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78)
183화. 수라의 길 (4)
“…….”
이벽은 침묵했다.
상황을 생각한 뒤, 다시금 칠독문주 모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묻겠소. 당신들이 납치한 마을의 여인과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글쎄, 모두 팔아버렸다니까? 몇 번을 다그친들 이미 내 손에 없는 걸 어쩌겠소?”
전각의 꼭대기 위에 선 모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 훅, 이벽의 검이 흔들렸다.
서걱, 툭.
“커억… 끅…….”
그리고.
저마다의 중상을 입고 널브러진 채 신음하던 칠독문의 무사들 중 하나의 목이 떨어졌다.
툭, 잘려 나간 머리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띤 채 이벽의 발치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되찾아올 방법은?”
“…….”
“잘 생각해보시오, 칠독문주. 당신이 그들을 팔았다면, 당연히 누구에게 팔았는지 알고 있을 테고 따라서 되찾아올 방법 또한 있겠지. 그렇지 않소?”
슥,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맨입으로 내놓으라 하는 게 아니오. 살아있는 목숨과 목숨을 교환하잔 말이오.”
고작 하나를 베었을 뿐, 아직도 이벽의 주위에는 살아있는 목들이 몇 개씩이나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가 이벽의 목을 노리고서 달려들었던 이들이므로, 이벽이 그 목을 친다고 한들 그릇될 것은 없었다.
허나.
“…크하핫! 으하하핫!”
모간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원, 비룡대주께서는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으시군! 으하하핫!”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칠독문주와 자신 사이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핫!”
배를 잡고 웃던 모간은 다시 끊어내듯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짐짓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자랑스런 칠독문의 제자들아.”
이벽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안타깝게 되었구나. 허나 너희의 존재가 지금 사문과 가족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니… 이제 그만 편해지도록 하거라.”
“…존명.”
그리고.
콰득.
한순간, 쓰러진 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피가 뿜어졌다. 입 안에서 독단을 씹은 것이다.
“커헉, 허억……!”
“헉……!”
툭.
남은 사지가 축 늘어졌다.
헐떡이던 호흡을 멈추었다.
앞서 이벽을 습격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두머리의 명령 한 번에 목숨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자, 비룡대주. 이제는 교환할 목숨이 없어졌소.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그리고 모간이 말했다.
자신의 명령으로 자파의 제자들이 스러졌음에도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비룡대주, 어린 나이에 그만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참으로 대단하오. 허나… 스스로의 언행이 우습다고 생각지는 않으시오?”
다시, 이벽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벽을 대신하여 모간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신이 죽인 우리 제자들을 둘러보시오. 보다 강한 힘 앞에서 약자의 목숨 따윈 참으로 파리와 같지.”
“…….”
“그 와중에 납치해 간 아이와 여인을 내놓으라니, 비룡대주께선 무지렁이들을 위한 협객이라도 될 생각인가 본데… 그럼 하나 묻겠소.”
핫, 모간이 코웃음을 쳤다.
“강한 힘으로 약자를 핍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한다면,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와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이오?”
“…….”
그것은 궤변이었다.
언쟁할 가치조차 없다.
허나 이벽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것은… 칠독문주의 말이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이 아닌 ‘진심’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글쎄, 내 지금 비룡대주께 질문하지 않았소? 답하기 어렵다면야 질문을 조금 바꾸지. 대체 비룡대주께선 왜 ‘목숨이 그렇게 귀하다’고 생각하시오?”
“그만.”
‘생각의 차이’는 뚜렷했다.
설득하고 있을 이유도 없다.
“칠독문주, 당신의 뜻은 잘 알았소.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단 말을 어렵게도 하시는군.”
“크하핫! 이거 무서워서 질문도 함부로 못하겠군 그래!”
모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려오시오. 칠독문주.”
“어이쿠,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협객 나으리께서 서슬 퍼런 눈으로 버티고 계시는데… 이 악적 나부랭이가 어찌 감히 내려가겠소?”
“…….”
“그러니… 이 모간의 목을 치고 싶다면 비룡대주께서 직접 예까지 올라오시는 수고를 하셔야 할 것 같소.”
“…그렇군.”
이벽은 마침내 이해했다.
시선을 내려, 모간이 딛고 선 전각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외벽은 단단했고 둘레는 넓었으며 높이는 몇 층이나 되는 듯했다.
“암영각의 흉내라도 내나 보군.”
“……!”
“전각 안에 무슨 하찮은 술수를 부려놨는지는 모르겠소만, 그것으로 정녕 충분하다고 생각하시오?”
