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56)
262화. 협행 (2)
저벅.
이벽은 돌아섰다.
당려옥에게 두드려 맞은 뺨을 문지르며 두 여인들이 나아간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왔던 길을 따라 되짚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지났다.
훅.
왼편의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인기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예의 뒷골목에서부터 일행의 뒤를 밟았던 추적자들이었다.
예상대로, 이벽과 두 여인이 찢어지자 추적자들은 소리 없이 이벽을 지나쳤다. 그리고 당려옥과 정연화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저벅, 탓.
“…….”
그 기척마저 충분히 멀어진 후.
이벽은 다시 돌아섰다.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접어든 뒤, 발소리를 죽이며 천리향의 냄새를 좇아 걸음을 옮겼다.
딱히 기척을 죽이는 재주는 없으나 그저 지면에서 조금 몸을 띄우는 것만으로 발소리는 사라졌다.
부스럭.
다시 일각도 지나지 않아 추적자들의 기척을 따라잡았다.
‘…세 명.’
수풀 속에 몸을 숨긴 것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공터에 자리 잡은 정연화와 당려옥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허나 물론, 그러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이벽의 존재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팍, 파팍.
“에이, 잘 안 되네… 아 됐다.”
당려옥은 불을 피우는 데 퍽 애를 먹는 듯했으나 이내 어렵사리 불씨를 피워내었다.
“피곤하죠? 갑자기 막무가내로 끌고 와서 미안해요, 소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
“세상에는 절대로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내란 게 있거든요. 좌우간 불침번은 제가 설 테니… 소저는 먼저 주무세요.”
당려옥의 언행은 퍽 능청스러웠다. 반면 정연화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물론, 추적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것이다.
스르륵.
허나 이내 정연화의 몸이 무너졌다. 비로소 마취제와 산공독이 몸 안에 돌기 시작한 탓이었다.
혼자 남은 당려옥 역시 불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는 이내 한켠으로 무너졌다. 영락없이 마취제에 취한 모습이었다.
허나 추적자들은 신중했다. 두 사람이 쓰러진 이후에도 반 시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벅.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흑의인이 쓰러진 여인들에게 다가섰다.
“…푸핫, 뭐야 이거? 간만에 무림인으로 추정된대서 긴장했더니 순 골 빈 계집들이네, 이거.”
사내가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이내 당려옥에게로 다가간 뒤 얼굴을 만지작대며 좌우로 뜯어보았다.
“대장, 가까이서 보니까 이년들 장난 아닌데요, 이거? 어느 집 딸년들인진 몰라도 우리 큰 건 제대로 올린 거 아닙니까?”
“…상품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연하죠. 하루 이틀 일합니까?”
쩝,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를 제외한 두 명의 흑의인이 각각 정연화와 당려옥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산공독을 먹인 것도 모자라 다시 곳곳의 혈을 짚고, 밧줄로 묶는 솜씨는 퍽 능숙해 보였다.
“호오?”
문득 당려옥의 몸을 수색하던 사내가 그녀의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비수를 꺼내 들었다.
“헹. 안 됐지만, 소저. 이건 내가 받아 가지. 이제부턴 이딴 게 아무 필요 없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테니 말야.”
“…….”
이벽은 치솟는 살심을 억눌렀다. 당려옥의 판단을 믿기로 한 이상, 지금 저 자들의 목을 베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부스럭, 타앗.
이내 흑의인들은 두 여인을 각각의 자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어깨에 들쳐업은 채 땅을 박찼다.
타앗.
추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잠깐의 거리를 둔 뒤, 이벽 역시 뒤를 따랐다.
천리향을 따라왔던 길을 되짚자 이벽 앞에 나타난 것은 역시 조금 전 떠나왔던 도시였다.
허나 향의 자취는 도시의 외곽을 빙 돌아서 지나쳤다. 그리고 인근의 산길로 이어졌다.
탓.
이후 일각 정도 이벽은 산을 올랐다. 이윽고 산의 중턱에서 담을 두른 장원의 대문을 맞이했다.
‘모가장(毛家莊).’
이벽은 현판을 확인했다.
