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57)
057 그 불사조가 그 불사조가 아니었나
파울은 귀족이라 그런지 표정 만드는 것이 능숙하다.
가끔은 웃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섬뜩해진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아버지가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귀족은 웃는 얼굴로 상대방 심장에 칼을 꽂는다고.
“….”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옆에서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
칼을 빼는 순간 죽여버리면 됩니다, 라고.
‘아버지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나와 아버지가 종종 아레논 왕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원래는 공용어밖에 하지 못했던 어머니도 어느 정도는 그 언어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비유적인 말이 나오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마 단어 그대로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전생을 기억하기 전이라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알겠어, 엄마, 그놈이 빼기 전에 죽일게.
흠, 어릴 때라고는 해도 나는 단순하고 바보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라파와 섞이면서 나는 지능이 좀 낮아졌달까, 단순해졌다고 할까, 전생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혼이라는 게 어쩌면 단 하나로 이루어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환생한 뒤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인간의 혼이라는 건 윤회 속에서 모인 작은 조각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게 아닌가 라고.
라파로 태어난 나는 전생의 나와 완전히 같은 혼이 아니라, 같지만 조금은 다른 사람이다.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파울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 그리고 드래곤 토벌과 관련하여 몇 군데에서 돈이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이번 식인개미를 퇴치한 공로의 보상도 의논해야 하므로, 오늘 저녁 저택에 와 주셨으면 합니다.”
아,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물론 타티아나 양도 함께 와주세요. 두 분이 파티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번 도시를 지켜낸 영웅이니까요.”
파울이 빙그레 웃는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의뢰 때문에 떠나야 합니다. 드래곤 대금은 길드 쪽에 입금해 주세요. 그리고 식인개미 퇴치에 의한 보상은 괜찮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까요.”
싹둑 자르는 것처럼 말하자, 파울이 보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속으로는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조금 곤란하다고 할까… 보상은 제대로 내야 합니다. 저희 영지에서는 그런 건 확실하게 하고 있죠. 은근슬쩍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다른 곳과는 다릅니다.”
흠, 보상이나 뒤처리가 제대로 된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중요한 건가.
적어도 보상을 했다는 눈가림 같은 것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면야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타티아나한테도 수입이 생기는 거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면 보상은 돈으로 부탁합니다. 길드로 입금해 주세요.”
한순간 말이 막힌 듯 파울이 나를 보았다.
하지만 보살 같은 미소는 여전히 얼굴에 걸려있다.
정말 귀족 대단하다.
어떻게 미소 띤 얼굴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지.
나 같으면 벌써 예전에 얼굴이 경련했을 거다.
파울이 어딘지 모르게 짜내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그… 그런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라파 씨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우리 쪽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게 뭔지, 혹은 타티아나 양이 따로 바라는 일이 있는지, 제대로 의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초대하고 싶은 모양이다.
역시 그냥 보상만 의논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아.
귀찮은 냄새가 난다.
“미안합니다. 드래곤 토벌 일이 소문 났는지, 그 뒤의 일도 이미 정해져 있어서요. 몇 달 정도 뒤라면 모를까, 당분간은 시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파울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실망한 것 같다.
“… 그러면 일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는 꼭 한 번 우리 저택에 방문해 주세요.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예, 기회가 되면.”
뒤돌아서는 파울의 어깨가 조금 처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멀어지자 타티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곤거렸다.
“우리 그렇게 일이 밀려 있었어요?”
“아니. 마법사한테 맡길 만한 일이 없다고 해서 아직 한 건도 없어. 계속 함께 있었으니 알잖아.”
“… 그렇죠.”
타티아나가 작게 한숨 쉬었다.
드래곤 학살자니 마법사 파티니, 영웅이니, 그런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오히려 의뢰받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우리 몸값이 너무 비싸진 거다.
적당한 일이 없었다.
파울도 대강은 눈치챘겠지.
내가 거짓말했다는 거.
“아, 그런데.”
