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
2회
“아씨, 영감마님께서 퇴청하셨습니다.”
제가 보았던 별들에 관해 말하고 싶어 아비의 퇴청을 기다렸던 윤설은 서둘러 신을 신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엉뚱한 상상력까지 발설할 순 없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마음속, 소망을 알아준 아비가 딸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윤설은 못내 흐뭇해진 마음을 안은 채 걸음을 재촉했고 이윽고 안채에 당도했다.
“아…버……”
제가 온 것을 아뢰려고 입을 열었던 윤설이 멈칫했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귀에 익은 음성들이 스르륵 새어나오고 있었다.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게서 피어나는 한숨과 탄식이 낯설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뿐이었다.
한동안 걱정거리 없이 편안한 나날들이었다.
아비는 조정에서 신임이 두터웠고 이번 청나라 방문 후엔 더욱 밝은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은 어린 딸의 눈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돌아가려던 윤설의 귓가에 다시금 어미의 한숨이 흘러들었다.
“영감, 곧 금혼령이 내려진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금혼령?’
조선 팔도에 혼인을 금하는 명은 오직 임금만이 내릴 수 있었다.
왕실에 혼인을 앞둔 존재가 있다면 으레 금혼령을 내려 가장 좋은 배필을 간택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자빈을 들이시는 것도 아니고…. 옹주의 부마를 들이시는 것도 아니고……이상하네?’
“혹여 우리도 간택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네? 영감, 뭐라고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대답을 기다리는 부인의 간절함에 기나긴 한숨을 내뱉던 윤설의 아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처녀 단자를 내야할 것 같소.”
“예에?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상 전하의 계비를 간택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처녀들의 정해진 연령이 있을 터……. 우리 설이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 전하의 연세를 고려하여 스물까지 포함시키라는 하명을 직접 내리셨다고 하오.”
“그런 하명을 하셨다면……. 설마…. 서, 설마……..”
어미의 절망이 문턱을 넘어 밖으로 흘러나왔다.
무언가를 직감한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아비가 가만히 대꾸했다.
“부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우리 설이를 늦도록 혼인시키지 않은 것은 그 아이가 우리의 기쁨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오. 하아…… 내 심정 역시 찢어지기는 매한가지이나 역부족임을 느꼈소.”
“아니 됩니다. 절대로 그리 보낼 순 없습니다.”
“…… 이미 조정에서도….. 문중에서도 우리 가문이 다시금 광영을 보아야 할 것이라 결단을 내렸다 하오.”
“왜 하필 우리 윤설입니까! 안동 김 씨 가문에 어디 다른 딸은 없답니까!”
“왕실에서도 우리 아이를 주시한 것 같구려. 어쩌면…… 간택령이란….. 그저 허울뿐인 지도 모르겠소. 그분들이 원한다면 어찌하겠소.”
제 처소로 돌아온 윤설은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보료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한기가 여린 몸뚱이를 휘감아 버리자 그녀가 제 손으로 팔을 감싸 안았다.
어미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은 곧 그녀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고 있었다.
임금의 나이 예순하고도 여섯이었다.
정비의 죽음 이후, 나이가 많음을 들어 계비 맞이하기를 극구 사양했던 그는 끝내 신료들의 주청을 이기지 못했다.
중전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불안히 여기는 충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설은 상관없다고 여겼던 일에 자신이 연루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아버지께선 허울뿐인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그분들이 나를 점찍으신 걸까? 그, 그럼….. 내가 주, 중전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머릿속만 하얬던 윤설의 안색이 덩달아 하얗게 변해갔다.
예순 여섯의 임금을 지아비로 둔 자신을 상상한 후의 변화였다.
아비보다 훨씬 많은 나이는 제 할아비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윤설은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았지만 현실로 닥칠 것을 생각하면 어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왕비의 소망을 가지고 이제껏 때를 기다렸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윤설에겐 그런 꿈이 전혀 없었다.
국모에 대한 마음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권력이니 술수니 하는 것들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었고 부와 명예 역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중전은커녕 대궐의 돌멩이에도 관심이 없는 소녀에게 유일한 소망이라면 그것은 천문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장래에 대한 상상, 그뿐이었다.
그런 것들을 받아주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내라면 또 몰랐다.
하지만 예순 여섯의 임금은 강직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더군다나 망원경을 깨뜨린 것으로 보아 윤설의 마음에서 매우 먼 인물이 분명했다.
