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제갈소미
달빛이 연무장을 비추었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제갈소미의 목검이 소리 없이 허공을 수놓았다.
“하앗, 핫!”
옥구슬처럼 청아한 목소리.
검로는 흔들림 없이 횡을 그었고, 종을 그었고, 일점을 파고든다. 그리고 다시 반복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삼재검.
흔히 저잣거리 삼류무공이라 천대받곤 하지만, ‘베고 찌른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검로의 뼈대이기도 하다.
제갈소미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녀의 삼재검에서는 똑같은 검로를 셀 수도 없이 갈고닦은 자의 완숙이 흐르고 있었다.
“…….”
이벽은 문득 어색함을 느꼈다.
타인의 수련을 허락 없이 지켜보는 건 무학을 익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곳 낙검문에서는 누구도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많은 상식들이 통용되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이진천이 말한 ‘마음의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다.
저벅.
“벽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문득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이벽을 뒤덮는다.
“아하핫, 듣자 하니 아까 낮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며? 석두 녀석이 다짜고짜 나타나서 땅바닥에 이마를 찍어댔다고?”
“…혁대웅, 몸은 이제 괜찮나?”
“나야 뭐, 워낙에 통뼈라서. 그보다 역시 석두 걔가 근본이 나쁜 녀석은— 크악!”
혁대웅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움츠러드는 큰 덩치의 뒤쪽에는 어느새 제갈소미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열다섯에 범과 맞서 싸운 양산박의 영웅호걸 혁 대협 아니야?”
쿡.
“끄악!”
제갈소미의 목검이 혁대웅의 등을 찔렀다. 가슴을 움켜쥐며 움츠러드는 거구.
“사, 사저! 아파!”
“당연히 아프지. 아프니까 환자지. 환자 주제에 누워서 천장 얼룩이나 셀 것이지 어딜 슬금슬금 기어 나와?”
쿡, 쿡, 쿡.
“악! 윽! 끄악!”
“그러니깐 누가 주제도 모르고 범한테 덤비래? 앙? 곰탱이 곰탱이 하니까 네가 진짜 곰이라도 된 줄 알았니?”
“미, 미안해 사저.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악!”
“시끄럽고. 너는 다 낫는 즉시 나한테 마저 죽을 줄 알아. 진짜 한 번 죽어봐야 몸을 사리지.”
“아, 아하하, 큰일이네…….”
혁대웅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제갈소미.
그리고 훅, 그녀의 시선이 이벽으로 옮겨붙었다.
“야, 이벽. 너는 딱히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왜 청승맞게 그러고 있어? 칼질 안 할 거야?”
“…조금 생각할 것이 있다.”
“아~ 하기는. 우리 위대한 사제께선 힘들게 몸 쓸 필요도 없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검의 극의가 한눈에 다 보이고 그러지?”
…무슨 의미지?
이벽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빡대가리 사저가 얼마나 우습겠어? 2년간 별의별 짓을 해도 가망도 안 보이던 내공 되찾기를 본인은 열흘 만에 해내셨는데.”
“…….”
덥석!
별안간 제갈소미의 손이 이벽의 어깨를 붙들었다. 꽈악, 힘이 느껴진다.
“야, 이벽! 솔직히 말해. 너 문주님의 숨겨진 아들이라도 되냐? 진지하게 이씨 종친이라서 피는 물보다 강하고 뭐 그런 거야?”
“…아니, 아니다.”
“그럼 뭔데 이 괴물딱지야! 어서 비결을 말해! 어떻게 한 거야! 같이 좀 강해지자! 사형제끼리 돕고 살아야지, 응?!”
탈탈탈, 제갈소미가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이벽은 힘겹게 할 말을 짜내었다.
“나, 나도 상세히는 모른다. 문주님께서도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말씀하셨고, 그저 내 마음이—”
“악! 그놈의 마음!”
그 순간 제갈소미가 이벽을 팽개쳤다. 팍팍팍, 땅을 몇 번 걷어차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열 올려봤자 나만 손해지.”
터덜터덜,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한 걸음으로 제갈소미는 다시 연무장 한가운데로 돌아갔다.
“그래~ 재능과 용력이 흘러넘치는 사제님들께선 즐거이 담소나 나누셔요~ 이 아둔한 사저는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삼재검이나 파다 꼬부라져 뒤질랍니다~”
그리고 다시 중단세.
삼재검이 처음부터 펼쳐진다.
“…….”
“사저도 참. 표현이 거칠다니까.”
하핫, 혁대웅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이벽의 옆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마루에 앉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제갈소미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바라보았다.
“벽아.”
다시 혁대웅이 말을 꺼냈다.
…달리 용건이 있었던 건가.
