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26)
334화. 매화검의 주인 (2)
우우웅.
자하신공의 기운이 제갈소미의 팔을 타고 손끝에 맞닿은 매화검선 소청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추궁과혈을 통해 헝클어진 노인의 내상을 다스린다. 침묵 속에서 반 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흘흘, 쿨럭!”
기침과 함께 노인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태사부님?”
“글쎄다. 잘 모르겠구나. 흘흘흘!”
“…….”
위중한 내상을 입고도.
노인은 퍽 기분이 좋아보였다.
“다만… 그렇지. 너를 보고 또 저 아이들을 보고나니… 지난 시절들이 네게 퍽 나쁘지 않았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흠칫.
제갈소미의 표정이 흔들렸다.
“…네, 뭐.”
이내 작은 웃음이 번졌다.
또한 기억들이 함께 스쳐갔다.
각자의 사연으로 단전을 잃고 폐인이 되었던 사형제들은 떠돌이 약장수를 자처하는 스승에 의해 주워졌고.
시골문파에 모여 낮에는 각자 밥벌이와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무공을 겨루며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언젠가는 다시 내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삼재검에 몰두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허나.
언제부터였던가… 내력을 되찾는 것이 더는 그녀의 ‘최우선사항’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한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내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스승은 악적에게 목숨을 잃었고, 아무런 힘이 없던 그녀는 사제들과는 달리 그 최후조차 지키지 못했다.
‘나쁘지 않았던 삶’이 무너지는 것은 그토록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마주했다.
분노는 열병과 같았고.
제갈소미는 마을을 뛰쳐나왔다.
늘 ‘매화로부터 도망치듯’ 봄이면 화정촌을 나섰다가 여름이 되어서야 다시 나타나곤 했던 스승의 단서를 쫓아 막무가내로 화산에 이르렀고.
마침내 시골마을 화정촌과 같은 이름을 지닌 이곳 화정봉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스승의 스승을 만났다.
우우웅.
“…….”
한편, 노인 또한 흘러들어오는 내력을 통해 제갈소미의 마음에 이는 흔들림을 읽어내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천.’
그것은.
천하십대고수, 매화검선이라 일컬어졌던 노인의 삶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이었던 직전제자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지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부순 채로 화산에서 내보내야 했던 이름이기도 했다.
이후 노인은 검을 놓았다.
사문에 대죄를 지은 죄인으로서, 망가진 몸을 이끌고 심산유곡에 틀어박힌 채 다시는 제자를 키우지 않으려 했다.
그저 홀로 늙어가는 것만이.
남은 여생이라 생각했다. 허나.
지난 가을, ‘제자의 제자’가 찾아왔다. 그렇게 노인과 여인의 시간은 겹치게 되었다.
‘이진천.’
또한 그것은.
노인이 오래 전 거둬들였던 어린 제자가 화산으로부터 도호를 내려받기도 전 자신이 직접 지어주었던 아명이었으며.
지금에 와서 노인 외에는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때문에.
난데없이 봉우리에 찾아든 어린 여아의 입에서 그와 같은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살려두었던 제자의 죽음을 알리는 여아의 담담한 목소리 앞에, 홀로 말라가려던 노인의 결심은 무너졌다.
노인은 여아를 받아들였고.
그녀에게 매화를 심어주었다.
또한 오로지 삼재검만을 갈고 닦아 절정이란 경지에 이른 여아의 심신은 마치 도를 이루기 위해 잘 다져진 토양과 같았다.
채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노인이 여아에게 전수한 매화는 기둥으로 자라났고 가지를 뻗었으며, 마침내 일대를 메우고도 남을 매화의 언덕을 이뤄내었다.
우우웅.
“…흘흘.”
현재, 노인의 몸 안을 스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전성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자하신공의 기운이었다.
과연 그 천고의 재능은.
과거의 제자를 빼다박은 듯했다.
“흘흘… 쿨럭!”
“…태사부님, 운기 중에는 웬만하면 흘흘 좀 자중하세요. 자꾸만 기운이 새나가잖아요.”
“알겠다 얘야, 흘흘!”
“…에효.”
우우웅.
한동안 추궁과혈이 이어졌다.
“…하아.”
