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비룡대주
“려, 려, 련주님?!”
“어, 어째서?! 아니……!”
사패련주 혁군악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일대 소란이 일었다.
앞서 그가 이미 한 번 처소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음을 모르고 있던 이들은 더욱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당연하다는 듯 실내를 한 바퀴 돌아 늘 비어있던 상석에 자리했다.
자리한 이들을 둘러본다.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감히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한때는 모두 패왕가의 밑을 자처하던 이들이었으나 현재, 모두가 흑천방과 해남검파의 휘하로 갈라선 처지였다.
면면을 살핀 혁군악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오른편에 앉은 맹종수였다.
“그래, 묵룡당주. 자네 말대로 하오문은 외부세력이 맞지. 허나 그 녀석은 하오문도가 아닐세.”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는 율법을 책임지는 입장이니 본 련에 가맹된 문파들의 명단 정도는 꿰고 있겠지. 안 그런가?”
사패련주가 씨익 웃었다.
“운남의 낙검문.”
“…….”
“잘 모르겠으면 찾아보게. 기록 구석탱이 어딘가에는 그런 이름이 쓰여있을 테니까. 부차적으로는 우리 패왕가의 혈맹이기도 하고 말야.”
물론, 듣도 보도 못한 그러한 문파가 련내에 가입되어 있었는지 맹종수가 알고 있을 리 없다.
“즉, 그 아이는 어엿한 련의 소속이란 뜻일세. 하오문과는 그저 오는 길을 함께했을 뿐이겠지.”
그러나 맹종수는 직감했다.
사실이 어떠하든 중요치 않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한들 사패련주가 말한 순간 사실이 되는 것이다.
“…련주님,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는 무슨 의미?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걸세. 중소문파의 제자라고 해서 따돌려서야 쓰겠나?”
맹종수는 혁군악을 바라보았다.
천하십대고수. 감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련주님, 이것은 패왕가주로서의 뜻입니까?”
맹종수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장내의 공기가 바싹 얼어붙었다.
삼 년 전, 사파제일가였던 패왕가는 불현듯 문을 걸어 잠그고 강호 무림의 모든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패왕가만의 봉문을 의미하지 않았다.
패왕가는 사파의 구심점이었다.
패왕가, 그리고 천하십대고수인 혁군악이 있었기에 사파인들은 상대적으로 열세임에도 정파인들과 대등한 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구심점이 갑자기 활동을 멈춘 이상, 사파 무림 전체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차라리 아예 종적을 감춘 것이었으면 오히려 나을 뻔했다.’
맹종수는 이를 악물었다.
허나 패왕가주 혁군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패련주의 자리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사패련에 남아 자신의 처소를 만들고 텃밭을 가꾸며 세월을 허투루 흘려보냈다.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사파 세력들이 함께 짓눌리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의도적으로 사패련의 성장을 가로막는 듯했다.
맹종수는 그 답답한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패왕가의 존재감을 지워내고 그 자리에 흑천방의 이름을 채워 다시 사파의 중심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해남검파가 반발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파무림 전체가 패왕가와 함께 가라앉는 것보다는 경쟁체제로 양분되어 활기를 띠는 게 오히려 나았다.
그렇게 패왕가를 따르던 세력들은 점차 흑천방과 해남검파로 양분되었다.
끝끝내 패왕가를 따르던 세력들은 아예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렇게, 혼란을 겪었던 사파 세력은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하나로 모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짓눌린다.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한다.
지난날들과 다를 게 없다.
삼 년 전, 패왕가가 문을 닫은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했듯, 오늘 갑자기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좋습니다.”
맹종수는 웃었다.
재앙을 거스를 수는 없다.
“련주님의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어찌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그 아이를 비룡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웅성웅성.
여기저기서 자잘한 동요가 일었다. 맹종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아예 그 아이에게 대주 자리를 맡겨도 좋겠지요. 기왕에 받아들인다면야 그만한 인재가 다른 아이들의 휘하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맹종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줘야 한다.
버팀목이 되어줄 생각이 없다면, 이곳은 더 이상 패왕가의 사패련이 아니다.
맹종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가까이에 앉은 한 사내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흑천방에서 파견된 대표자 맹상태였다.
맹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맹종수의 발언이 끝난 바로 순간이었다.
드륵.
맹상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내의 시선이 집중된다.
“자리에 모인 련내의 동도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만, 우리 흑천방은 이번 비룡대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이, 이보시오!! 맹 대협?!”
