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65)
170화. 열병
번뜩.
언미희는 눈을 떴다.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스로가 낯선 방, 그리고 낯선 침상에 눕혀있음을 확인했다.
“어으, 깜짝이야.”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시선을 돌리자 이내 바로 옆의 침상에서 마찬가지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언니, 깼어요? 흐아암~”
“…공손 소저.”
반쯤 걸터앉은 공손수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고양이마냥 쭉 허리를 펴다가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공손 소저? 부르는 방식이 왜 다시 예전으로 회귀했어요? 설마 이제 와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훅, 공손수가 거리를 좁혔다.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시 불러봐요. 나 누구예요?”
“…수야.”
“네, 언니.”
피식,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이내 언미희의 긴장이 풀어졌다.
“근데… 여긴 어디니?”
“그냥 보통 객잔인데요? 아, 동네를 말하는 거라면 이제 막 운남성에 접어든 찰나구요. 언니네 집까지 거의 다 왔어요~”
언미희는 일순 당황했다.
자신에게 있어 ‘집’이라 부를 만한 곳이 대체 어느 곳인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나.
언미희는 기억을 돌이켰다.
‘회택의 천향루로 돌아가라’는 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이벽의 마지막 명령이었으며, 공손수와 파진성은 그 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벌써 그렇게까지 왔구나.”
안휘에서 운남까지.
중원의 남서를 가로지르는 거리로, 결코 짧은 여정이었을 리 없다. 허나 기억은 마치 잘라낸 듯 텅 비어있었다.
그것은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줄곧 잠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정신을 차렸을 때마저 의식은 몽롱했으며, 꿈과 현실은 좀처럼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근데 언니, 안색이 왜 그래요?”
그때, 공손수가 말했다.
말마따나 언미희는 창백했다.
그리고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아하하, 글쎄…? 딱히 이유는 없는데. 너무 오래 잠만 자서 몸이 녹슬었나 봐.”
“…….”
꿈자리는 늘 좋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아버지의 꿈.
혹은… 얼핏 피투성이가 된 이벽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허나 그런 소리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몸, 많이 안 좋아요?”
“아니. 나쁘지는 않아.”
“그래요? 그럼 좋아요?”
“사실 좋지도 않아. 아하하.”
피식, 두 사람은 다시 웃었다.
안휘에서 헤어지기 전, 언미희는 소환단을 복용하고 이벽으로부터 추궁과혈을 받았다.
심마로 인해 내력을 다룰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하여, 기를 다루는 과정은 전적으로 이벽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고.
이벽의 추궁과혈은… 거짓말처럼 언가심법의 경로를 따랐다.
‘아니, 심지어는.’
완벽함, 그 이상이었다.
기의 움직임은 마치 언가의 가전무공에 대해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앞서 추궁과혈을 겪은 파진성도, 공손수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고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소환단의 내력은 잘 정제되어 자신의 단전에 안착했다.
허나.
그럼에도 손댈 수는 없었다.
단전 안에 자리한 기는 낯설었다.
평생을 수족처럼 다뤄왔던 내기임에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무리해서 다루려 했다간.
그대로 기혈이 뒤틀려 주화입마에 빠져들고 말리라는 확신만이 스쳤다.
또한.
이따금씩 단전은 진동하며 알 수 없는 열기를 뿜어내곤 했다.
그것은 마치 언미희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언미희는 저항할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불안한 꿈들이 반복되었다.
“…뭐, 나는 걱정은 안 해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언니는 언니니까 어떻게든 잘 해내겠죠. 그쵸? 천하의 오라버니도 한때는 드러누워서 골골 앓았다는데…….”
“…나도 내 걱정은 안 해.”
“그럼요? 설마 오라버니 걱정이에요? 에이, 그쪽은 더 쓸모없어요. 천하의 취풍신개께서 직접 붙어있는데 대체 뭐가 걱정이에요?”
“아하하, 그러게.”
분명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언미희는 꿈자리를 털어내었다.
“후… 그나저나 꽤 덥네요. 계절도 계절이지만 확실히 아래쪽 동네라서 그런가…….”