제갈소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의 내상은 어떻게든 수습을 했으나, 고작해야 이 정도의 접전으로 내상이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애당초.
노인의 몸은 더 이상 무공을 펼쳐도 좋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 허나 노인은 사제들을 상대로 직접 나서겠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렸고.
기어코 사제들과 일전을 벌였다.
“이만 되었다 얘야.”
그때 노인이 말했다.
“일단은 집으로 가자꾸나. 흘흘.”
“…네.”
스윽.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산기슭을 따라 노인의 모옥으로 향했다.
“얘야, 그래도 간만에 만난 사제들인데… 이야기 정도는 나눠도 괜찮지 않았겠느냐?”
“…그 녀석들, 이야기는커녕 저를 보는 순간 주제도 모르고 집에 가라며 다짜고짜 앞길을 막아설 게 뻔하니까요.”
하아, 제갈소미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뭐, 보아하니 둘 다 죽지 않을 만큼의 힘은 쌓은 것 같고… 제 앞가림이야 알아서들 하겠죠.”
“…흘흘.”
“이야기를 하건 두들겨 패건… 그건 우선 각자 ‘할 일’을 마치고 나서 하면 그만이니까요.”
이내 두 사람이 모옥에 접어들었다. 제갈소미는 부엌으로 향했고, 언제나처럼 밥을 차렸다.
기실 지난 사흘간, 이벽과 일행들의 식사를 가져다준 것 역시 그녀의 역할이었다.
“둔한 녀석들 같으니.”
피식, 제갈소미가 작게 웃었다.
낙검문의 ‘집밥’을 먹고도 진법에 정신이 팔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사제들이 퍽 우스웠던 탓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후 노소간의 식사가 이어졌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갔으나, 기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는 해야 할 말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릇들이 빠르게 비워졌다.
탁.
“그럼.”
제갈소미가 젓가락을 놓았다.
“저도 이만 다녀올게요, 태사부님. 곡식이랑 채소절임은 겨우내 먹고도 남을 만큼 챙겨놨으니 밥해주는 사람 없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시고요.”
“…….”
이내 퍽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허나 물론 그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검선의 전인으로서 황보세가의 일전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고, 그것은 오로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얘야.”
노인이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태사부님. 이제 와서 딴소리하지 마세요. 애저녁에 얘기는 다 끝났잖아요.”
허나 제갈소미가 말을 끊었다.
“같이 간다고 해서… 지금의 태사부님이 뭘 할 수 있어요? 솔직히 걸리적거려요.”
“…흘흘, 이 검선이 그렇게나 못 미덥더냐? 내 소싯적에 마두 녀석들을 몇이나 베어 넘겼는지―”
타아앙.
그 순간, 제갈소미의 허리에 걸려있던 검이 검집째로 식탁을 두드렸다.
“태사부님.”
“…흘흘.”
그것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검에 불과했다. 허나 기실 어디에나 있는 흔해 빠진 검은 아니었다.
그것은 검선이 검선이라 불리기도 전부터 함께해왔던 애검이자, 한때나마 그 제자에게 물려주었던 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의 제자에게로 넘어갔다.
“이 검은 이제 제 거예요.”
“…….”
낙검문주 이진천의 검 낙천은.
막내제자 이벽의 것이 되었다.
허나 그 대신 대제자 제갈소미는 화산의 촉망받는 기재이자 전(前) 매화검수였던 청천의 매화검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그 검에 담긴 무게 또한 함께 짊어지리라는 의미임을 노인 역시 모르지 않았다.
우우웅.
검이 작게 진동했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진한 매화 향기가 방안에 퍼져나갔다.
“…몸조심하거라.”
“…하아.”
덥석.
제갈소미가 다시 검을 회수했다.
“천마고 혈마고 나발이고… 미치광이 놈들은 전부 남김없이 찢어 죽이고 올 테니까… 태사부님은 제발 자기 몸이나 좀 챙기세요.”
드륵.
그리고 제갈소미가 문을 나섰다.
모옥의 울타리를 떠난 뒤, 화정봉의 산기슭을 따라 무림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타앙, 쐐애액.
네 개의 신형이 쏘아졌다.
이벽과 일행들은 화정봉의 산길을 따라 경신공을 펼쳤고, 움직임은 하나같이 쏜살과 같았다.
