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71
〈 빌어먹을 환생 72화 〉 귀환
아니스 슬리우드.
유진이 기억하는 그녀는, 신실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의 신앙과 믿음은 진실이겠지만, 평소의 행실은 도저히 신실함이나 ‘성녀’란 칭호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스는 세냐 이상으로 술을 좋아했다. 세냐가 술을 마시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면, 아니스는 그냥 술을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그마한 술병을 들고 다녔고, 그것에 담긴 액체를 술이 아니라 성수라고 말하곤 했었다.
성녀다운 모습은 있었다.
많은 시체를 앞에 두었을 때. 아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곤 했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시체에게 기도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곤 했었다. 부패가 진행 된 시체. 혼은 이미 떠났거나, 마족의 노리개가 되었거나.
그 사실은 누구보다 아니스가 잘 알았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추모 외의 의미는 없을 지라도, 아니스는 사자의 평화와 안식을 기도했다.
아니스는 술이 강했지만.
많은 시체를 지나칠 때면,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취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지독한 시체 썩은 내가 감도는 전장 한가운데에서는, 아니스는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세상은 평화롭고, 행복해 질까요?’
술 냄새가 시체 썩은내를 가릴 즈음.
아니스는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마왕을 죽이면 평화롭고, 행복해 지겠지.’
‘모든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죽인 무고한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혼은 구원받을 수 있어.’
‘하멜. 당신은 사후세계를 믿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나?’
‘당신은 신을 믿지 않잖습니까.’
‘그것과 사후세계는 별개지. 지옥은 모르겠고, 천국은 있었으면 해. 네가 나에게 그런 걸 묻는 것도 우습지 않나?’
신성제국 유라스. 그들이 받드는 주신은 빛의 신이다. 대륙에는 무수히 많은 신앙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라스가 주신으로 섬기는 빛의 신이다.
살아서 선행을 쌓고, 죽음을 맞이하면… 선행이 빛이 되고, 악행은 어둠이 된다. 빛이 모든 어둠을 밝혀낼 만큼 찬란하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
그 천국은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죄업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즉, 빛의 신이 다스리는 천국에는 어둠이 없기에 죄업도 없으며, 죄업이 없기에 고통 받는 사람도 없다.
‘나는 가끔 의심이 됩니다.’
취기에 붉게 물들었던 뺨.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왕에게, 마족에게, 마물에게, 몬스터에게. 대륙의 기나긴 역사 중에서 그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제가 섬기는 신은… 그렇게 죽은 모든 혼의 어둠을 밝힐 만큼 전능한지요.’
‘성녀라는 네가 네 신을 의심하는 거냐.’
‘예. 의심하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섬기는 전능하신 신께서는, 제 의심을 탓하기는커녕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시는 군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곳은 시체가 그득한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거인족의 두령. 카마쉬, 그 호로새끼의 진군을 막았다. 놈의 시체와, 수많은 거인족들의 시체를 지나쳤다.
모론은 최선을 다해 일반병들을 지켰다. 아니스는 빛의 비를 내리며 부상자를 돌봤다. 세냐의 마법은 병사들이 나서는 일 없이 거인들을 몰아붙였고, 하멜과 베르무트는 카마쉬를 쓰러트렸다.
그럼에도 우군의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거인족을 따라 온 마물의 대군. 군데군데 섞인 강력한 마족들. 그들이 얽힌 전투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을 입었다. 지원을 온 신성제국의 사제들과, 각지에서 찾아 온 의사들이 부상자를 돌보았지만.
죽을 사람은 죽는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신이 진정 전지전능하다면, 그 분의 어린 양이 흘릴 피를 대신 흘려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스.’
‘그 분이 정말로 모든 어둠을 밝힐 빛이라면, 왜 이 험난한 어둠을 직접 밝히지 않으시는 겁니까.’