공손수가 가슴께를 펄럭였다. 창문으로 다가간 뒤 드륵, 닫혀있던 가림막을 열었다.
“어라?”
훙, 훙.
채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창 바깥에서는 어스름한 빛 속에서 인영 한 명이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파 소협이네요?”
“…그러게.”
후웅. 훙.
검로는 퍽 고요했다.
일검 일검 내지르는 동작에는 기합조차 실리지 않는다. 허나 고요하다고 해서 날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
두 사람은 잠시 파진성의 검을 바라보았다.
한때 요란하기 짝이 없던 파진성의 검은 어딘가 새로운 화두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이네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돌이켜보면, 비룡대는 늘 아침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네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바꿔가며 비무를 반복하곤 했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 이야기임에도… 마치 퍽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심심한데 방해나 좀 해볼까요?”
“…아하하.”
두 사람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연이어 창문을 타 넘었다.
“파 소협, 수련은 잘 돼요?”
“…헹!”
훅, 파진성의 검이 멈추었다.
“말도 마라! 너무 빨리 강해지고 있는 나머지 내 자신이 두려울 정도다, 케헤헤!”
검신을 어깨에 얹은 채 킬킬거리던 파진성의 시선이 공손수 뒤의 언미희에게 가 닿았다.
“어, 부대주. 깼냐?”
“아하하. 오랜만…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가요?”
“…헹.”
슥, 파진성이 검을 겨누었다.
“잘됐네! 그럼 한 판 뜨자.”
“……?”
언미희의 말문이 막혔다.
“…미쳤어요, 파 소협?”
공손수가 대신해서 말했다.
“아, 걱정 마라. 나도 내력 없이 할 테니까. 외공과 초식만으로 한 번 신나게 붙어보자고. 케헤헤!”
“…….”
파진성의 어투는 진지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 심마고 나발이고 난 그딴 건 모르겠고! 자고로 무인이라면 몸살 같은 건 근성으로 극복해야지. 케헤헤!”
“…파 소협, 적당히 해요. 쫌.”
“아, 쥐방울 넌 빠져! 덤비라고 부대주! 왜? 언제는 짐짝이 되기 싫으면 일초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며?”
“……!”
문득 언미희는 기억해내었다.
암영각에서 독에 당해 쓰러진 이후 동촌장 목일령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분명 파진성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케헤, 각오 단단히 하고 덤비라고! 내 그간의 설움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지!”
“…….”
언미희는 이해했다.
태도는 거칠었으나.
파진성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할 수 있을까?’
꾹, 언미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훅, 채앵.
허나 그때였다.
파진성의 몸이 왼쪽으로 훅 튕겨 나갔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선 공손수가 냅다 기습을 가한 것이다.
“케헤헤! 그 정도야 뻔하지!”
허나 파진성 역시 충격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그 즉시 검을 뻗어 막아낸 것이다.
“흥, 소환단 처먹고 죽을 뻔했던 놈이 입은 살아서는… 놀고 싶으면 덤벼요. 내가 처발라줄 테니.”
“케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챙, 채앵!
그리고.
두 사람이 엉켜 들기 시작했다.
타다닷, 후욱.
공손수의 움직임은 표홀했다.
이곳저곳에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시선을 어지럽히는 그 동작은 눈으로 좇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반면, 파진성은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있었다.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잠자코 기다린다. 그리고 한순간, 파진성의 검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챙, 채앵!
“얼씨구? 그걸 막아요?”
“그니까 다 보인다고! 케헤헤!”
이내 두 사람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무인이었다.
“…….”
언미희는 실감했다.
확실히, 두 사람의 수준은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 물론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으며.
또한 잘된 일이었다.
허나…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스스로의 내면에 발목을 붙들린 채, 일방적으로 지켜지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말마따나 일 초라도 빨리 강해져서 언젠가는 이벽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허나.
‘…분해.’
꾸욱.
언미희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이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 역시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우우웅.
그리고 그때, 내력이 진동했다. 확, 단전에서 불처럼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큭!”
언미희가 주저앉았다.
그 즉시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또다시 저항할 수 없는 수마가 밀려왔다.
털썩, 온몸에 힘이 빠졌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숲을 가로질렀다.