그것은 ‘자신감의 근거’였다.
거리가 멀어 쉬이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모간의 경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도에서 자신만만함이 묻어나는 것은… 이벽이 무슨 짓을 한들 ‘자신만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룡대주, 고작해야 제자 몇 명을 베었다고 해서 이 칠독문이 그리 호락호락할 거라 생각진 마시오.”
모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태연한 언행 속에 감춰져 있던 초조함이 비로소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
내려다보는 자와 올려다보는 자.
눈이 부딪혔고 심계가 뒤엉켰다.
굳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줄 필요는 없다.
이벽에게는 이대로 외곽을 타고 올라가 목을 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허나.
그 정도의 계산은 분명 모간의 머릿속에도 들어있을 것이다.
“…….”
이벽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벅.
“좋소, 채점해주지.”
마침내 이벽이 걸음을 뗐다.
널브러진 시신들을 지나쳐 전각의 정면에 난 철문으로 다가섰다.
“나는 일찍이 암영각에도 올라봤고 당가와도 부딪혀봤으니, 어디 한 번 당신네 독심이 어느 정도 수준이나 되는지 평해주겠소.”
그리고 철문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기다리고 계시오.”
핫, 모간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거 영광이군 그래! 걱정 마시오. 내 술이라도 한잔하며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
끼익.
이벽은 철문을 밀쳤다.
그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어둠뿐인 빈 공간을 가로질렀다.
철컥, 쿠웅.
열 발자국을 떼자 이내 등 뒤에서 철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치이익.
다시 사방에서 매캐한 무언가가 분사되는 소리를 들었다.
철커덕.
쿠구구궁.
그리고 바닥이 흔들렸다.
훅, 슈슈슉.
곧이어 어둠 속에서 화살과 암기 따위가 우르르 쏘아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
그것은 기관(機關)의 일종인 듯했다.
살의를 담은 온갖 것들이 이벽을 향한다. 허나 이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알량했다.
소란이 이는 와중, 이벽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히 가로막힌 천장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벽은 기다리고 있으라 말했고, 모간은 기다리고 있겠노라 답했다.
허나.
그저 ‘기다리고 있을’ 리 없다.
짐작건대 위쪽에서 시간을 끌며 이벽의 추이를 살피다 위험하다 싶은 순간 모간은 분명 몸을 빼내어 달아날 것이다.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벽은 스스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상대의 ‘믿는바’를 철저히 부셔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주지 않는다.’
분노가 들끓었다.
훅, 선천의 힘이 갈라졌다.
그리고 이내 독과 암기 따위가 이벽의 지척까지 이른 순간, 목천의 영역 속에서 호흡을 들이켰다.
가장 최근의 깨달음이 응답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창공비검(蒼空飛劍).
파아앙.
이벽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었다.
휙, 탱그랑, 탱그랑.
이벽을 향해 날아들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흩어졌고 바닥에 추락했다. 그리고.
타앙, 쐐애액.
이벽의 몸이 솟구쳤다.
콰아아앙.
그대로 천장을 관통했다.
슥, 서걱.
“…커억!”
콰앙.
콰아아앙.
서걱, 쿠우웅!
가로막는 모든 것들이 베어졌다.
검은 사람의 몸과 물건을 가리지 않았으며, 철판을 덧댄 몇 개의 천장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찢어졌다’.
여섯 개의 묘리가 일검처럼 펼쳐졌으며, 그 무엇도 날아오르는 이벽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지붕 위로 신형이 솟구쳤다.
이벽은 새벽하늘의 달을 보았다.
“…….”
후우, 이벽은 호흡을 뱉었다.
칠독문주의 자신감이 깃든 전각을 짓뭉개고 올라서는 것은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커…억!”
발아래에서 신음이 흘렀다.
이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팔이 잘려 나간 칠독문주 모간이 이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신이 담긴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 * *
쿠구구구구궁.
전각이 ‘관통’되었다.
쿠구궁, 콰앙, 콰아아앙!
“크… 크아아악!”
“으아악, 으아아악!”
이내 여기저기서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는 비명이 빗발쳤고 지붕 위에는 균열이 그어졌다.
명백한 붕괴의 전조였다.
허나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도 모간은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눈빛이었다.
“…이,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훅.
다음 순간.
하늘을 향해 치솟던 이벽의 몸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검을 앞세우며 모간에게로 짓쳐 들었다.
“…크, 으아아아—!!”
그제서야 모간이 반응했다.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남은 왼손을 내뻗었다. 손끝에 화려한 강기가 모여들었다.
