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49
〈 빌어먹을 환생 50화 〉 흑사자
멜키스가 결정을 내리고서 곧장 계약이 진행되었다. 단순히 종이로 된 계약서도 아니고, 마법으로 맺는 계약서는 멜키스 같은 대마법사도 어길 수가 없다.
“만약 저로 인해 망토가 파괴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만한 값은 지불해야지. 걱정하지 마, 목숨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를 요구할 수도 없는 입장이긴 했다. 적자는 아니지만 상대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양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면 라이언하트와 척을 지게 될 것이 뻔했고, 멜키스는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애당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흑암의 망토는 작정하고 만들어진, 최상위급의 방어 아티펙트라고. 네가 두른 상황에서 망토가 파괴당한다면… 너도 같이 죽을 걸? 꼬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는 거겠죠.”
“잘 아네. 방어구 믿고 깝죽대지 말고, 얌전히 보관만 해. 멋진 파티에 입고 나가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거 입고서 싸우진 말라는 거야.”
그따위로 쓸 거면 이런 망토를 뭐하러 가지고 있나?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흑암의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디자인이 멋지군.”
창가에 걸터앉아있던 카르멘이 입을 연다. 그녀는 아직도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특히 목 주변의 털이 풍성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라이언하트의 상징,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군.”
“그렇군요.”
“하지만 털의 빛깔이 검은 색인 것이 흠이군. 백염식의 불꽃과 같은 흰색이나… 잿빛색이라면 훨씬 더 멋졌을 텐데. 지금의 털색은 흑사자 기사단에 훨씬 어울릴 것 같구나.”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카르멘을 멀뚱거리며 보았다. 카르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진을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가 시선을 나누고 있자, 곁에 앉아있던 시엘이 유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벗어드려.”
“왜?”
“입어보고 싶으시대잖아.”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는데?”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유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카르멘의 시선에는 귀찮은 부담감을 느꼈다.
“…입어보시죠.”
그렇게 말하며 망토를 벗는데, 즉시 카르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노골적인 무관심을 표정으로 피력하면서, 유진이 건네는 망토를 확 휘두르다시피 몸에 둘렀다.
“나쁘지 않군.”
창가에 비치는 제 모습을 빤히 보면서 슬쩍슬쩍 포즈를 바꾼다. 유진은 그런 카르멘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생과 현생에서 나이가 많은 상대는 숱하게 보아왔지만, 카르멘처럼 독특하게 나잇값을 못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가슴에 사자를 본 딴 장신구를 달면 더욱 좋을 것 같아. 등에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을 새기고.”
“누가 보면 아예 주는 줄 알겠네. 착각하지 마, 빌려주는 거거든? 내 망토에 헛짓거리하기만 해.”
탐욕스런 눈으로 위니드를 살피던 멜키스가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카르멘은 멜키스의 외침에 화답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에 심취해 있다가, 네이션이 서너 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망토를 벗었다.
“슬슬 시간이로군. 가자.”
“예.”
네이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카르멘이 저 망토를 벗지 않고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카르멘은 그 정도로 염치없고 난감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시엘.”
응접실을 떠나기 전, 기온이 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유진이랑 기다리고 있을 게요.”
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시엘의 미소와는 달리, 기온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카르멘이 사담을 나눌 기회를 주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간다.”
카르멘과 흑사자 기사단이 떠난 후. 멜키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위니드를 양팔로 끌어안고, 양 뺨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네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길어야 반나절?”
“저도 같이 갈게요.”
“안 돼. 누구 마음대로? 꼬마야, 정령과의 계약은 말이야. 술사의 정령친화력도 중요하지만, 장소와 상황도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맞선과 비슷해.”
“예?”
“생각해 봐. 네가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 장소에 도착했는데, 누군지도 모를 놈팽이가 네 상대와 같이 있는 거야. 그럼 네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냥 뭐, 맞선을 주선한 누군가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너 경험 없지?”
“예?”
“맞선 경험.”
“저 17살인데.”
“명문가는 그보다 훨씬 어린나이부터 맞선을 자주하지 않나? 로맨스소설에서 봤어.”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세요.”
“진짜 안 해? 역시 현실은 소설만 못하네.”
멜키스는 투덜거림을 멈추고서 정색했다.
“어쨌든, 안 돼. 기껏 바람의 정령왕을 꼬실 수 있게 되었는데, 너랑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계약에 응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건 정령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저도 바람의 정령왕을 직접 보고 싶은데요.”
“걱정하지 마, 계약을 맺고 위니드를 돌려줄 때 보여줄 테니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멜키스의 말처럼, 자신과 함께 있는 상황이면 템페스트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맞선이니 뭐니 하는 비유는 솔직히 알아먹기 힘들었지만, 템페스트는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개새끼. 분명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니까.’
