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25)
128화. 납치
언미희는 침상에 앉아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 내력을 다스린다.
그것은 무가의 아이로 태어나 처음 기를 깨우친 이래 그녀에게 있어 숨을 쉬듯 당연한 일상이었다.
허나.
“큭.”
움찔, 어깨가 흔들렸다.
운기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는 엄한 길로 새어 나갔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언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운기를 그만두었다.
되지 않는 것을 무리해서 운용했다간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썩.
언미희는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지하 분타에서의 싸움 이후, 이곳 의원에서 눈을 뜬 그녀는 벌써 며칠째 단 한 번의 일주천조차 이뤄내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나 이유는 분명했다.
일전의 싸움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켠은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남아있는 듯했다. 생각은 배배 꼬여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엮여있다.
외상도, 내상도 회복 되었지만 마음이 갈피를 잃었으므로 기운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
그리고.
언미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이제 와서는 그 ‘괴물’이 정말로 사라진 아버지였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당금의 천하에서 맥이 끊어져 버린 언가권을 그렇게까지 펼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버지뿐이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그녀는 그저 알 수 있었다.
혈육으로서의 직감, 혹은 그 외의 무엇이건.
그 붕대 안에 감싸진 것은… 분명 아버지였다. 아니, 적어도 아버지‘였던’ 무언가였다.
“…….”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자신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떠한 판단조차 내릴 수 없다.
그저 더는 싸울 수 없다는 무력감만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손발과 같았던 내력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언 소저, 몸 상태가 나아지면 천향루로 돌아가시오. 이것은 대주로서의 명령이오.
눈을 떴던 날, 이벽은 말했다.
그 목소리는 그간 자신이 알아 왔던 이벽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단호했다.
허나 언미희는 할 말이 없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다는 것쯤은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일행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지하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아.”
언미희는 피로를 느꼈다.
수련조차 거른 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고 있지만, 매일같이 잠은 부족했다.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잠에 들면 매번 지겨운 꿈이 반복되기 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아버지는 기어코 집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더는 저항할 수 없다. 스르르, 언미희는 다시 선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쿠웅!
허나 그때였다.
문득 문밖에서 큰소리가 일었다. 번뜩, 언미희는 눈을 떴다. 단련된 감각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타다닥.
그리고 의원의 마당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기척은 퍽 익숙했다.
“거… 걸개! 거지 아저씨! 어딨어! 케헤헥! 빠… 빨리! 헤헥, 쫌 나와봐, 쫌!”
‘파 소협?!’
파진성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숨에 차 있었다. 언미희는 무슨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벌떡, 언미희는 몸을 일으켰다.
그 즉시 언미희는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일행이 위험에 처했다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흠칫, 그 순간 몸이 굳었다.
내력의 반응이 굼떴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 다 죽을 뻔했어. 알아?
송영영의 차가운 눈빛이 스쳤다.
한순간, 언미희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의 자신이 달려간들 과연 도움이 되기는 할까?
무엇보다 파진성은 그녀가 아닌 철면개를 찾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더는 일행이라 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타다닷!
그사이 문 바깥에서는 잠깐의 소란이 이어졌고, 이내 화답하는 철면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발소리가 다급히 의원을 나섰다. 빠르게 멀어졌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제서야 언미희는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드륵.
그때쯤 병실의 문이 열렸다.
“아, 소, 소저…! 깨어있었군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으신 것 같나요?”
들어선 것은 의녀였다.
지난 며칠간 의원에 신세를 지며 이제는 퍽 가까워진 사이였다. 허나 오늘따라 표정은 어색했다.
“…혹시, 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요? 아까 전의 소란은 뭐였죠?”
“그, 그게…….”
언미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그러자 의녀의 얼굴에 꺼리는 기색이 깃들었다.
“말해주세요. 제 일행과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 하아, 조금 전 얼굴 까만 소협께서 다급하게 거지 분을 모셔갔어요. 객잔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
그것은 예상한 바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는 누구인지 들었나요?”
“그, 그게… 저는 무림의 일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요. 어, 언뜻 듣기에는 남궁세가와 모용세가라고…….”
“뭐, 뭐라고요……?!”
순간 언미희는 귀를 의심했다.
벌떡, 콰앙!
“앗, 소, 소저, 잠깐—!”
언미희는 그 즉시 몸을 박찼다.
권갑을 챙긴 뒤, 만류하는 의녀를 제치고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대문을 나섰다.
으득, 이를 갈았다.
무려 오대세가 중 한 곳도 아닌 두 곳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 있을 리 없다.
한가롭게 몸을 사릴 때가 아니다.
언미희는 전력으로 길을 내달렸다.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력을 억지로 쥐어짜자 기혈이 경련했으나, 중요하지 않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더는 비룡대가 아니라 해도.
‘…공자!’
이내 언미희는 일행이 묶고 있는 객잔 바깥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낯선 무인들 몇몇이 쓰러져있다.
허나 주변은 조용했다.
싸움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콰앙!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언미희는 다급히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파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네년은 누구냐!”
언미희는 내부를 살폈다.
전투의 흔적은 뚜렷했으나… 어찌 된 상황인지 일행의 모습은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훅, 채앵!
“큭!”
그 순간 검이 뻗어졌다.
검끝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언미희는 황급히 권갑으로 막아섰다. 허나 실린 힘은 무시무시했다.
붕 떠오른 언미희의 몸이 한켠으로 밀려났다. 허공을 한 바퀴 돈 뒤에 가까스로 착지했다.
“호, 어린 소저가 대단하군, 그래? 어쩐지 들은 바와는 달리 한 명이 모자라서 혹시나 했더니만.”
“……!”
