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27)
127 슈테인 후작
차링차링, 귀에서 늘어진 귀걸이가 맑게 소리 낸다.
이디스 공주는 시녀가 든 손거울에 시선을 주었다.
“공주님, 어떠십니까?”
이국으로 시집갈 때부터 줄곧 그녀의 곁을 지켜온 시녀가 뿌듯한 미소를 보였다.
어떠냐고 묻지만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얼굴이다.
이디스는 부풀려 보석을 얹은 머리에서부터 찬찬히 시선을 내렸다.
뽀얗게 분을 칠한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고, 눈썹은 굵게 시작해 실처럼 가느다랗게 끝난다.
눈가 옆에는 작은 애교점을 붙이고 입술은 그녀의 피부에 가장 잘 맞는 선홍색이었다.
한때는 입가에 애교점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지만, 요즘은 눈매를 강조하는 추세다.
시녀가 이디스의 시선에 맞춰 거울의 위치를 조금 조정했다.
가느다란 목에는 보석을 엮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녀의 소유는 아니고 어머니의 것이다.
오늘을 위해 빌려주셨다.
남편의 상을 당하고 첫 연회인지라 드레스는 그리 화려하지 않다.
가슴도 크게 열지 않은 채 레이스로 가리고, 드레스 자체도 나이 어린 여성의 것보다 보수적인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최고급의 원단을 사용하고 허리는 최대한 조여 상체와의 라인을 강조했다.
여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긴다.
이디스의 표정이 느슨해지자 시녀가 빙긋 웃었다.
“오늘은 특별히 아름다우십니다, 공주님. 분명히 그분도 보는 순간 공주님께 마음을 빼앗길 거예요.”
“글쎄… 그럴까.”
오늘은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는 연회.
남편 후보 중 한 명과 대면하는 날이다.
이디스의 남편 후보는 모두 세 명.
첫 번째는 이웃 나라의 귀족이다.
나이는 60대 초반이지만 아직 현역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후계자는 이미 정해져 있고 아들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디스가 혼인해 자식을 낳더라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그 남자는 나라에서 가장 권력 있는 귀족 중 하나고, 영지에서는 질 좋은 양모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그 가문과 연결되면 양모를 좋은 가격으로 들여올 수 있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걸 생각해 남편감 후보로 그를 선택한 것 같다.
이것도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황태자 오라버니에게 들었다.
순결하다 해도 이미 한 번 결혼한 적 있는 이디스에게는 무난한 혼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것이 걸렸다.
그와 혼인하고 몇 년 이내에 남자 구실을 못 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이미 그런지도 모르지.’
잘못하면 또다시 십 년, 이십 년의 수많은 밤을 혼자 지새워야 할지 모른다.
너무 끔찍해, 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두 번째 후보는 먼저 시집갔던 곳보다 훨씬 먼 나라의 왕이다.
이번에 새 왕비가 될 사람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이전의 왕비는 여덟 명.
모두 죽었다.
두 명은 출산하다, 다섯 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왕이 죽였다고 한다.
나머지 한 명은 시름시름 앓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었다고 들었다.
왕이 너무 포악해 마음의 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부인이 계속 죽어 나가자 더 이상은 그 나라에 공주를 보내려는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한번 결혼한 적 있는 이디스에게까지 이야기가 들어왔다.
‘그 사람한테만은 절대로 시집가고 싶지 않아.’
이전이라면 자신만만하게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왕은 비록 소문은 좋지 않지만 국력이나 부유함에서 월등하다.
외모도 좋다고 들었다.
다른 부인은 비참하게 되었어도 자신이라면 왕의 마음을 꽉 잡아 역대 왕비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은 그렇지만, 이디스는 아름답다.
아버지의 수많은 딸 중에서도 아름다움으로 한 손에 꼽혔다.
어떤 남자의 마음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늙은 왕과 혼인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가 반 이상 빠진 늙은 남편은 이제 막 꽃 피듯 아름다운 이디스에게 전혀 관심 없었다.
반평생 함께 했다는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고, 사십을 훨씬 넘은 애첩과 다정했다.
이디스에게도 차가운 남편은 아니었지만 불타는 애정이나 독점욕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잠시 머무는 귀빈을 대하는 듯했다.
왕의 애첩이나 왕자, 왕세자 역시 이디스에게 예의를 가지고 대했지만 왕과 마찬가지의 태도였다.
왕이 죽을 때까지 이디스는 그 나라에서 그저 손님처럼 지내다 돌아왔다.
순결한 채로.
꽃다운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이 모두 시든 나뭇잎처럼 지나갔다.
젊음과 외모는 분명 강점이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부인을 쉽게 죽이고 바꾸는 남자가 자신에게만은 다를 거라는 건 오만이다.
‘신중하게 골라야 해.’
먼저 같은 결혼은 싫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싫어.’