“아니… 그때 말야. 너, 나한테 뭔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니?”
“…….”
물론,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날, 이벽은 혁대웅을 뒤로 하고서 촌장, 장석두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혁대웅은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다.
고작해야 만난 지 열흘이 되었을 뿐인 이벽을 위해 목숨을 건 그 행동은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벽은 어쩐지 갑자기 질문을 꺼내는 게 두려워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직감했다. 그 답을 듣지 않고선 나아갈 수 없다.
이벽은 신중하게 질문을 되새겼다.
“혁대웅, 네게 사형제란 뭐지?”
“…뭐어?”
“왜 그때, 장석두와 함께 나를 보내고서 네가 스스로 남았던 거지?”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때의 이벽은 몽롱함에 휩싸여 마치 스스로가 이미 죽어버린 목숨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따라서 그 자리에서 둘 중 한 명의 목숨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면, 그게 자신이 되어도 괜찮다고 이벽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혁대웅은 완고했다.
“벽아. 내 생각에는 말야.”
흠, 혁대웅이 헛기침을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
“아하하, 미안해. 너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서 딱히 해줄 말이 없네…….”
긁적긁적, 머리를 긁는 혁대웅.
“좌우간 길게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그 순간 그나마 안 죽고 버텨볼 만한 게 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뿐인가?”
“뭐, 그런 거지.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어도, 어차피 우리가 앞으로 사형제인 건 평생 변함없는 거잖아?”
쿵!
앉은 자리가 흔들렸다.
제갈소미의 목검 끝이 마루를 두드린 것이다. 검에 기대어 선 채, 제갈소미가 말했다.
“야, 이벽. 칼질하면서 듣자 하니 역시 좀 재수없네, 너. 그래 보여도 네 사형인데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
“안 되겠어. 좀 뚜들겨 맞자.”
제갈소미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벽도 그녀의 이러한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즉, 비무를 뜻하는 것이다.
새삼스레 마다할 이유는 없다. 이벽은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 했다.
“아니다, 지금 당장은 말고.”
꾸욱, 목검이 어깨를 짓눌렀다.
“한 일다경만 있다가 덤벼.”
* * *
침소로 돌아간 혁대웅과 마저 몇 마디를 나눈 후, 이벽은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준비는 끝난 듯, 제갈소미는 연무장 중앙에 서서 잠자코 이벽을 바라보고 있다.
척, 검 끝을 겨누었다.
“야,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
낙검문에 입문한 이래 이벽은 제갈소미, 혁대웅과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비무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늘 승패가 엇갈렸던 혁대웅과는 달리, 제갈소미는 첫날 이후 이벽을 상대로 더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가져가지 못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비도술.
그러나 비도술이란 특히 손을 떠난 칼에 담긴 내력의 섬세한 운용이 핵심인 공부인 듯했다.
즉, 내력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초식이 펼쳐질 수 없었고, 이벽의 청강검식을 뚫을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오늘은 매 맞을 각오 좀 해라?”
뚜둑, 뚝, 손가락을 푸는 제갈소미에겐 어쩐지 의문스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타앗!
제갈소미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목검과 목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마찰음과 함께 검과 검이 얽혀들기 시작했다.
타악, 탁!
능숙한 삼재검이 펼쳐졌다.
서로의 검에 익숙해진 만큼, 탐색이 길어질 이유도 없다.
발검식, 그리고 회검식.
직, 쾌, 강, 그리고 곡, 변, 유.
이벽은 청강검식의 검로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무리가 무작위로 섞여들었다.
“…쳇.”
가볍게 혀를 차는 제갈소미.
그리고 이내 그녀의 검이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익숙해진다 한들, 내공이 없다는 동등한 조건에서 삼재검은 청강검식의 촘촘함을 따라올 수 없다.
타앙!
제갈소미가 크게 횡을 그었다.
이벽을 한 발 밀쳐낸 뒤, 본인은 세 발자국 훌쩍 뒤로 물러섰다. 후우, 숨을 고른다.
“야, 이벽. 내가 요새 제일 열 받는 게 뭔지 알아?”
“…….”
“그건 말야. 내가 더럽게 약해 빠져서, 사제 나부랭이가 시건방진 소릴 해대는데도 뚜들겨 패기가 참 힘들다는 거야.”
툭!
제갈소미가 발치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것은 일견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데굴, 돌이 땅을 굴렀다.
움찔!
문득 이벽은 현기증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그러나 비무 중에 한눈을 파는 건 멍청한 짓이다. 황급히 도로 눈을 떴다.
제갈소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 분명히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 갑자기 무서워졌어?”
“…….”
무언가가 이상하다.
우수수, 오한이 등줄기에 일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탓!
