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95)
095 처벌
웨즈나 곁에서 돌봐주는 이는 처음 베일을 씌워 주었던 메디즈로, 봄바람 같은 여성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럽고 따뜻하다.
어딘가 불편한 곳은 없는지, 바라는 건 무엇인지, 항상 부드럽게 확인하고 돌본다.
가벼운 기침 하나에도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보고 의사를 불러 확인했다.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진짜 걱정한다고 느꼈다.
중년 정도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다.
할머니예요, 라며 웃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문득 공왕비와 비교하게 된다.
분명 비슷한 나이에 비슷하게 젊은 외모인데 어쩌면 이토록 분위기가 다를까 하고.
매디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그녀를 속이고 있어, 그 덕분에 친절을 받고 있는 거다.
웨즈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매디즈는 이 작은 정원보다 다른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웨즈나는 이곳이 좋다.
사라문즈의 별궁에 있을 때 매일 걸음 했던 자신의 정원을 닮았다.
꽃이 져 황량해진 겨울 정원은 마치 신에게 버려진 것 같다.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하아….’
하얗게 뿜어나는 숨을 뱉으면서 웨즈나는 하늘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너무 친절합니다.
매디즈도, 집사장도, 웨즈나의 방에 들르는 사람들 모두,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이 될 라파님까지.
자신은 원래 그럴 신분이 아닌데.
하다못해 공국이 공작가에 제대로 된 예의를 보내면 그나마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웨즈나가 가짜이기 때문에 덩달아 공작가까지 모욕 받는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을 받을 때마다 죄책감에 마음이 비명 질렀다.
“….”
적어도 공국의 공주로 출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출발할 때 최소한의 물건은 갖췄다.
커다란 궤짝으로 세 개.
준비한 것은 공왕비와 시녀들이다.
무엇이 들었는지 웨즈나는 보지 못했다.
공작가에 도착한 뒤에 알았다.
매디즈의 지휘 아래 궤짝에 있는 물건이 모두 꺼내졌다.
궤짝 안에는 화려한 옷과 거기에 맞는 신발,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하지만 세상모르는 웨즈나도 그게 겉모양만 갖춘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분명 고급이었지만 유행이 한참 지난 옷과 장신구뿐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사라문즈로 시집올 때 갖췄던 물건을 골라 넣었던 걸 거다.
못 쓰는 물건의 재활용이다.
공작가 시녀들이 옷과 장식품을 하나하나 꺼내 제대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웨즈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차라리 보내지 않은 것이 나았을 것이다.
옷과 신발은 모두 웨즈나에게 맞지 않는 사이즈였다.
하지만 매디즈는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모두 고급품입니다. 필시 공왕비께서 오래전부터 공주님의 혼례를 기대하며 준비한 것이겠지요.”
웨즈나가 어렸을 때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을 거라고, 그러니 사이즈가 맞지 않는 거라고 은근히 흘려준다.
매디즈는 아마 귀족 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의 시녀 대부분은 미혼의 귀족 자녀이고, 정말 높은 신분의 귀족 가문에는 낮은 가문의 부인이 시녀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행동의 우아함과 말투를 보면, 그래, 매디즈는 분명 귀족의 부인이다.
웨즈나 같은 가짜 공주를 섬길 신분이 아니다.
차라리 매디즈가 비웃어주면, 이 저택의 사람들 시선에서 차가움을 본다면 양심의 가책은 덜 했을지 모를 텐데.
매디즈가 친절할수록 웨즈나의 양심은 점점 더 심하게 상처 입어 불편해졌다.
죄송해서 쪼그라든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남편이 될 라파님이다.
처음에는 그저 무섭게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을 거듭해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외모와 달리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하루에 한 번 차를 함께 하고,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준다.
몇 번이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얼굴은 무섭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잘 말하지 못하는 웨즈나가 질문에 답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고, 끈기 있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느린 웨즈나를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았다.
눈을 내린 채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 남자는 다정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몸을 태우는 연인이나 부부는 되지 못해도, 아마 그와 함께라면 조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까.
웨즈나라도 행복해질 수 있나.
‘아니….’
이 사람들이 부드럽고 친절하면 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마 웨즈나의 마음은 비명을 지를 거다.
언제 들통날까 두렵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마음을 눌러 숨도 쉬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는 분명 진실이 드러날 거다.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이 행복해질 리 없다.
어떤 게 계기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요즘의 버릇이다.
신분을 들키면, 혹시 고문당하게 되면,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웨즈나는 반지에 손가락을 대고 언제든 열 수 있게 만지작거렸다.
적어도 이게 있으면 고통스러운 죽음은 피할 수 있다.
공왕비에게 그런 뜻은 없었겠지만 이것만큼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날이 추운데 여기 있습니까.”
갑자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라파였다.
당황해서 몸을 내려 인사하자, 라파가 손을 내밀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얼굴이 하얗게 되었어요.”
두툼한 손이 그녀를 기다린다.
손가락을 얹자 그의 체온이 이쪽에 옮겨졌다.