적어도 남편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나이는 되었으면 좋겠다.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말년에 적당한 생활이 된다는 보장이 있었으면 한다.
이디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마셨다.
세 번째 남편 후보는 발테르 공작의 손자로, 셋 중에서는 조건이 가장 좋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자식이 없고 젊으며 그 남자 자신이 강한 마법사다.
가문도 나무랄 데 없었다.
정부인은 아니지만 자식을 낳게 되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고, 그게 아니라도 마법사의 피다.
아버지는 태어날 아이를 왕족과 혼인시킬 예정인 것 같다.
이디스에게도 아이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의 부인은 사라문즈 공국의 공주다.
이디스와 비교하면 출신 면에서 떨어진다.
외모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문조차 없었던 여자라 하니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다.
기간도 길지 않으니 벌써 사랑이 깊어졌을 리도 없고, 사라문즈 공주의 나이가 다소 어리지만 이디스의 외모라면 승산이 있다.
아버지 역시 이 혼담을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종장이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히, 유혹해서라도 혼담을 성사시키면 좋겠다는 말을 해왔다.
시종장의 말은 아버지의 뜻.
세 개의 혼담 중에서 진짜는 세 번째라는 말이다.
“공주님, 이제 연회장으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시종이 연회 시작을 알리러 왔다.
이디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시녀가 몸을 아래로 떨어뜨려 절하며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께 정령의 행운 있기를….”
이디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너른 연회장은 왕과 왕세자 부부가 들어가자 일시에 조용해졌다.
이디스의 위치는 왕세자 부부 바로 뒤다.
아버지는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수고를 간단히 치하한 뒤 곧바로 이디스를 소개했다.
원래 수많은 공주 중 하나일 뿐으로, 늙은 왕에게 보내는 걸 주저하지 않을 정도의 관심밖에 가지지 않았던 딸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 말을 들어보면, 마치 사랑해 마지않는 딸을 눈물로 늙은 왕에게 보낸 것 같지 않은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줄줄 흘러나오는 거짓에 무심코 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디스는 재빨리 입가에 힘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린 나이라면 아버지의 이중적인 태도에 조금쯤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남편의 죽음까지 경험한 그녀다.
그런 것으로는 상처는커녕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잠시 이디스의 국가를 위한 희생에 대해 찬사가 이어지고,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고결함으로 나라를 위해 심신을 바친 우리 딸 이디스야.”
아버지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디스는 앞으로 나가 아버지 손등에 키스한 뒤 몸을 낮췄다.
“공주 이디스의 고결함은 우리 왕가가 국민을 위해 바치는 의무이며 명예이다. 아버지이기 전에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대의 헌신에 감사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디스가 공손히 절하자,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옆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보다 한 칸 아래에 이디스가 서자,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발테르 공작가의 라파 커트 마르쿠스 플로리안 파블로는 앞으로 나오라!”
사람들이 길을 비키고, 약간 떨어진 곳에 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큰 것 같다.
그 남자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이디스의 눈이 커졌다.
‘저 여자가 사라문즈 공국의….’
이디스는 이 나라뿐 아니라 시집간 나라에서 여러 해 머물렀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미녀를 많이 보았다.
이디스도 아름답지만, 이 세상에는 그녀보다 뛰어난 미모의 여성도 분명히 있다.
이디스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성도 적지만 있었다.
하지만 저만큼 아름다운 여성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문득 남자가 여성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가 작게 미소 지었다.
단지 겉으로만 웃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남자와 감정이 오가는 미소였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비슷할 거다.
여자의 반응만 봐도 알겠다.
‘이건 무리야.’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했다.
이대로 혼인해 봤자 들러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앞으로 나오는 남자를 보면서, 이디스는 마음속으로 저울질했다.
60대 초반의 남자와 절세 미녀를 부인으로 둔 젊은 남자.
어느 쪽이 행복으로 이어질까.
‘하아.’
이디스는 속으로 한숨 쉰 뒤 마음을 정했다.
‘첫 번째가 나아.’
60대 초반의 남자라면 적어도 사랑받아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녀보다 훨씬 일찍 죽을 거다.
혼인할 때 다소의 지참금은 가져가는 데다, 재혼이라고는 해도 한 나라의 공주와 혼인하는 것이다.
저쪽에서도 다소의 연금은 남겨줄 거다.
“….”
첫 번째 결혼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원래 거역한다는 발상도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한 번 혼인해 본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
아버지의 뜻이 어떻든 행복해지고 싶어.
또다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정 안 되면 세 번째 혼인을 노려야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두 번째 혼인 뒤에는 저쪽 나라에 남자.
적어도 다시 딸을 결혼시키려는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그다음 인생은 스스로 선택하는 거다.
‘아버지는 굉장히 화내실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결정하자 가뿐해졌다.