내부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의 일로 인해 공손수와 파진성은 퍽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그리 큰일은 아녜요.”
월향이 말했다.
그녀의 손길이 맞은편에 앉아 고이 잠들어있는 언미희를 향했다. 슥, 뺨을 훑자 미열이 느껴졌다.
“다만… 몸과 마음이 어긋나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잠에 빠져드는 거예요. 가엾게도.”
“…….”
“마음이 섬세할수록 재능 역시 그에 비례하지만, 그렇기에 상처를 입기도 쉽죠. 어떤 의미로는 비룡대주와 마찬가지예요.”
언미희를 바라보는 월향의 표정이 퍽 복잡해졌다. 동정, 혹은 그 외의 어떤 감정이 언뜻 비추었다.
“어쨌건… 이 아이는 우리 하오문에서 찾은 최고의 재능이에요. 그러니까 분명히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케헤.”
파진성이 입을 열었다.
“그냥… 모처럼 제정신이 든 것 같길래 몸 푸는 것 좀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말야… 쩝.”
“응, 괜찮아요, 소협. 덕분에 나아가던 게 조금 도졌을 뿐이에요.”
“…….”
파진성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식견이 꽤 인상 깊군.”
그때, 줄곧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있던 양호명이 말을 꺼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양호명에게로 쏠렸다.
“내 사파의 무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소만… 소저의 무학에 대한 관점은 퍽 흥미롭소. 기회가 된다면 언제 한 번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공손수가 조심스레 말했다.
“…좋을 대로 해라.”
“그게… 대협, 왜 여기 계세요?”
“……!”
양호명의 표정이 흔들렸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는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 사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
말마따나.
태극검존의 제자인 송영영조차 이미 일행을 떠났으므로, 양호명이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가는 길이 겹치는 데까지만 함께하려 했다. 허나.
막상 호남 인근을 스쳐 지나갈 때, 양호명은 갈등을 느꼈다.
비룡대라고는 해도 대주가 빠진 이상 절정고수 하나 없는 애송이들 뿐이다.
하오문 수호대원이라 하는 월향의 음공은 퍽 대단하지만… 그 역시 실질적인 무력이 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룡대주나 사파와의 관계 개선은 사실상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
사파의 땅을 먹기 위해 호남으로 진출한 것이, 졸지에 사절단 같은 역할이 되고 말았다.
슥.
“고마워요. 가가.”
“……!”
그때였다.
월향이 양호명의 팔짱을 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의 안위가 신경 쓰여서 남아준 거죠? 감사하고 있어요.”
“에이씨, 진짜. 가가 같은 소리 좀 그만하시오! 그때는 상황이 어쩔 수 없지 않았소?! 여인네가 천박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머, 하지만 저는 기녀인걸요?”
“크……!”
양호명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요. 무학도 좋지만… 가가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내에게 정인이란 얘기는 처음 들어봤—”
타앙!
양호명이 차창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마차 지붕 위에 드러눕는 소리가 들렸다.
훗, 월향이 웃음을 흘렸다.
“양 대협, 꽤 재밌는 사람이죠?”
“그러게요. 적으로 만났을 땐 엄청나게 재수 없었는데… 이상한 데에서 순박한 아저씨네요.”
공손수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마차가 나아갔다.
운남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창밖의 풍경은 점점 더 이색적으로 변해갔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딱히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누구의 추격도 걱정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있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물론, 마냥 안심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언뜻언뜻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쳤다.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허나.
이벽은 ‘휴가’라고 했다.
언젠가 이벽의 곁에서 다시 함께 싸워야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때로는 긴장을 푸는 요령을 익힐 필요가 있—
덜컹!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사방에서 흉흉한 기척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의를 감출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타앙.
“웬 놈들이냐—?!”
지붕 아래로 뛰어내린 양호명이 외쳤다. 챙, 발검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아.”
공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휴가는 무슨.”
“야, 쥐방울. 알지? 싸우다 안 되겠으면 냅다 이 오라버니 뒤에 숨는 거? 케헤헤!”
“뭐래, 깝치지 마요, 파 소협.”
피식, 두 사람이 마주 웃었다.
탓, 그리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