4년 전에 만났을 때에는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가버렸지만. 유진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약속에 대해서는 모를 지라도, 유폐의 마왕과 싸우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아냐.’
그거라도 들어야겠다.
멜키스까지 나가버린 후. 응접실에는 유진과 로베리안, 시엘 셋만 남았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시엘 아가씨, 이렇게 뵙는 것은 4년 만이죠?”
“네.”
분명 몇 달 전에 봤을 때에는 사춘기가 미처 끝나지 않아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새 사춘기를 극복한 것인지, 시엘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로베리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로베리안은 17살의 시엘을 보며 세월의 빠름을 느꼈다. 유진과 재회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성장이 참 빠른 것 같았다. 재회한 시엘에게는 4년 전에 느꼈던 어린아이다운 면모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애니실라님의 생신 때문에 오셨다고 했죠?”
“네. 아, 로베리안님이 매해 보내주시는 선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제 방에 장식되어 있어요.”
“하하, 시엘 아가씨의 감사 편지는 항상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보내주지 않으셔서 의아했습니다만… 혹시 제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던 겁니까?”
“아뇨,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난감할 법도 한 질문인데, 시엘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올 초부터 여러 가지로 성격이 예민해 졌었거든요. 보내주신 선물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이상하게도 펜을 쥐어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어요.”
“아아… 이해합니다. 아가씨의 나이라면 그런 시기가 갑자기 찾아오곤 하죠.”
로베리안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수긍했다. 로베리안은 자식을 낳아 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의 고충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하나 뿐인 딸의 사춘기에 대해서는 길레이드도 몇 번씩이나 설움을 드러내곤 했었다.
“이제 와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로베리안님에게 죄송스럽고… 내년부터 선물을 보내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시엘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깔끔하게 포장 된 선물 상자였다.
“로베리안님에게 어울릴 것을 골라봤어요.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제가 용돈을 모아서 산거예요.”
“오오…”
“빨리 풀어보세요.”
시엘은 살며시 웃으며 채근했다. 로베리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낯설고 푸근한 감정을 느꼈다. 이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인가. 길레이드가 슬하의 자식들을 자랑할 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선물을 받으니 왠지 모를 벅찬 감정이 차오른다.
“이건…”
선물상자를 풀어 내린 로베리안의 두 눈이 떨린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깔끔한 디자인의 넥타이 핀이었다. 시엘이 말한 것처럼 대단한 물건이 아니기는 했다. 세공이 잘 된 것이 가격은 상당해 보이지만, 이 정도 물건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로베리안의 선물 가격 이상의 감동을 느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로베리안님이 마법사이시니, 마법에 관련 된 물건을 선물해드릴까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물건이라면 이미 잔뜩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요.”
“…”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가 기억하는 로베리안님은 언제나 로브를 입고 계셨더라고요. 하지만 로베리안님이라고 해서 언제나 마법사다운 로브를 입고 계시지는 않을 것 같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로베리안이 벌떡 일어선다. 그러자 시엘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장은 말고, 내년 제 생일에 보여주세요.”
“왜 하필 내년입니까?”
지금 바로 차보고 싶은데. 로베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시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린 선물이니까요. 저희 어머님 생신파티에 오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말고 제 생일에 차고 와주세요. 그래야 제가 시안 오빠나 다른 손님들한테 자랑할 수 있잖아요.”
사춘기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요망하구나. 유진은 히죽거리며 웃는 시엘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유진도 어른을 상대하는 처세술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만, 시엘과는 도저히 겨룰 자신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시엘 아가씨. 혹시 내년에 바라는 선물이 있으십니까?”
“로베리안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좋죠. 아, 그래도 제게 너무 과분한 선물은 주지 말아주세요. 저희 오빠가 질투하거든요.”
질투라니. 로베리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마음은 없었다.
혈계식 이후로 본가의 쌍둥이들에게 매해 선물을 보냈었고, 시안도 시엘처럼 감사의 답신을 보내기는 했었다. 하지만 시안의 편지는 언제나 형식적이기만 해서, 지금 와서는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헛.”
넋이 나간 눈으로 넥타이핀을 응시하던 로베리안이 정신을 차린다. 그는 응접실 벽의 시계를 확인하고서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두 분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군요.”
“그런 말씀은 마셔요. 붙잡고 있다니… 오히려 제가 로베리안님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죠.”
어쩜 말을 저렇게 듣기 좋게 할 수 있는 걸까. 로베리안은 혀를 내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즐기고 싶습니다만… 시엘 아가씨도 볼 일이 있으실 테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저는 괜찮은데…”
“아닙니다. 저도 볼 일이 있어서요.”