이디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
연회장에 오기 전까지는 조금 걱정했다.
정령인이 처음 만나면 각자의 정령이 서로 부딪힌다.
상대가 불의 정령이면 불과 바람이 함께 어울려 난리가 난다.
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정령이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이미 적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괜찮지만, 왕이나 왕세자를 처음 만나면 정령끼리 맞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왕에게 마법으로 덤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자, 대답은 간단했다.
[제어해라. 그동안 연습했을 것이다. 그대로 하면 돼. 내가 너를 만났을 때는 너무 흥분해서 제어가 되지 않았다. 네 힘이 너무 강해 내 정령이 소란스러웠던 탓도 있겠지. 경계한 거야. 하지만 왕의 힘은 강하지 않다. 네가 제어하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거다.]정령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인간도 어떤 사람은 힘이 강하고 어떤 이는 약한 것처럼, 정령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왕가에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할아버지는 왕가의 정령인 숫자가 지나치게 줄어든 탓일 거라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 몇 대 전부터 왕가의 피가 옅어진 것 같다고.
할아버지의 추측으로는 현재 왕가의 정령인은 국왕 한 명뿐이다.
왕세자는 보라색 눈동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처음 왕세자와 할아버지가 만나는 자리에 국왕이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령인이 아닌 걸 국왕의 정령으로 속이려고 했던 것 같다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지만 할아버지는 확신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만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 걱정했다.
왕과 왕세자가 모두 정령인이면 약하더라도 일단 두 배가 된다.
나와 만났을 때 반응해 연회장이 엉망진창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건 좀 맥 빠지는걸.’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다.
국왕이 연회장으로 들어올 때 참을 인(忍) 자를 수십 번 정도 외우고 있었지만, 그렇다 쳐도 너무 잠잠하다.
아주 조금 공기의 떨림이 느껴진 정도였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제어했어도 반응이 너무 없는 게 아닐까.
‘할아버지 말씀이 맞을까.’
왕의 나이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 뒤에 선 채 가만히 국왕과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왕이 별별 수를 다 쓰며 정령인을 얻으려 한다고 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디스 공주를 치하하고 나자 내 이름이 불렸다.
[라파 커트 마르쿠스 플로리안 파블로.]그게 내 이름인 모양이다.
처음 알았다.
설마 숲에서 나오기 전부터 이런 이름은 아니었을 테고, 아마 내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 정해진 걸 거다.
어쩌면 라파라는 것만 아버지가 정하고, 나머지는 관례라든가, 공작가 내부의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한데 길다.
엄청나게 길구나.
외우기도 어려울 것 같다.
왕 앞에 나가 서자 시종이 내가 한 업적을 줄줄이 읊는다.
요약하면 드래곤과 식인개미로부터 한 도시를 구한 용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몰랐지만 부상을 주는 모양이다.
국왕이 간단하게 칭찬한 뒤, 시종이 보석 박힌 커다란 칼을 가져와 내밀었다.
내 무기는 칼이 아니라 도끼인데.
어쨌든 주니까 받는다.
그 뒤는 곧바로 댄스가 이어졌다.
새해 연회에서는 국왕한테 각 귀족이 작위 높은 순서대로 인사하는 시간이 있는 모양인데, 오늘은 그런 것 없이 곧바로 연회가 시작된다고 들었다.
다만 시종의 동작이 조금 이상하다.
칼을 받고 물러나려 하자 몇 명이 뒤쪽에 서 있어서 어중간하게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손을 잡고 먼저 홀로 나가고, 왕세자 부부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디스 공주의 차례다.
‘아하.’
이디스 공주에게는 파트너가 없다.
누군가가 그녀를 에스코트해 홀로 나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바로 내가 서 있었다.
나한테 에스코트하라는 모양이다.
나는 살짝 바람을 손에 둘러 살짝 뒤로 보냈다.
내 뒤를 막고 있던 시종의 몸이 바람에 훌쩍 밀린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시종이 숨을 들이마시며 휘청했다.
넘어질 뻔 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얼른 잡아준다.
그 틈에 나는 몸을 빼내 타티아나의 곁으로 돌아갔다.
혼자 서 있는 공주한테는 미안하지만 나 유부남이잖니.
괜한 오해를 사서 부부 사이가 나빠지면 곤란하다.
내가 타티아나의 옆으로 가자,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른 귀족과 이야기 나누던 할아버지가 빙긋 웃는다.
내 모습을 계속 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문득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술잔을 쥔 손가락이 살짝 움직여 한 방향을 가리킨다.
시선을 돌리자, 멧돼지를 인간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남자가 사람들 물결 너머에 서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소리 없이 입술만으로 말했다.
‘슈테인 후작.’
오, 저 멧돼지가 바로 그놈인가.
나도 모르게 미소 짓는데 멧돼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