‘야.’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진득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밤입니다. 곧 찾아 올 여명은 어둠 속에서 저문 목숨을 밝히지 못할 겁니다. 여명이 밝히는 것은… 시체들뿐이죠. 하멜. 오늘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어딘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혹은 빛으로 밝은 곳에서 죽었고, 죽을 겁니다.’
‘너 취했어.’
‘저는 제 신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후에 도달하게 될 천국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세상이 이토록 처참한데. 왜 신께서는 세상에 빛을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베르무트가 있다.’
그때의 하멜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빛의 신의 교리 따위는 몰라. 다만, 베르무트 저 자식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네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베르무트는, 신이 내린 기적이다.’
‘…’
‘신은 스스로 세상을 돌볼 수 없기에 신의 증명이자 살아 움직이는 기적인 베르무트를 내려보냈다. 그래서 용사인 것이고, 성검이 놈을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지. 아니냐?’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 술주정을 듣는 것도 짜증스럽고, 네가 내게 위로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거든. 나도 위로해 줄 성격은 아니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고. 답을 주지 않는다는 신에게 지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그냥 우리는 모든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면 돼. 그러면 뭐든… 잘 될 거야. 마족에게 붙들려진 혼은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갈 거고, 세상은 평화롭고 행복해 지겠지.’
되는 대로 떠들었다. 아니스가 납득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멜로서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천국이나,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는 것보다는 분명한 목적을 원했다.
‘…우리가 그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룰 수 있어. 베르무트도 있고… 성녀인 너도 있잖아. 세냐도 있고, 모론도 있고. 나도 있지. 우리는 강해. 모든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막연할 지라도 희망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줘 봐. 너만 쪽쪽 빨지 말고.’
‘이것은 술이 아니라 성수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당신에게는 줄 수 없습니다.’
‘나도 오늘부터 빛의 신도 할 테니까 달라고.’
‘거짓된 믿음은 그 어떤 죄보다 무겁습니다. 저는 성녀로 명명된 자로서, 거짓된 믿음에 은혜를 베풀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날 아니스는 술 한 방울 베풀어주지 않았다.
뱀 같은 여자.
하멜과 세냐는 아니스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아니스는 성녀답지 않게 성격이 고약하기도 했고,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스스로가 교리를 태연스레 어기는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에는 성녀라 불리는 만큼 신실했고, 그녀의 신성마법은 그 어떤 사제보다 찬란한 빛을 냈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사람을 맥이는 구석도 있었다. 베르무트를 제외한 모두가 아니스에게 된통 당한 적이 한두 번은 있었다.
언제나 앞으로 달려 나가던 모론이 다리가 잘렸을 때. 아니스는 모론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놈의 다리를 반대로 붙인 적이 있었다.
잘린 몸뚱이를 붙이는 기적은 수많은 사제들 중에서 오직 아니스만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스는 그 일로 하여금 모론의 버릇이 고쳐지길 기대했지만, 모론은 반대로 붙인 다리로도 굉장히 잘 달렸다.
‘저 새끼 다리 멀쩡히 붙여 놓으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론의 다리를 다시 잘라야 합니다.’
‘나는… 나는 이 다리가 불편하지 않다. 잘 달리고, 싸움도 잘 한다.’
‘지랄하지 마. 네가 가끔 휘청거릴 때마다 내가 대신 처맞는다고. 이리 와 봐, 내가 한 방에 잘라줄게.’
‘싫다…’
‘세냐! 저 새끼 재워!’
결국 세냐의 강력한 수면마법이 모론을 재웠고, 그 사이에 하멜이 모론의 두 다리를 잘랐다.
“고약한 년.”
그만큼은 아니어도, 하멜도 아니스에게 당한 적이 몇 번은 있었다. 아니스의 성수를 세냐와 작당하고 훔쳐 먹었을 때. 아니스는 자신이 식사당번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세냐와 하멜의 스튜가 몬스터의 오줌으로 끓인 것이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만약 그때 모론이 막지 않았다면 세냐와 하멜, 아니스, 셋 중 하나는 죽었을 것이다.
유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빛의 성지, 호가니.
