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97
96회
“한참 들어가야 한다니까 잠이라도 좀 자둬. 머리 기대면 자야하는 인생….하아…..”
윤 매니저가 눈을 감자 준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최종 목적지는 여수가 아닌, 남해의 어느 작은 섬이었다.
생뚱맞은 장소는 준의 열망을 반영한 결과였다.
윤설을 생각해 무엇보다도 대중의 이목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였다.
제 직업 때문이라면 혼자서만 감당하는 것이 옳았다.
그녀에게까지 제한되고 억눌린 상황을 겪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미안했었다.
가능한 사람들이 적은 곳을 원했고 그를 모른다면 더더욱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런 조건이라면 외국이 적당했지만 여권을 만들 수 없는 윤설이 걸렸다.
준은 어렵게 택한 곳이 연인의 마음에 들긴 바랐다.
함께 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 그가 창밖을 내다보며 미소 지었다.
‘윤설 씨……너무나 보고 싶군요. 우리, 곧 만나요.’
“헐, 대박! 할아버지, 이거 직접 잡으셨어요?”
자그마한 섬, 부둣가 위로 막 올라온 상자 안에 물고기가 제법 들어 있었다.
얼굴이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암, 새벽부터 내 손으로 직접 잡았지. 근디 처음 보는 얼굴들인디…. 아, 뭍에서 온다며 민박집 두 개 구한다더니….처자들이구먼?”
해인이 싱긋 웃었다.
“네, 할아버지. 잘 부탁드립니다.”
특유의 살가움이 터져 나오자 노파가 껄껄 웃었다.
윤설과 해인이 목례한 후에 몇 걸음을 내딛는 찰나였다.
“이보슈! 처자들!”
두 사람이 뒤돌자 노인이 손짓하며 불렀다.
바위 위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 풍경을 감상하던 윤설이 감탄을 내뱉었다.
“해인아, 이곳으로 건너와 모든 일들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만…. 이곳은 참으로 꿈만 같구나. 물결은 비단같이 너울거리고….고즈넉한 것이….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란다.”
“히잇. 나도 여기 완전 좋은 거 있지? 역시 준이 씨 센스가 짱이라니까. 나도 네 덕분에 많은 경험해본다.”
해인이 까르륵 웃자 윤설 역시 덩달아 미소 지었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분들 같구나. 이방인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쉽지 않을 터인데….”
“그치? 시골 인심이 좋다지만 여긴 유난히 더한 것 같더라. 으윽, 이건 좀 징그럽지? 그래도 귀한 걸 주셨으니 잘 들고 있어야지.”
윤설은 해인의 손에 들려진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노인이 건넨 건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투박한 웃음으로 물컹대는 것을 끈에 잘 묶어주었었다.
윤설은 살아 움직이는 낯선 생물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낯선 이들에게 기꺼이 베풀어준 마음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 윤설아! 저기 배 온다! 준이 씨랑 상규 오빠가 왔으려나? 시간은 맞는데…..”
그리운 이름 하나에 윤설의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자그마한 배 한 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온 배가 멈춰 서자 두 남자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오빠들 맞다. 여기에요! 여기!”
캐리어를 들고 땅에 발을 내디딘 이들이 해인의 음성에 반응했다.
윤 매니저와 해인이 격하게 팔을 흔들자 윤설을 발견한 준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밝은 해같이 반짝이는 낭군의 모습에 그녀가 멈칫하더니 금세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어색함이 더 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사랑의 힘 때문이었다.
“해인아! 오랜만! 윤설 씨도 안녕? 헐, 해…해인아…너 지금 들고 있는 거, 뭐냐?”
윤 매니저가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돌문어래요. 선물 받은 거 있죠? 오빠, 저녁으로 콜? 요리할 줄은 모르지만…뭐, 주인아줌마께 여쭤보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신기한 얼굴로 한바탕 웃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이 윤설의 뺨을 쓰다듬은 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저도…그러했습니다.”
“음….얼마큼요?”
“많이…보고 싶었습니다.”
윤설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곧 그녀가 토끼눈을 뜬 채로 낭군을 올려다보자 준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한데요? 고마워요. 윤설 씨.”
비로소 안도한 그녀가 그를 따라 웃었다.
각자의 민박집에 짐을 푼 이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한 곳으로 모였다.
집을 두 채나 빌려 여자와 남자의 공간을 삼은 건 네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연인들끼리 긴 여행을 떠나는 게 당연해진 세상에서 이들의 사고방식은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본능에 이끌린 여행이 아니었고 그저 기쁨만을 추구하려는 발걸음은 더더욱 아니었다.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연애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여정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윤 매니저 역시 예의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준의 반듯함을 놀리기도 했지만 싹수없는 이들을 더 많이 견디지 못했다.
연예계에 몸담은 사람치곤 보기 드문 부류였다.
물론 서울을 떠나 작은 섬에 온 건 대중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생각보다 큰 자유를 선사했다.
게다가 본능을 억누르기 힘든 20대 남자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윤 매니저는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해인을 함부로 대하기 싫었고 이번 여행의 주인공인 윤설과 준을 방해할 수 없었다.
민박집 주인 여자의 솜씨가 한 상을 만들어냈다.
노인에게 받은 돌 문어는 잘 삶아져 접시 하나를 채운 채였다.
상 주위에 둘러앉은 이들이 감탄을 쏟아냈다.
“우와, 아줌마 솜씨가 대박이에요.”
해인 특유의 살가움에 주인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부끄럽소. 서울서 월매나 잘 드셨을라꼬? 섬은 쬐깐해서 먹을 게 없지라. 감안하고 드소잉. 근디 총각은 어찌 입을 가리셨소? 감기라도 드셨소?”