도시와 가까운 산속에 자리한 그것은 부유한 귀족이나 관리의 별채 같은 곳으로, 겉보기에는 딱히 이상할 것이 없었다.
타앗.
이벽은 담을 뛰어넘었다.
그러자 대나무가 가득한 마당이 나타났다. 산속에 자리한 장원답게 마당은 크지 않았다.
또한 내부의 분위기 역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경계는커녕 인기척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천리향은 명백히 정면의 건물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또한.
이벽은 보다 예민해진 후각을 통해 ‘알 수 없는 냄새’가 장원 내에 함께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잘 모르겠군.’
어쨌거나 이벽은 대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목적은 단순한 습격이 아닌 ‘구출’이다.
그리고 납치된 양민들의 위치를 확인한다면, 당려옥은 소란을 일으켜 이벽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고로 이벽은 잠자코 기다렸다.
“…….”
허나 그렇게, 아무런 신호도 없이 밤은 무르익었고 고요 속에서 반 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불안감이 자라났다.
* * *
“대장, 어떻습니까?”
“장주님께서는 바쁘신 것 같다. 나중에 확인하겠다고 하시더군. 우선은 보관함에다 넣어둬라.”
“…그렇습니까? 거 아쉽네요. 모처럼 건진 최상품인데 말입니다. 그것도 둘씩이나.”
각기 자루를 하나씩 짊어진 두 명의 흑의인들 중 한 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포상, 기대해도 되겠죠?”
“그래, 수고했다.”
툭툭, 대장이라 불린 사내가 다른 두 흑의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자루를 든 두 사내 역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건물의 내부에는 거의 아무런 빛도 없었으나, 사내들은 어둠에 익숙한 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철컹, 끼이이익.
문득 사내 한 명이 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벽의 틈이 열리며 시커먼 공간이 드러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저벅저벅.
퍽 깊은 계단을 내려가자 이내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고 횃불 아래로 지하의 정경이 드러났다.
중앙의 복도를 끼고 좌우로 철창이 드리워진 내부의 모습은 명백한 감옥의 형태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약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진 ‘상품’들이 주렁주렁 묶여있었다.
풀썩.
사내는 어깨에 짊어진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 손에 넣은 새로운 상품을 자루 안에서 꺼내었다.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쩝, 다시 봐도 아깝군, 그래.”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지금의 일을 시작한 지도 퍽 오래되었으나, 이 정도의 상등품을 손에 넣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슬쩍 빼돌려서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대장이 직접 함께했던 이상 그럴 수는 없게 되었다.
“…살짝 맛만 볼까?”
스윽.
이내 음심을 품은 사내가 상품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번쩍.
허나 그때였다.
‘상품’이 눈을 떴다.
“퉷!”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를 마주한 당려옥의 입안에서 날카로운 침이 발사되었고, 정확히 사내의 오른쪽 눈에 꽂혀 들었다.
“…끄, 으아—!”
눈을 당한 사내가 얼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허나 이내 그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휙, 푸욱.
당려옥이 머리를 묶은 비녀를 풀어냄과 동시에, 그 날카로운 끝이 사내의 목울대를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큭… 그르륵.”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이제 지옥으로 가실 테니 소녀의 비수는 다시 돌려받을게요!”
푸확.
비녀가 다시 회수되었다.
사내의 신형이 피 끓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고, 당려옥의 손이 그 품속을 향했다. 찰나의 순간 빼앗긴 비수를 회수했다.
훅.
그리고 당려옥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정연화를 짊어진 또 한 명의 적을 마저 치려 했다. 허나.
퍼어억.
“…꺼어억.”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확인했다.
채 자루를 내려놓지도 못한 또 한 명의 흑의인 역시 허파가 찢어지는 듯한 신음과 함께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웅, 털썩.
쓰러진 몸이 땅에 늘어졌다.
당려옥의 시선이 사내를 훑었다. 등의 척추 한가운데가 정확히 손바닥의 모양으로 움푹 파여있었다.
“…….”
짐작건대.
피할 새도 없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자루 안에서 묵직한 일장이 파고든 모양이었다.
부우욱.