도시의 밖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아니스의 동상이 있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 쓴 동상의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아니스의 모습과 그리 많이 닮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스럽다는 느낌이 있긴 했다. 빛의 신도가 아닌 유진도 저 동상에게 성스러움을 느끼는데, 진짜 빛의 신도들은 오죽하겠나.
동상의 주변에는 유라스는 물론이고, 각지에서 찾아 온 빛의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유진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며 몸을 돌렸다.
호가니에 온지 일주일.
유진은 이곳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니스가 어떠한 흔적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롯과 똑같다. 아롯의 마법사들은 세냐를, 유라스의 신도들은 아니스를 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만약 둘이 무언가를 남겼다면, 다른 누군가가 진즉에 발견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 혼과 감응해서 흔적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 동상. 수백 년 전의 아니스는 저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사막의 저편으로 나아갔단다.
아니스의 행적은 거기서 끊어진다. 그 후로 유라스는 몇 번이나 사절단을 보내 아니스의 행적을 추격했지만, 끝내 아니스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왜 하필 나하마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이야 마법의 발달로 각국에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만, 수백 년 전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유라스에서 배를 타면, 호가니 위쪽의 항구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순례’가 시작된다. 아니스는… 아마…
‘내 무덤에 추모를 하러 왔어.’
세냐의 은거와 아니스의 순례.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세냐가 몇 년 빠르게 은거했고, 그 뒤에 유라스에서 성녀라 추앙받던 아니스가 대뜸 순례여행에 나섰다.
‘내 무덤은 봉인되어 있었다.’
무덤이 발견된 것은 6년 전.
아마,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하멜의 목걸이를 발견한 후. 그에 감응하여 무덤의 ‘봉인’이 사라진 것일 터.
‘아니스는 내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다.’
만약 들어갔다면, 그 폐허를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아니스의 동상을 응시했다.
‘…베르무트.’
장례식까지 치른 놈이, 멀쩡히 살아서 하멜의 무덤에 침입했다.
세냐와 싸움을 벌였다.
그녀를 물리치고, 월광검과 무덤을 봉인했다.
200년 전의 옛날.
아니스가… 사막을 떠도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발견되지 않는 무덤을 찾아 헤매면서, 아니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스의 실종에도 베르무트가 관여한 건가?’
유진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흔적을 명확히 남긴 것은 세냐 뿐이다. 유진은 망토 안에 넣어 둔 세계수의 나뭇잎을 의식했다.
“공자님.”
유진의 곁에서 잠자코 서있던 라만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동상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고, 이 넓은 사막 어딘가에서 수백 년 전의 흔적을 찾아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론의 왕국에 가볼 수도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고까지 들은 마당에, 헬무드와 인접한 북방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지금은 안 돼.’
힘이 부족하다.
유진은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환생하고서 이만큼이나 힘을 갈구한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갈구해야 했다.
멀쩡하지도 않은 데스나이트에게 죽을 뻔 했다.
아멜리아 머윈에게도 죽을 뻔 했다.
유폐의 마왕을 앞에 두고서도, 놈을 죽이고자 덤벼들지 못했다.
“키옐로 돌아간다.”
라이언하트 가문을 떠난 지 2년.
슬슬 돌아갈 때였다.
*
키옐의 수도, 세이리스.
수도 외곽의 널따란 숲은 모두가 라이언하트의 영지이며, 수도에도 유일하게 영지 내에 워프 게이트가 설치된 곳이다.
시안 라이언하트. 그는 워프 게이트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곧 20살을 맞아 성인이 될 그는, 라이언하트의 다음 가주라고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하지만 시안은 그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가 없었다.
곧 돌아올 유진 때문이었다.
‘…개자식.’
시안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2년 만에 돌아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에 대한 서운함. 반가움.
그 외에, 여러 가지.
정실인 테오니스와 적자인 이오드가 본가를 떠난 후. 애니실라는 본격적으로 본가의 가솔들을 장악해갔고, 그 모든 것에 아들인 시안을 앞세웠다.