“케헤헤! 죽이는데?! 몸무게가 아예 사라진 것 같잖아!”
파진성의 손이 코끝을 스쳤다.
기실 지난 사흘간 일행은 내력을 억압하는 진법의 안개 속에서 각자의 수련에 매진하며 살다시피 했다.
진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족쇄를 벗어던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타앙, 쐐애애액.
물론, 이벽의 청강유엽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만큼의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작 사흘 만에 일행들은 각자의 경지 앞에 놓인 벽을 또 한 번 넘어서고 있었다.
타아앙.
“…….”
허나 그와 동시에.
이벽은 못내 아쉬웠다.
의혈맹주이자 ‘천마’인 황보혁이 보내온 서신에 적힌 비무회의 날짜는 이제 보름이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다.
고로 당장은 매화검선이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매화’의 화두를 깨달음으로 정리할 여유는 없었다.
타앙, 쐐애액.
“…어험, 험!”
불과 일 각만에 일행은 화정봉 산 아래에 다다랐다. 산길의 초입에 서 있던 누군가를 그대로 지나쳤다.
“커험! 잠깐! 낙검신룡! 기다리게! 나라고! 나일세에에―!”
“…어라? 잠깐, 양 대협 아녜요?”
빠르게 멀어지는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며 공손수가 말했다. 이내 일행은 경신공을 멈춰 섰다.
후욱, 탓.
몇 장가량을 다시 되돌아가자 이내 저만치에 눈에 익은 마차와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군.”
이벽이 말했다.
인영의 정체는 앞서 일행을 이곳까지 데리고 왔으며, 또한 사흘 전 송영영과 함께 떠났던 정검문주 양호명이었다.
“양 문주, 여기서 뭘 하고 있소?”
“뭐, 뭘 하긴? 자네들을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여기서 달리 뭘 하고 있었겠나?”
커험, 양호명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믿고 있었다네. 자네들이라면… 당연히 시험을 통과하고 무사히 산을 내려오리라고 말이네.”
“…….”
“타게나. 내 황보세가까지 데려다주겠네. 아니면 설마 예서 산동까지 맨발로 달릴 생각이었나?”
“…그렇소만.”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
이벽은 눈앞의 양호명을, 그리고 그 뒤에 있을 정도맹주의 뜻을 선뜻 믿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의 일을 생각하면 믿기에도, 믿지 않기에도 애매했다. 이벽이 침묵하자 양호명이 재차 헛기침했다.
“양 문주, 우리는 이제 동맹이 맞소? 이제 와서 두 번째 시험이라던가 하는 게 또 튀어나오면… 솔직히 더는 못 참을 것 같소만.”
“그, 그렇고말고. 더는 그럴 여유도 없지 않나? 뭣보다 내 긴히 전할 말이 있네. 부디 나를 좀 믿어주지 않겠나?”
“…어떻게들 생각하나?”
이벽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공손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괜찮지 않을까요? 천마니 뭐니 하는 이 시국에 목숨 걸고 산동까지 실어다 줄 마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요.”
“커험! 그렇고말고.”
“그리고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싶으면… 양 대협 정도는 이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제압할 수 있잖아요?”
“…….”
“아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혁대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제일 먼저 마차로 올라탔다.
“타자, 벽아. 어차피 너나 나나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잖아?”
“……!”
“뭐니 뭐니 해도… 싸움에 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역시 눈곱만큼이라도 더 강해지는 일이니까.”
혁대웅이 미소를 지었다.
검선의 매화에서 모종의 화두를 얻은 것은 물론 이벽 뿐만이 아니었다.
툭툭.
“케헤헤, 아저씨. 다 좋은데 이번에는 길이나 잃어버리지 마셔! 그 짓거리 또 했다간 천하가 개같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커험!”
파진성이 양호명의 어깨를 두드린 뒤 마차에 올라탔다. 이내 이벽과 공손수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일행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의 참선에 잠겨 들었다. 비단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이벽과 혁대웅 뿐만은 아니었다.
공손수와 파진성 또한 사흘간의 수련을 통해 청강유엽공을 익혔으나, 물론 새로운 힘에 적응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서.
마차는 산동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