필생의 일장이었다. 허나.
훅, 서걱.
이벽의 몸에 닿지 못했다.
허깨비처럼 일장을 피해낸 이벽이 검을 휘둘렀고, 모간의 두 다리에 사선의 빗금이 그어졌다.
기우뚱.
그리고 빗금이 벌어졌다.
두 다리의 무릎 아래가 몸에서 분리되었고, 이내 모간의 상체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후우우욱.
“으, 으아아아악—!!”
사지 중에서 오직 왼팔만이 남은 몸뚱아리가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다.
덥석.
그때 이벽의 왼손이 뻗어졌다.
모간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벽의 발이 허공을 딛듯 가볍게 유영했다.
툭.
이내 지면에 내려앉았다.
발끝은 낙엽처럼 사뿐했다.
쿠쿵. 쿠쿠쿠궁!
그리고 전각이 무너져내렸다.
몇 개의 큰 조각으로 나뉜 전각은 다시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며 와르르 붕괴했다.
파편은 주변의 집채를 덮쳤으며, 이내 숨죽이고 있던 칠독문의 식솔들이 아우성을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화르륵.
등불이 쓰러졌고, 이내 불길이 사방으로 옮겨붙으며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칠독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퍼어억.
“…….”
그때였다.
이벽은 복부에 통증을 느꼈다.
모간의 하나 남은 왼손이 이벽을 파고든 것이다. 맹독이 스며들었다. 허나 물론 선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게 전부요?”
“…….”
“미안하지만 채점 결과는 형편없었소. 암영각이나 당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지경이군.”
퍼억.
이벽은 모간을 땅에 내팽개쳤다.
“크윽… 허억!”
“자, 이제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보지. 어떻소 칠독문주, 납치한 이들을 되찾아올 수 있겠소?”
“으아… 크아아아아아!!”
모간이 몸부림쳤다.
눈 깜짝할 새 모든 걸 잃었다.
허나 하나뿐인 팔로는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잘려 나간 오른팔과 두 다리의 단면에서 꿀럭꿀럭 피가 터져 나왔다.
“무, 문주님?!!”
“아, 안 돼… 으아아아—!!!”
그때였다.
두 사람을 발견한 제자들과 식솔들이 절규했다. 타다닷, 그리고 몇 개의 인영들이 이벽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죽여야 할 자와 죽이지 말아야 할 자를 분별해야 한다. 허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철컥, 이벽은 검을 잡았다.
“크아아아악!! 멈춰라, 이 주제도 모르는 쓰레기들아—!!”
허나 그때였다.
널브러진 모간이 일갈했다.
멈칫, 달려들던 이들이 멈추었다.
“무, 문주님……!”
버둥버둥.
“이… 벌레 새끼들이—!! 감히 내 싸움에 끼어들려고 해?! 벌레면 벌레답게 얌전히 짓밟힐 일이지 네까짓 버러지들이 발버둥 친들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모간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그래!! 비룡대주, 아주 훌륭하오! 마음만 먹으면 잘하지 않소?! 어떻소, 약자를 짓밟고 유린하는 기분은?! 아주 그만이지 않소?! 으응?! 크하하핫! 으하하핫!!”
그리고 다시 이벽을 향했다.
흉악한 몰골로 괴소를 터뜨렸다.
“사파란 본래 이런 거요! 강자가 곧 법! 약자의 목을 베고 계집은 겁탈하며 아이는 팔아버리는 것! 그게 사파무림이란 말이오—!!”
타닷, 탓.
사방으로 번지는 불길 속에서 모간의 눈빛이 광기로 희번득거렸다. 움찔, 이벽이 흔들렸다.
다리를 베고 오른팔을 베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허나… 그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상대에게서 처음으로 ‘위협’을 느꼈다.
“마침내…!! 그 빌어먹을 혁군악과 패왕가가 무너지고 ‘호시절’이 찾아왔거늘! 아쉽군, 참으로 아쉬워…! 클클, 크하하핫—!!”
“…실성했군.”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즉시 목을 치려 했다. 허나.
“크하하, 어림도 없지! 당신은 ‘적폐’요. 비룡대주! 어디, 당신의 잘난 의협심이 얼마나 갈지 내 지옥 밑바닥에서 지켜보고 있겠소! 크핫, 으하하핫!”
푸확.
그리고 모간이 피를 토했다.
그 역시 독단을 깨문 것이다.
“끅, 으그극……!”
털썩.
그리고.
목이 베이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내의 남은 팔 하나가 이내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