이내 자루가 찢어졌다. 그리고 안쪽에서 태연한 행색의 정연화가 몸을 일으켰다.
“…소저, 어떻게?”
당려옥은 조금 놀랐다.
당가 비전의 해독약인 만해환을 내어주기는 했으나 스스로 내력을 회복하고 점혈마저 풀어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별 거 아니에요.”
정연화가 조용히 답했다.
“그쪽이 우리 사문의 물줄기에 산공독을 풀었을 때도… 나는 어떻게든 이상함을 눈치채고 도망쳤으니까요.”
정연화의 몸 주위로 은은한 금빛 서광이 서렸다. 파사의 기운을 지닌 아미의 무상금광심공(無想金光心功)이었다.
“…그, 그러네요. 호홋.”
당려옥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미제일의 후기지수였다.
같은 삼봉이니 뭐니 해도, 무의식중에 나이가 어린 그녀를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얕잡아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내 두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퀘퀘한 냄새가 감도는 지하 내부에는 몇 개의 철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푸줏간의 고기마냥 주렁주렁 묶여있는 몰골의 여인들이 있었다.
부르르.
정연화의 어깨가 경련했다.
“…정 소저.”
당려옥이 다가서려 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풍경이었다. 허나 무림초출인 정연화에게는 퍽 충격적인 장면일 터였다.
퍼억, 콰득.
허나 다음 순간.
정연화의 발길질이 경련하던 흑의인의 목을 짓밟았다. 마침내 사내의 목뼈와 함께 목숨이 어긋나는 소리가 울렸다.
“…왜요?”
정연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녜요. 호호.”
“…….”
이내 당려옥과 정연화는 본격적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숨이 끊어진 흑의인들의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발견했다.
철컥, 철컥.
정연화가 돌아다니며 내부의 창살에 걸린 자물쇠들을 열었다. 그리고 여인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풀어주었다.
“괜찮으세요?”
“윽… 으으으!”
풀려난 여인들은 제대로 된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물론, 충격에 의해 마음을 상실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젠 괜찮아요.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제가 반드시 집으로 돌려 보내드릴 테니까요.”
여인들을 부축하여 한 곳으로 수습하는 한편, 정연화가 따뜻한 목소리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웃음이 나올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애써 웃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문득, 당려옥은 서늘함을 느꼈다.
기실 그것은 객잔에서 독을 먹고 악적들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순간부터 줄곧 그녀를 사로잡았던 찜찜한 감각이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야.’
허나 당려옥은 고개를 저어 찜찜함을 털어내었다. 그리고 생각을 달리했다.
지하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한 안에 붙들려있는 이들은 모두 젊은 여인들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열 명가량에 불과했다.
즉.
인근 지역을 온통 공포로 휩쓴 인신매매집단의 현장이라고 하기에는 붙잡혀 있는 이들의 머릿수가 퍽 모자랐다.
‘…다른 공간이 더 있을지도.’
바깥에는 이벽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납치된 양민들을 발견하는 즉시, 소란을 통해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허나 구해야 하는 이들이 이 지하 공간의 어딘가에 좀 더 남아있다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섣부른 무력 충돌은 자칫 구해낼 수 있었던 목숨들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당려옥은 감각에 집중했다.
이내 지하공간 특유의 텁텁한 내음 속에서 무언가 매캐한 냄새가 희미하게나마 맡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냄새가 흘러들어오고 있다. 당려옥은 냄새를 따라 움직였다.
탁, 타악.
벽 이곳저곳을 두드려보았다.
투웅.
그리고.
좌측 한켠의 벽을 두드렸을 때, 저편에서 텅 빈 소리가 돌아왔다. 당려옥은 즉시 귀를 기울여보았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역시 이 뒤에 공간이 있군요.”
당려옥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저. 잠깐 이리 와볼래요? 혹시 이 벽 어딘가에 감춰진 문 같은 게—”
저만치의 정연화를 향해 말했다.
허나 그때였다. 벌벌 떨고 있는 여인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정연화의 모습에서 당려옥은 ‘위화감’을 느꼈다.
“…조심해요! 정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