손가락에 열이 닿으면서 겨우 자신의 몸이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몰랐던 추위가 몸을 덮친다.
‘이 체온에 닿는 것이 죄책감 없는… 진짜 공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일이다.
마음에서 추악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웨즈나는 마음을 씹어 죽이며 조용히 걸었다.
긴 복도를 지나 방에 도착하자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는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라파가 그녀를 의자로 인도한 뒤 자신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리아나 공주는 정원을 좋아하네요.”
“그… 친가에 있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말하는 건 서투르다.
다른 사람과 접한 경험이 너무 적었다.
당연히 남자와 말해본 적도 없다.
공왕을 빼면 라파와 말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마 시녀 두 명과만 계속 생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둘과 연습할 때는 곧잘 했지만 현실은 이렇다.
이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너무 긴장해서 배가 아프다.
자연스럽게 라파가 물었다.
“공주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밑으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라파의 눈을 본 뒤에야 자신이 받은 질문이 어떤 뜻인지 알았다.
그는 웨즈나에게 진짜 이름을 물었다.
‘이 사람은…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친 건 고문당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웨즈나는 자기도 모르게 반지 뚜껑을 열었다.
재빨리 입에 하얀 가루를 털어 넣는다.
그랬다고 생각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라파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움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언제 여기에?
테이블 너머에 있던 라파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안 돼.
약을… 독약을 먹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녀를 잡은 라파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다른 손에 하얀 가루가 약간 묻었다.
“역시 독이었나.”
그녀의 눈을 보면서 라파가 중얼거렸다.
이 사람, 알고 있었구나.
언제 알았던 걸까.
입술부터 팔다리 끝까지,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 방에 들어와 있었는지 집사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물건은 제가 맡겠습니다.”
집사장이 웨즈나의 손에서 반지를 빼고 라파의 손에 묻은 독을 세세히 털어냈다.
웨즈나의 몸에 붙은 하얀 가루도 모두 제거한 뒤에야 집사장이 물러났다.
“공주, 진정해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나쁘게는 하지 않아요.”
라파는 웨즈나와 시선을 맞춘 뒤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았다.
고문당할 거라는 생각에 라파의 말이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웨즈나의 몸은 고장 난 마차처럼 덜컹덜컹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공주를 테스트해 보았다.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걸 알아야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공주가 조금만 더 침착하게 행동했다면 더 자유로운 삶을 준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내가 보고 있는 가운데 비밀로 해야 할 반지를 열고 독을 꺼냈다.
이런 성격이라면 누군가의 감시 없이는 놔줄 수 없다.
그녀에게 가능한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평생 나올 수 없는 엄격한 수도원에 가든지, 아니면 누군가의 아내나 측실이 되어 집안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살다 죽던지.
귀족의 집으로 보낸다면 측실이다.
정부인의 경우에는 사교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녀를 귀족사회에 노출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수도원과 평민의 아내를 제안했다.
평민이라고 해도 공작가와 인연 있는 집이다.
가난한 삶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공주에게 묻자,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저, 저에 대한 처벌과 고문은….”
독을 먹으려고 한 건 그래서였는지.
공왕과 공왕비가 어떤 식으로 겁을 주었는지 대강 알겠다.
“아니, 고문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처벌도 없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공주로 계속 살지 못하는 게 처벌일까요.”
내 말에 공주의 몸이 쓰러질 것처럼 크게 내려앉았다.
안심한 모양이다.
잠시 동안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파님… 미안해요….”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한다.
그나저나 이 세상, 역시 고문 같은 게 있었어.
공주가 저렇게 두려워하는 걸 보면 직접 고문 기구를 봤을 가능성도 있다.
‘의외로 이 세상은 무섭네.’
그런 곳에서 강하게 태어난 나는 분명 행운아일 것이다.
예쁜 아내도 얻었고.
비록 쓸데없이 사고 치는 새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분명 복 받은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공주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지만 그녀는 끝내 두 가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다.
만일 수도원이 마음에 있었다면 곧바로 말했을 것이다.
그걸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진짜 바람은 누군가와 행복해지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도 말하지 못하는 건 나와 공작가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데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혹은 수도원 이외를 바라는 것 자체가 파렴치하다는 생각 때문일 거다.
‘그럼 정해졌군.’
내가 정해도 될 미래를 그녀에게 선택하게 한 건 마지막 시험.
그녀가 정말로 내가 생각한 대로의 사람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랄까.
그녀는 제시된 길에 스스로의 욕망을 밀어붙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 자라면 이렇게 되는 걸까.
그녀가 불쌍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평민의 아내가 되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 뒤 말했다.
“공주, 마지막으로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공주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대답했다.
“웨즈나… 웨즈나라고 합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습관처럼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은 채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웨즈나,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 누구나. 당신도 마찬가지. 행복을 바라도 됩니다. 그러니 악을 쓰고 행복해지세요.”
“…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쭉쭉 흘렸다.
방을 나가는 내 등 뒤로 그녀의 작은 소리가 들렸다.
“… 제 이름을 물어봐 준 것은 라파 님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밤 웨즈나는 아무도 모르게 공작가 저택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