에이, 아직 1년 더 남으셨잖아요.”
“그렇죠. 아직은 한 발 남았죠.”
아저씨의 원빈 패러디를 하며 한지혜는 분위기를 풀었다.
혹시나 예전의 일 때문에 김 대리가 불편해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서로 언급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가 잘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언제쯤…?”
“아, 당분간은 연말 행사, 연초 행사 때문에 바쁘니까 1월 중순쯤에 한번 뵙자고 하셨어요.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르겠고요.”
“네. 확실하게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날짜는 비워 둘게요.”
“그래요.”
한지혜는 스테이크를 썰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열었다.
“아버지가 정훈 씨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신 것 같더라고요.”
“저를요?”
“네. 평소에 정훈 씨 상사분께서도 칭찬을 많이 하셨던 직원이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데 잘 봐 주신 거예요.”
“아닐걸요. 원래 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거든요. 장 부장님도 그렇고요.”
한지혜는 지나가는 말로 장 부장에 관한 이야기를 던졌지만, 정훈은 그걸 캐치했다.
“부장님을 아세요?”
“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뵈었으니까요. 옛날엔 삼촌이라고 불렀죠.”
역시 사장 딸이다. 보통 인맥이 아니라는 게 몇 마디만으로도 느껴졌다.
“아버지가 굉장히 믿으시는 분이라서 더 끌고 가려고 하셨는데, 당신이 출판사가 좋다며 거기로 가셨어요. 뭐, 까놓고 말하면 출판사 자체도 장 부장님 때문에 시작한 것이지만요.”
“정말요?”
“아마도 그럴걸요.”
정훈은 씹던 스테이크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장 부장이 회사에서 높은 위치와 큰 영향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원래 대학교 후배셨거든요. 어쨌든, 그래서 아버지가 정훈 씨 만나면 오라고 할지도 몰라요.”
“어디로요?”
“아버지 근처 아닐까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죠.”
한지혜는 무언가 깜빡한 듯, 포크를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저한테 잘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에요. 아버지는 사람이 당황하는 거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사장 딸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냥 흘려 넘길 정보는 아니었다.
‘그래도 설레발은 치지 말자.’
괜히 기대할 필요는 없다. 잘되면 모를까, 잘못되면 기대감을 품은 사람만 바보 되는 거니까.
사장 근처로 가는 건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올라가는 발판이 될 수도 있지만, 한순간에 추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한지혜 때문에 가는 건 아니겠지만, 그녀와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판부에서 일하던 자신이 가면, 거의 신입 사원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좋다고 사과를 삼켰다가 목에 걸리는 꼴이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천천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사장이 이야기한 건 아니고 추정일 뿐이지만, 정훈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졌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스테이크가 참 맛있네요.”
정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지혜는 고뇌하는 정훈이 혹시나 자신 때문에 그러는가 해서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아버지가 업무 관련해서 결정하실 때 절대 저는 개의치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공과 사는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이거든요.”
***
야심이라는 걸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요 직위까지 승승장구하며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없던 야망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것 때문에, 한지혜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척할 필요는 없다. 돈 때문에 사랑까지 팔 정도로 비굴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녀에 대한 호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전부터 예쁘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 지혜와는 10시가 되었을 무렵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정훈은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지혜 씨는 논외로 두고 생각해 보자.’
순수하게 자신이 경영팀이나 본사의 다른 업무에 투입되었을 때,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출판사에 남아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게 나을까.
맥주는 썼고, 고뇌와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