흑사자 기사단의 건을 확인할 겸, 의회에 얼굴을 한 번 비춰야 할 것 같다. 로베리안이 그렇게 말하니 시엘도 더 이상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럼 저도 이만…”
“어디 가? 나랑 같이 가야지.”
“내가 왜?”
“나는 아롯에 처음 왔단 말이야. 그러니 네가 안내해 줘야 할 것 아냐?”
“저도 부탁드립니다, 유진님.”
흑암의 망토도 받았으니, 연구동에 내려가서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로베리안이 시엘의 말에 힘을 더한다. 유진은 찡그린 눈썹을 씰룩거리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그러냐.”
적색마탑을 나온 즉시, 유진은 시엘을 돌아보며 이죽거렸다.
“너 로베리안님이 보내주신 선물들 죄다 방구석에 처박아놨잖아.”
“그게 뭐가 거짓말이야?”
“방에 잘 장식해놨다며?”
“네가 인테리어에 대한 미의식이 한참이나 부족해서 그래. 네 눈에는 처박아둔 것처럼 보일 지도 몰라도, 내 눈에는 모두 다 적절한 위치에 장식해 둔 거야.”
정말 그런가? 유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시엘의 말에 무어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대충 처박에 둔 것인데, 그게 장식해 둔 것이라고?
“…저번에 보았을 때에 먼지가 좀 쌓였던 것 같은데?”
“그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내 방에 먼지가 쌓여 있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난 본가에 돌아간 즉시 내 담당시종을 불러다가 혼쭐을 낼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먼지는 없었던 것 같아.”
“어지간히 기억에 남았나 봐.”
시엘은 히죽 웃으면서 자연스레 유진의 곁에 붙었다.
“뭐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말이야. 방안 풍경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
“미안한데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시안의 방에 뭐가 있었는지도 다 기억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시안보고 침대 밑에 이상한 책 좀 치우라고 전해줘.”
“…뭐?”
“시안 딴에는 최선을 다해,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놈이 15살 때부터 뭐 이상한 토끼 귀 머리띠를 달고 있는 춘화집을 수집했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니나도 알고 있을 정도야.”
“역겹네.”
“그렇지? 니나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언젠가 시안이 가주가 되면, 저택 시종들의 제복이 토끼 귀 머리띠에 색깔만 다른 스타킹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머님한테 전해줄게.”
“그건 좀.”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엄한 애니실라라면 시안의 귀를 잡아당기며 윽박을 지를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게 되면 시안이 수치심이 자살할 지도 모르잖은가.
“그냥 네가 넌지시 말해 둬.”
“뭐라고 말을 해?”
“토끼 귀는 별로라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눈을 깜빡거리며 유진을 보던 시엘이 빠른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럼 넌 무슨 귀를 좋아하는데?”
“말이 왜 그렇게 되냐?”
“토끼 귀는 별로라며. 그럼 다른 귀를 좋아하는 것 아냐?”
“미안한데 나는 그냥 귀가 좋아.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징그럽지 않냐? 머리 위에 토끼 귀가 달려있으면, 원래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건데?”
“…그냥 메워져 있지 않을까?”
“실제로 보면 엄청 징그러울 것 같은데?”
“…그럼… 있어야 할 자리에도 그냥 귀가 있겠지.”
“그럼 사람 귀도 달고 토끼 귀까지 달고 있는 거야? 그것도 징그럽지 않냐?”
“…어… 어어.”
저런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시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괜한 소리 말고, 어머니 선물이나 고르러 가자.”
“나는 애니실라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
“내가 아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냥 따라 오기나 해.”
“따라가게만 할 거면 안내는 왜 해달라고 한 거냐?”
“넌 여전히 재수가 없구나. 그럼 나 혼자 돌아다니게 할 거야? 생전 처음 와 본 타국의 수도에,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날 방치하겠다고?”
“방치는 무슨… 네가 어디 모자라 제 앞가림 하나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해도 따라올 것 다 알아.”
“그럴 수밖에 없지. 괜히 네 심기 거슬렸다가는 한참 동안 이거로 꽁알댈 것이 뻔한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흑암의 망토를 여몄다. 이렇게 털이 북슬북슬하게 달린 망토를 걸치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었지만, 여러 편의 마법이 내장된 망토는 싸매고 있어도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 저저번 달이 생일이었잖아.”
“그랬지.”
“생일에 뭐했어? 파티는?”
“안했어. 책만 읽었지.”
“책?”
“적색마탑 도서관에서.”