내가 고개를 돌리자, 타티아나가 고개를 한껏 올려 나를 보았다.
“혹시 불사조 새끼한테 뭘 먹여야 하는지 알아?”
“음… 갑자기 왜요?”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난번에 이 녀석이 여왕개미를 먹고 연기 같은 걸 뿜은 것 같거든. 정확하게 본 건 아니지만. 지금은 고기를 주로 먹이는데, 혹시 살아있는 마수를 먹여야 하는가 싶어서.”
“잘 모르겠어요. 불사조가 마물을 먹는 건 아는데, 새끼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한숨 쉬었다.
렐라는 벌레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여전히 작다.
“근데 불사조는 언제쯤 되어야 몸이 클까?”
내가 어릴 때 불사조 어미가 죽었다면, 렐라는 몇 년째 저렇게 작은 채다.
내가 죽기 전에는 성체가 되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싶어 물어보자 타티아나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닭보다 조금 느리다고 들었으니까 일 년에서 이년 정도면 몸이 다 크지 않을까요?”
“… 뭐라구?”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아니, 기다려라, 기다려.
렐라 어미가 죽은 건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의 일일 것이다.
내가 곰과 싸웠을 때 어머니가 불사조의 깃털을 구해왔으니까.
한데… 일, 이 년이면 불사조가 다 큰단 말이야?
“설마….”
나는 렐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렐라는 어미가 죽어서 혼자 있었던 게 아닌가?
그 불사조가 아니었어?
혹시 아버지가 말한 대로 어머니는 그저 깃털만 가져온 거였나.
‘그, 그렇다면…. 가만 놔뒀다면 어미가 찾아낼 가능성이 있었는데 내가 납치한 셈이 되는 건가.’
아, 이런 어쩌지.
*
아버지의 명령에 가까운 말을 들은 뒤, 리라는 곧바로 오라버니에게 달려갔다.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야만인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울면서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울고불고 날뛰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평상시에는 그녀에게 항상 눈썹을 찌푸리던 어머니도 이건 너무하다고 아버지에게 말해준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 리라는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리라가 싫다고 울면 언제나 마지막에는 의견을 굽혀주던 아버지가 그녀를 벌방에 가둬버렸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는 내주지 않았다.
갇혀 있는 동안은 식사도 빵과 스튜뿐.
그나마도 싫다고 말하자마자 밖으로 가져가 버렸다.
리라 주변에서 온갖 고집과 응석을 받아주던 시녀도 없어졌다.
시종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집사장에게 그녀를 체벌하는 권한이 내려져, 물건을 던지거나 시녀와 시종을 때리면 방에 갇히게 되었다.
아, 이번엔 정말로 다르구나, 깨닫고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시녀가 하는 대로 화장을 받고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오늘 만찬에 야만인이 초대된다고 들었다.
보통은 한참 전에 초대장이 나가고 상대와 이쪽의 준비가 이뤄지지만, 상대가 야만인이라 그런지 당일 아침까지도 초대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초대하는 측에서는 당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며칠 전부터 요리장은 식재료를 마련해 오늘에 대비하고, 꽃과 장식품 등이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되었다.
만찬 자리는 그녀가 야만인과, 오라버니와 여자 마법사와 앉도록 배치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야만인과의 혼담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자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리라의 아군은 없다.
이대로 야만인한테 넘겨진다.
분노와 굴욕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으며 리라는 입술을 씹었다.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분노를 부딪칠 곳이 없다.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시녀가 그녀의 코르셋을 꽉꽉 조였다.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조여져 진짜로 숨이 막힐 것 같다.
갈 곳 없는 살이 뼈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봐, 너무 조이지 않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녀가 조용히 말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힘은 억세다.
어쩌면 평소의 울분을 푸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홱 몸을 돌려 노려보는데, 전언이 온 모양이다.
야만인이 도착한 걸까.
저절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잠시 뒤 들어온 시녀의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가씨, 오늘의 만찬은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뭐?”