유진이 없는 2년.
시안은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다. 매일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아버지와도 대련을 반복했다. 극성맞은 어머니의 후계자 교육과 더불어, 백염식의 수행도 거르지 않았다. 젊은 기사들과 어울렸고, 오랫동안 본가를 섬겨 온 기사들에게는 고개를 숙여가며 베품을 청했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점점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안은 가주가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이었고, 시안 본인도 가주 자리에 욕심을 갖고 있었다. 이오드가 자격이 박탈된 이상, 시안의 가주 계승은 확실했다.
다행스럽게도, 쌍둥이 동생인 시엘과 경쟁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시엘은 계승권에서 물러서고, 흑사자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유진만 없다면.
시안이 가주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썩을.”
시안은 그렇게 여겨지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 병신 같은 이오드라면 모를까. 유진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경쟁심.
그리고 패배감.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시안은 벌써부터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짜증나고, 유진이 ‘거슬린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싫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놈은 개자식이었다. 6년 전 대뜸 양자가 된 후, 시안은 매일같이 유진에게 시달렸다. 대련을 빙자한 구타. 실컷 처맞은 것에 비해, 시안은 단 한 번도 유진을 패본 적이 없었다.
“시안.”
아들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있던 애니실라가 입을 연다.
“네 형제가 돌아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왔으면 좋겠는데,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안.”
“녀석이 가주가 되고 싶어 한다면, 저는 아마 양보하려고 할 겁니다.”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놈이 저보다 가주에 어울릴 테니까요.”
“…시엘이 말하길, 유진 그 아이는 가주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어.”
“그것도 2년 전이죠. 마음이 변했을 지도 몰라요.”
“네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유진이 가주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라이언하트에게 옳은 겁니까?”
“시안.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라이언하트의 가주는 본가에서 가장 강한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넌 2년 전에 유진보다 약했겠지만, 지금은…”
“제가 흘린 땀만큼 그 자식도 땀을 흘렸겠죠.”
시안은 빠득 이를 갈며 워프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저는, 피가 땀보다 무조건 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어요. 만약 유진이 저보다 강하고, 놈이 가주가 되려 한다면.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는 가주가 되고 싶잖니.”
애니실라는 아들의 말을 철없는 소리라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당당히 서길 바라고, 위대한 영웅의 피를 이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길 바랐다.
“…너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야. 그러니, 결정은 너 스스로 해야 한다. 네가 가주가 되고 싶다면, 가주가 되면 돼. 양보하고 싶다면… 양보하면 되는 거지.”
“…그건 어머니의 바람이 아니잖아요.”
“내가 널 너무 엄하게 키웠구나.”
애니실라는 한숨을 내쉬며 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테오니스처럼 되고 싶지 않아. 과한 욕심으로 자식을 망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저는 이오드와 다릅니다.”
“그래, 다르지. 그러니 너는 올바른 거역을 하렴. 나는… 네가 옳고, 떳떳하다 여긴다면. 네 뜻을 존중하고 싶단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말은 저렇게 했지만, 애니실라는 스스로도 의문을 느꼈다. 라이언하트의 둘째부인이 된 후부터 쭉, 자식을 가주로 만들고자 했다. 테오니스와 이오드의 일이 없었다면… 아들의 무른 말에 분노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미의 주제 넘는 참견과 고집이 아들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보았잖은가.
“…시안. 내 아들. 이걸 명심하렴. 네가 생각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유진에게도 생각과 바람이 있을 거야.”
“…”
“너는 네 형제의 바람을 알 수 없어. 설마 그 시엘이 흑사자가 될 것이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시엘의 어미인 나도, 쌍둥이인 너도 시엘의 바람을 알지 못했어.”
“…형제.”
“그래. 유진은 네 형제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네 형제인 거야. 그러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가주의 계승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늦지 않으니까.”
“…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세졌는지 보자고.’
워프게이트가 빛을 발한다.
시안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워프게이트에서 나올 유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