제갈소미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날렵하지만 정직한 찌르기. 눈에 뻔히 보이는 움직임.
후웅, 탁!
그러나 이벽의 반응은 한발 늦고 말았다. 황급히 쳐냈으나 자세가 흐트러졌다.
빠악!
틈을 놓치지 않고 제갈소미의 검이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이벽은 숨을 삼켰다.
탁, 타악, 탁!
“정신 차려야지, 꼬맹아?”
눈에 익은 삼재검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벽의 손발이 한심하게 얽혀들기 시작했다. 청강검식을 펼치기는커녕 제대로 막을 수조차 없다.
무언가가 어긋났다. 마치 이벽의 눈과 귀와 피부가 서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른 듯했다.
퍼억!
“큭.”
빗장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타악, 뼈에 스미는 고통과 함께 이번에는 이벽이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왜? 이제 그만해줄까?”
“…….”
감각이 정상적이지 않다.
이벽은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마음을 가다듬고 몸의 상태를 이해한다. 현기증. 이명. 오한. 그렇다면.
이벽이 다시 전진했다.
타악!
“어쭈?”
세밀한 힘 조절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기엔 무리다.
이벽은 제갈소미에게 최대한 달라붙되 방어에 치중했다.
아슬아슬하게 치명타를 비껴가며 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인다.
조금씩 조금씩, 감각의 괴리를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타앙!
다시, 이벽을 밀쳐낸 제갈소미의 몸이 제비처럼 훅 떠올랐다. 한 바퀴 돌아 담장 위로 착지한다.
“내 비전을 보여줄게. 잘 받아봐.”
“…….”
그리고 제갈소미의 왼팔이 소리 없이 뻗어졌다. 꿀꺽, 이벽은 침을 삼켰다. 중단세를 취했다.
“소리비도(小莉飛刀).”
비도가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소매를 떠나 이벽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물러서듯 나아가고, 나아가듯 물러선다.
…내공?
아니, 그럴 리 없다.
필시 무언가 눈속임이 있다.
비틀!
바라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심해졌다. 그러나 눈을 감아선 안 된다. 궤적을 놓쳐선 안 된다.
후우욱
칼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이벽은 움직임을 참았다. 그리고 미세한 소리가 귀를 스쳤다.
따악!
목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손에 와 닿는 확실한 감각.
비도를 쳐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질적인 감각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훅, 이벽은 검을 고쳐잡았다.
정면으로 시야를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제갈소미의 모습이 없었다.
따악!
“컥.”
뒤통수에 통증이 일었다.
일순 온몸에 힘이 풀리며 이벽은 무릎을 꿇었다. 털썩,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후욱.
“…….”
그리고 현기증이 사라졌다.
엎드린 채 땅을 바라보았다.
이벽은 모든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인지했다. 어긋남이 사라졌고, 이명도 들리지 않는다.
“…이건 대체 뭐였지?”
“뭐긴, 진법인데.”
목소리는 뒤편에서 들려왔다.
“제갈세가 잘 모르니, 꼬맹아?”
훗, 제갈소미가 가볍게 웃었다.
“진짜 기초적인 양의진(兩儀陣)인데 더럽게 잘 걸리네. 에그, 그렇게 정신머리가 약해 가지고 어떡할래?”
“…내가 졌다.”
제갈소미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이벽과 시선을 맞추었다. 무릎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 이제 좀 이 사저를 존경할 마음이 드니?”
“…….”
“근데 말야, 난 이게 싫다?”
빙긋, 제갈소미가 웃었다.
“진법도 싫고, 비도도 별로야. 본인은 다치기 싫다고 멀찍이서 함정이나 깔고 비도나 깔짝이는 게 무슨 놈의 무인이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내 말이 맞아. 신산귀모, 낭중지추의 제갈세가. 다 듣기 좋은 말이지. 정작 중요한 무력이 시원찮으니 허울 좋은 말들로 타 세가한테 비웃음이나 당하는 거야.”
제갈소미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이벽에게 이벽의 과거가 있듯, 제갈소미에게는 그녀의 과거가 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근데 말야.”
툭, 제갈소미의 손이 이벽의 뺨을 두드렸다.
“만약에 누가 네 등짝에 칼을 꽂으려 들면, 치사하건 뭐건 일단 비도라도 던지고 볼 거야, 나는.”
“…….”
“사형제가 된다는 건 그런 거야.”
손가락이 뺨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따지고 들지 마. 미련한 네 사형이 가슴팍에 구멍내면서 열심히 버텨줬더니 건방지게 말야.”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두려움이 일었다.
“겁쟁이구나, 이벽.”
슥슥.
제갈소미가 또다시 이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이벽이 앞서 그녀 외의 누구에게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야 좀 꼬맹이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