야만인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보다 먼저 닥친 건 불쾌감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무슨 말?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아니 어떤 사정이어도, 귀족 집안의 아가씨와 얼굴을 맞대는 만찬에 참석하지 못한다니, 그게 말이 돼?
게다가 또다시 그자를 만나기 위해 똑같은 준비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
‘기분 나빠.’
어째서 귀족인 그녀가 야만인을 위해 두 번이나 이런 귀찮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싫은 일이 더욱 끔찍하게 싫어진다.
리라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파울을 찾아갔다.
아버지한테 가서 이런 무례는 용서할 수 없지 않느냐, 혼담은 그만두자고 호소하면 좋겠지만, 아버지한테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는 건 차기 백작인 오라버니뿐이다.
오라버니의 말이라면 아버지도 귀를 기울일 테니까.
연락은 하지 않았다.
원래는 미리 시종을 통해 약속을 잡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라버니는 만나 주지 않는다.
요 며칠간 몸서리칠 만큼 잘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 방 앞으로 갔지만 시종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문 열어! 감히 시종 주제에!”
자신의 목소리가 찢어져 복도로 울리는 것이 들렸다.
이러면 다시 벌방에 갇힌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묵묵히 있는 시종의 얼굴을 보니 참을 수 없었다.
“당장 열지 못해?”
부채로 막 시종을 때리려는데 안쪽에서 소리가 울렸다.
“들여보내.”
오라버니다.
그녀의 말에는 미동도 않던 시종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게 더 미워서, 리라는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시종한테 던졌다.
시종을 한 번 노려본 뒤 안으로 들어가자, 오라버니가 지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리라,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그 야만인은 너무 무례해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감히 만찬 시간에 오지 못하다니. 그런 사람과 혼담은…. 오라버니는 기분 나쁘지도 않으세요? 그런 사람에게 리라를 보내실 건가요?”
“리라.”
“너무 하세요. 그런 사람한테 리라를 보내면… 이 리라는….”
야만인이 그녀를 탐하는 모습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자, 오라버니가 더욱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강 알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사람은 우리 가문이나 너에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니까. 이번 혼담도… 아버지는 너한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몰라도, 그 사람은 싫어할 거야. 우리가 혼담을 내놓으면 대놓고 거절할 정도로.”
“뭐… 뭐라구요? 오라버니, 리라는.”
“너는 네가 대단하다는 환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같지만, 그 남자는 정말로 너한테 관심이 없어. 너의 마법사 소질이나 가문은 그 남자한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네 외모까지도. 너보다 더 예쁜 여자가 옆에 있으니, 만일 끌린다면 그 여자한테 마음이 가겠지.”
“….”
아마 지금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을 거다.
오라버니가 조금 안 됐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는 아마 네 자존심이 너무 상하지 않도록 말했을 테지만, 리라, 네가 그 남자의 마음을 끌지 못하면 분가에서 더 아름다운 아이를 양녀로 받아 그에게 내밀 생각이다.”
“그, 그런….”
“그럴 경우에는 지금 그 사람 옆에 있는 마법사보다 조금이라도 어리거나 조건이 좋은 여자를 선택하겠지. 실패하지 않도록. 그 남자는 그 정도로 우리에게 가치가 있어.”
“….”
어떻게 자기 방으로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다.
오라버니의 말이 머리를 쿵쿵 친다.
‘내가 그 야만인 따위의 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아버지는 혼담 진행하기에 앞서 야만인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게 어렵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연히 만나면 야만인이 자신을 원해 마지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야만인보다도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리라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리라는 가만히 앉은 채 그날 밤을 지냈다.
눈물이 너무 쏟아져 눈이 짓무를 지경이었다.
평생 울 걸 한 번에 다 몰아서 운 것 같다.
눈물이 그친 건 새벽이 되어 동이 틀 무렵이었다.
희미한 빛이 창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리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보여주겠어.’
그 야만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땅에 엎드려 비는 장면을 아버지에게,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반드시 보여준다.
‘내게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