주인 여자가 준을 바라보자 그가 동그래진 눈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그럼, 편하게 드소. 내집이다 생각하고잉.”
그녀가 부엌으로 사라지자 모두가 피식 웃었다.
준을 서울에서부터 모자와 안경 그리고 마스크 3종 세트로 변장을 한 채였다.
이젠 습관이 되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형, 모험 한 번 해볼까요?”
“콜! 마스크 쓰고 밥 먹을 순 없잖냐. 푸핫.”
준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자 윤설이 떨리는 눈길로 낭군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제 연인을 향해 윙크했다.
윤설의 두 뺨이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피어났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은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그동안 못 다한 얘기들은 제법 많았다.
윤 매니저와 해인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사이, 준 역시 유머러스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윤설은 그들의 이야기에 웃음과 놀람으로 반응하며 즐거워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시거늘….나 하나를 위해 모두 이토록 애써주시는구나.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야. 내 평생, 진정한 벗들을 만난 기분이 들어 행복하다.’
부엌문이 휘리릭 열리더니 주인 여자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많이들 드셨소? 워매!”
그녀가 준을 응시하더니 별안간 소리를 높였다.
살며시 흐트러져 있던 분위기가 일순간 경직되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준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떨고 있었다.
“시상에나….인물이 이렇게 훤하구먼 어찌 그리 꽁꽁 감쌌소? 아까버서 그랬소? 닳을까 봐 그랬소?”
“풉!”
해인이 폭소를 터뜨리려다가 제 입을 막자 윤 매니저가 재빨리 나섰다.
“아따, 우리 아줌니 음식 솜씨만 끝내주는 줄 알았더니 센스가 대단하시구만요.”
“오홍홍. 내가 뭐 틀린 말은 안 하지라. 아따 텔레비에 나와도 인기 쪼께 끌겠구먼.”
준이 재빨리 목례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 여자가 후식을 두고 사라지자 윤 매니저가 손을 들어 준과 하이파이브 했다.
“미션 성공! 하하. 와, 우리나라에 진짜 이런 곳이 있다니…감동의 눈물이 난다. 가끔 오자.”
윤설의 시선으로 편안하게 웃는 준의 얼굴이 담겼다.
‘님의 모습이 더없이 밝으시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나로 인해 해님 같은 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면 어찌할꼬….그녀에게…님을 부탁해야 할까….?’
남자들이 여자들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밤길이 위험하다는 이유였지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기 위함이었다.
자연스레 둘씩 짝지은 이들이 느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준이 윤설의 손을 꼬옥 잡으며 싱긋 웃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네. 님은 어떠셨습니까?”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런 시간이 어떻게 찾아온 건지 신기하기도 하고요….오는 길이 험하긴 했지만 새삼 보람을 느꼈습니다. 참, 윤설 씨, 많이 피곤하죠? 얼른 가서 쉬어요. 마음 같아선 밤새 이렇게 걷고 싶지만요.”
그의 마음을 이해한 윤설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저야 일찍 당도하여 쉴 여유가 있었지만…님께선 그렇지 않으시니 더욱 고단하시겠습니다. 푹 주무십시오.”
“하아….당신의 한 마디가 자장가처럼 포근하군요.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묵을 집이 가까워지자 느린 걸음들이 더욱 느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을 피하진 못했다.
연인들이 아쉬운 탄식 속에 서로의 짝을 향해 인사했다.
해인와 윤 매니저가 다음 날의 재회를 위해 하이파이브를 하는 동안 준은 윤설의 손등을 도닥였다.
“잘 자요. 윤설 씨…. 꿈에서도 만나고….내일도 만나요.”
수줍어하던 입가에서 미소가 스르륵 피어나기 시작했다.
윤설이 그의 손등을 가만히 감쌌다.
“고맙습니다. 님과 함께 할 시간을 기대하겠습니다.”
설렘을 안고 겨우 잠들었던 이들에게 새 아침이 찾아왔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준의 얼굴은 조금 부어 있었다.
전날, 이동 시간이 길어 고단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트레칭을 하더니 곧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윤설을 생각하면 지체하는 시간마저 아까울 뿐이었다.
“헐, 대박! 오빠, 진짜로 빌려왔네요?”
민박집 앞에 나타난 두 남자를 향해 해인이 손뼉을 쳤다.
윤설은 제 낭군을 향해 싱긋 웃었지만 곧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연하지. 울 해인이가 잠시 잊고 있었구나? 이 오빠, 능력자라니까?!”
해인이 까르륵 웃자 준이 윤설에게 다가왔다.
“윤설 씨, 처음 보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만…..”
윤설은 동그랗고 커다란 바퀴 두 개로 보아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건 자전거라고 해요. 여기에 앉아서 페달을 밟으면 갈 수 있어요.”
“허면….탈 것이 맞단 말씀입니까?”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기심어린 시선이 자전거를 유심히 살피자 윤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윤설 씨, 타보시면 정확히 알 겁니다. 흠흠….그런데 해인아, 우린 왜 자전거가 두 개여야 하는 거니? 이게 최선이니?”
“오빠도 참…윤설인 처음이라 준이 씨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난 자전거 얼마나 잘 타는데요? 완전 오랜만이라니까요? 우왕, 신난다. 우리 얼른 출발해요.”
해인이 서둘자 그가 뿌루퉁한 얼굴로 자전거에 올랐다.
제 자전거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그녀는 친구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윤설아, 내 몸무게 때문인 건 비밀이닷. 히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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