“진짜 파티 안 했어? 누구한테 선물은 안 받았고?”
“안 받았어. 로베리안님이랑 헤라님이 주려고 하긴 했는데, 내가 부담스러워서 제발 주지 말라고 했거든.”
“헤라가 누구야?”
“적색마탑의 마법사.”
“여자야?”
“그럼 이름이 헤라인데 남자겠니?”
“어떻게 생겼어?”
“마법사처럼.”
“…마법사처럼 생겼다는 건 또 뭐야?”
“말 그대로인데. 로브입고, 커다란 모자 쓰고, 지팡이 들고.”
“얼굴은?”
“저 분이야.”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이 귀찮았는데, 마침 저편의 거리에서 헤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큼직한 빵봉투를 끌어안고 바게트의 냄새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어머, 유진님!”
유진을 발견한 헤라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짧은 순간, 시엘은 헤라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헤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엘이라고 합니다.”
“앗…! 저, 저는 적색마탑의 헤라 스틸리라고 해요.”
헤라는 상황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을 힐긋거리며 보았다.
“…흑사자 기사단과 함께 왔더라고요.”
“앗… 흑암의 망토! 거래가 깔끔히 끝났나 보군요.”
“네. 원래는 연구동에 내려가려 했는데, 얘가 자꾸 같이 가자고 졸라서.”
“아아…”
헤라는 시엘의 은근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네?”
헤라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을 지나쳤고, 시엘은 잠시 동안 헤라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분 같네.”
“어어… 좋은 분은 맞지.”
“빵 냄새를 맡아서 그런가. 나 배고파.”
“그럼 밥부터 먹던가.”
유진은 멈췄던 걸음을 옮기며 시엘을 힐긋 보았다.
“그런데 너. 정말 선물만 사려고 아롯까지 온 거냐?”
“너 볼 겸 오기도 했다니까?”
“그거 말고. 내가 너랑 4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 태도도 못 읽을 것 같아?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닐 거 아냐. 카르멘님이랑 뭘 하고 싶은 건데?”
“넌 이상한데서 눈치가 빠르더라.”
“네가 뻔한 거겠지.”
“종자로 삼아달라고 조르는 중이야.”
시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가주는 오빠가 될 거고. 나도 가주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어머니는 정략혼을 시키고 싶으신 모양인데…”
거기서 잠깐, 시엘은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난 정략혼은 싫어. 그렇다고 본가에 틀어박혀서 아가씨 노릇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당장은 못 들어가지만, 카르멘님의 종자가 되어서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고 싶어.”
“카르멘님은 그러겠다 하시고?”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같이 오지도 않으셨겠지. 넌 모르겠지만, 카르멘님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날 귀여워 하셨어.”
시엘은 히죽 웃으며 으스댔다. 유진은 삭막해 보이는, 어쩌면 삭막해 보이는 척을 하려는 카르멘의 얼굴을 떠올렸다.
“…좋네.”
“뭐가?”
“본가 밥만 축내지 않고, 네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것 아냐. 시안은 잘 지내고?”
“네 얘기를 자주 해. 이번에 여기 오기 전에도 그랬어.”
“뭘?”
“오빠는 비밀로 하랬는데…”
“어차피 말할 거면서 뭔 비밀이야?”
“네 백염식이 몇 성인지 알아오랬어.”
“3성.”
“그대로네.”
“시안은?”
“2성이야.”
“걔도 그대로구만 뭘.”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멍청한 이오드와는 달리, 쌍둥이들은 열심히 하고 있다. 유진은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시안의 열등감은 수행의 양분이 되었고, 시엘은 여전히 짓궂고 요망하지만 그렇다고 남을 등 처먹는 악랄한 성격은 되지 않았다.
개같이 자란 것은 이오드 뿐이다.
“…형님 소식은 들었어? 외가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몰라, 관심 없어.”
시엘은 눈썹을 확 찡그리며 내뱉었다.
“어머님은 이오드의 모자란 짓에 기뻐하셨지만, 난 기분 나빠.오빠도 기분나빠하고.”
“그래도 대충 소식은 알 것 아냐?”
“…테오니스님이 가정교사로 들일 마법사를 수소문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가정교사?”
“웃기지? 그런 사고를 쳤으면서 아직도 마법을 익히게 할 건가 봐. 어차피 가주도 못 될 거, 그냥 알아서 살게 하면 될 것을.”
시엘은 투덜거리면서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기분 나쁜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디 좋은 식당 없어?”
“식당이야 많은데, 본가의 요리보다는 맛없을 걸.”
“맛은 상관없어.”
시엘은 유진을 올려다보면서 히죽 눈을 휘었다.
“원래 요리는 맛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중요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