게다가 구중궁궐의 삶이 풍전등화와도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언제 어느 때 멸문지화를 당할는지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실과 조정 그리고 가문이 민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이미 확정되었다면 거부할 수 있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진저리를 치던 윤설이 힘을 잃더니 보료 위로 스르륵 쓰러졌다.
어두웠다.
몸이 들리는 것도 같고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뜰 순 없었다. 아니, 떠지지 않았다.
윤설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듯 일렁이는 제 몸뚱이를 어찌해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무서워요. 움직일 수가 없어요.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한참 동안 암흑 속에서 유영하던 윤설은 제 몸 위로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다.
‘뭐, 뭐지? 추워……. 너무나 추워…..’
어느 순간, 축축한 무언가가 여린 뺨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하지만 윤설을 완전히 깨운 것은 바로 번쩍이는 무엇과 대단한 굉음이었다.
굳어버린 것만 같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살아났다는 안도는 잠시일 뿐, 몸을 일으킨 그녀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빵빵-
“아, 시끄러. 어떤 인간이 또 경적을 울리고 난리야? 으휴, 진짜 매너하고는…. 이 언니가 공부 좀 하겠다는데 이렇게 방해를 하시겠다?”
편의점 계산대를 지키며 책을 읽던 여자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통유리 너머의 풍경이 평소와 같지 않자 그녀가 기어이 낡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어가 유리문을 연 여자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앗, 차가워. 갑자기 웬 비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귓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몇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뭐지?”
그들 속을 비집고 들어간 여자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지고 말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는 고운 한복 차림에 댕기머리를 드리운 채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고아한 차림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은 초췌했고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파래진 입술은 덜덜 떨기까지 했다.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편의점 여자를 응시했다.
한없이 놀란 눈빛과 한없이 두려운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찰나였다.
“세상에나…. 노숙자인가?”
“풉….. 요즘 노숙자는 한복도 입네? 코스프레인가 봐?”
“어서 찍자. SNS에 올리면 대박 나겠어. 크큭……”
둘러선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손에 든 스마트폰을 연신 움직이자 편의점 여자가 두 팔을 대자로 뻗은 채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것들 보세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대뜸 날선 음성이 날아들자 사람들이 미간을 찡그렸다.
“뭐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아니, 사람이 지금 이 지경인데 그깟 사진이 대수에요? 실종된 시민 정신들 하고는…..”
“아니, 뭐에요? 말 다했어요? 쳇,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몇 몇이 투박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편의점 여자가 그들보다 더 대담한 얼굴로 소리를 꽥 질렀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쓰러져가는 사람을 봤으면 119에 신고부터 하는 게 도리지. 그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닌가요? 지금 당장 이분 사진 다 삭제해요! 혹시라도 SNS에 올리거나 하면 알죠? 이거 명백히 초상권 침해라는 거? 게다가 인권 침해의 소지도 있거든요? 자, 빨리 안 지워요?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편의점 여자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제 스마트폰을 꺼내 그들 앞에 쑤욱 내밀었다.
“자아, 동영상 촬영 하니까 이거 증거 자료 삼을 거예요. 다들 아셨죠? 댁들 얼굴 팔리면 참 기분 좋겠죠?”
“어멋,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자기야, 그만 가자.”
“자, 지웠수. 됐어요? 참내….. 살다보니 별……”
주변을 에워쌌던 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모습이 윤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작고 네모난 판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이들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존재였다.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사람다운 모습과 지껄이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녀는 안심할 수 없었다.
특이한 머리 모양이며 행색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윤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칠흑 같은 밤이건만 어쩐 일인지 대낮같이 밝았다.
시간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사람들을 몰아낸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설에게 다가왔다.
‘뭐, 뭐지? 같은 말씨는 아닌 듯하나…. 알아듣기는 하겠어. 정말 이상한 곳이네. 휴우… 무서워. 내가 설마…… 주, 죽은 걸까?’
짧고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 그리고 전혀 본 적이 없는 옷감의 옷으로 팔과 다리까지 쑤욱 내밀고 선 여자가 다시금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던 윤설이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달려오는 무언가에 흠칫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꺄악!”
덩치가 산만한 것은 멧돼지 같았다.
윤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언제인가 행랑어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어두운 산에서 그것을 마주친 이들에 의하면 눈에 불을 켜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결국 멧돼지에 물려 죽는구나……. 어떡해….. 흑흑….. 이제 곧 날 치겠지? 날 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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