검을 뻗은 중년 사내가 웃었다.
“실례했군. 나는 남궁세가의 외당주 겸 창검대주 남궁청이라 하네. 아무튼 고맙군. 제 발로 와준 덕분에 소저의 벗들에게 겨우 한 방 먹일 수 있게 되었어.”
사내가 웃었다.
스윽, 그리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퇴로를 점했다. 언미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 * *
“…공교롭게 됐네요.”
공손수가 침음을 삼켰다.
제갈성, 그리고 모용세가의 무인들을 방치한 채 비룡대 일행은 황급히 현내로 달려왔다.
모용삭에 의하면, 남궁세가는 추적을 포기하고서 돌아갔노라 했다.
허나 그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일행은 언미희를 현내의 의원에 두고 온 상태였다.
물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는 둘째치고 의원에 머무르고 있는 이를 공격하는 것은 무림의 금기사항이므로 아마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의원으로 향한 일행은 언미희가 제 발로 뛰쳐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예의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전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난폭한 소저라면 남궁세가의 대협들께서 ‘모셔’ 갔습니다요…! 에헤헤, 소인이야 뭐, 무림의 일은 잘 모르지만요.”
객잔의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내부가 엉망이 되었음에도, 남궁세가로부터 차고 넘칠 만큼의 금전적 보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결국 남궁청의 ‘전령’인 셈이었다.
언미희를 확보했으므로, 그녀를 되찾고 싶거든 남궁세가로 찾아오라는 말을 이벽에게 남긴 것이다.
“…죄송해요. 제 판단이 짧았네요. 설마 그 상황에서까지 모용세가를 미끼로 쓸 생각을 할 줄은.”
“…아니. 이건 내 탓이지.”
파진성이 답했다.
“거지 아저씨 데려온다고 의원에서 괜히 호들갑을 떨어가지고. 부대주 성격에 당연히 가만히 안 있겠지.”
“…….”
이벽은 생각했다.
누구의 탓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것을 따진다고 해서 언미희를 빼앗긴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저벅.
이벽은 돌아섰다.
그대로 객잔을 나섰다.
탓.
채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 그림자와 같은 신형이 앞을 가로막았다. 공손수였다.
“오라버니, 어딜 가시려고요?”
“뒤를 쫓는다. 당연하지 않나?”
“…하아, 우선 얘기를 좀—”
흠칫.
한숨을 내쉬며 공손수는 말을 꺼내려 했다. 허나 이벽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또 튀어나왔어.’
이벽의 눈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 흉포한 기운은 안으로 갈무리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공손수는 직감했다.
‘그 이벽’이다.
산적들을 베고, 암영각의 북촌장 백룡강을 쓰러뜨렸으며, 팽가의 무인들을 무참히 도살했었던.
슥, 저벅.
이벽은 공손수를 밀쳐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남궁세가, 그리고 의혈맹은 끝끝내 선을 넘었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일행에게 손을 대었다.
지켜야 할 이를 건드렸다.
이에 적파심공이 반응했고, 혈기가 들끓었으며, 팔다리에 각인된 도살지도가 움틀거렸다.
허나.
이벽은 살기를 갈무리했다.
아직은 드러낼 때가 아니다.
‘전부 죽인다.’
타앗, 이벽은 땅을 박찼다.
빠른 속도로 현을 가로질렀다. 일행들이 부랴부랴 뒤를 따랐으나, 이벽은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이내 현을 벗어났다.
타다닷, 챙.
이벽은 검을 뽑았다.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었다.
“무슨 짓이지, 공손수.”
“…오라버니, 제발 침착하세요. 애초에 남궁세가 놈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알고 움직이는 거예요?”
“어차피 목적지는 안휘성이겠지.”
“…저는 언니가 아니라서 오라버니한테 박치기 같은 건 못해요. 하지만… 이건 아녜요. 이제 막 모용세가를 쓰러뜨린 참이고, 우린 지쳤어요.”
“그렇다면 나 혼자서 가지.”
휙, 채앵!
다음 순간, 저만치에서 단번에 거리를 점하며 검이 날아들었다. 이벽은 재차 막아섰다.
“…파진성.”
“야, 대주. 정신차려, 쫌! 혼자 가서 뭐 어쩔 건데? 어떻게든 따라잡는다고 쳐. 놈들이 아까 우리처럼 부대주 붙들고 인질극이라도 하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냐고?”
파진성은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아, 나도 반성하는 중이라고. 그리고 열받은 건 너 혼자가 아니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 임마.”
그리고.
그 틈을 타 송영영과 철면개가 이벽의 좌우로 다가섰다.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하고 싶은 말은 앞의 두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했다.
“…….”
일행에게 둘러싸였다.
그 순간, 이벽은 적파심공의 흐름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철컥,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케헤.”
파진성도 검을 거두었다.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죽는 줄 알았네… 거 살기 한 번 끝장이다. 괜히 나섰다가 진짜로 죽는 줄 알았잖아, 임마, 케헤헤!”
“…내가 널 왜 죽이나?”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 부대주가 새삼 대단하긴 하네. 이딴 살기를 어떻게 매번 막아선 거지? 케헤헤! 난 못 해. 두 번은 못 해.”
파진성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공기가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공손수가 다시 다가섰다. 이벽을 마주했다.
“오라버니, 우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죠. 남궁세가로 간다는 건, 결국은 의혈맹의 의도에 말려드는 거예요. 그건 아시죠?”
“…알고 있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무림에 발을 들인 이래, 의혈맹은 줄곧 그들을 추적해왔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슬슬 사파무림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놀아나는 건 또 열받잖아요?”
공손수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가야 한다면,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쳐들어가요, 우리. 온 힘을 다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