“상세히 설명 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본방에 급작스러운 일이 생긴 터라. 부득이하게도 외부에 제자들을 맡길 여력이 없게 되었군요.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꾸벅.
맹상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돌아선 뒤 저벅저벅,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
갑작스런 흑천방의 이탈.
그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애초에 이번의 비룡대 소집은 후기지수들의 경험과 친분이라는 명분 하에 이뤄졌던 자유로운 모집에 불과했다.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니며, 애시당초 전시상태도 아닌 사패련에 그러한 권한은 없다.
물론, 실제로는 이것이 흑천방과 해남검파의 행사임을 알고 있었기에 세력 개편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왔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 한 축에 해당하는 흑천방이 빠지고 말았다.
드륵.
그때 또 한 명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남검파의 대표 파한철이었다.
“련주, 무인으로서 당신을 존경하오만 이런 식으로 계속 장난질을 쳐선 곤란하오. 어차피 우리의 결속 같은 건 쪽배처럼 위태로운 것이니.”
저벅저벅.
날카로운 눈으로 혁군악을 응시하던 그 역시 돌아서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것 참. 내가 뭘 했다고들?”
혁군악이 어깨를 으쓱했다.
흑천방과 해남검파의 대표가 동시에 자리를 떴다. 이내 대표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드륵, 드르륵.
판단을 마친 장내의 대표들이 하나둘 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몇 명이 회의실을 떠나자, 이내 나머지 역시 행여나 혁군악의 눈에 띌까 앞다투어 자리를 떴다.
“…이래서야 회의를 진행하는 의미가 없게 되었군요.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련주님.”
꾸벅, 맹종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인파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맹종수는 얼굴 위로 새어 나오려는 통쾌함을 애써 감추었다.
그 사패련주를 정면으로 거슬렀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아직까지도 손끝이 떨린다.
그동안 흑천방이 기울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타 세력들은 모두 사패련주가 아닌 흑천방의 뜻을 따라주었다.
“크크크, 이거 섭섭하구만, 그래.”
그렇게 모두가 떠난 가운데 회의실 내에는 마침내 혁군악과 단 한 명의 중년인만이 남게 되었다.
“…련주님.”
중년인이 말했다.
특색 없는 흑색의 무복.
인상조차 다소 흐릿한 그는 사패련 사대세력 중 하나인 암영각의 대표 공손욱이었다.
“대체 무얼 하고자 하십니까?”
“하긴 뭘 해? 지들이 제 발로 알아서 나갔구만.”
“지난 삼 년간, 이유도 모른 채 다들 억눌려왔습니다. 본디 그런 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터인데.”
사파는 질서를 거부한다.
동시에 스스로 질서가 되고자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머리가 되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닌 이여야 한다.
“다시 한번, 저들 모두를 힘으로 굴복시킬 셈이십니까?”
“에이,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자네는 내가 그리 혈기가 왕성해 보이나? 이젠 삭신이 쑤셔서 하고 싶어도 못 해.”
“…….”
“외려 자네 말마따나 맹 당주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 내 똥 치우느라 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크크, 혁군악이 나지막이 웃었다.
“하지만 늘그막에 ‘아들뻘’ 되는 녀석이 찾아와서 말일세. 딱히 물려줄 건 없지만, 뻗댈 자리 정도는 알아봐 줘야 하지 않겠나?”
“…그 결과가 이 모양입니다만.”
사패련주의 갑작스런 난입은 후기지수들을 중심으로 재건되려 하던 사파 결속의 결렬로 이어졌다.
비룡대고 뭐고 박살이 났다.
“뭐얼!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감투를 주었으면 필요한 사람은 제손으로 모아서 써야지. 안 그런가?”
“…….”
쩝, 혁군악이 입맛을 다셨다.
“어때? 공손욱이, 모처럼 얼굴도 봤는데 간만에 술이나 한잔 안 할 텐가?”
* * *
“…….”
이벽은 손에 든 패를 바라보았다.
[사패련(邪覇聯)] [비룡대주(飛龍代主)]네모난 패 안에는 구름을 노니는 용의 모습과 함께 비룡대주의 신분을 증명하는 글귀가 힘차게 양각되어 있었다.
이벽은 비룡대주가 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비무회가 있고 나서 이틀이 지난 오늘,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다.
물론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벽은 비룡대주이자, 현재 비룡대의 유일한 대원이기도 했다.
앞서 비룡대에 합류하고자 했던 세력들 중 대다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앞다투어 사패련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
사파(四派) 없는 사파(邪派) 무력대.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벽은 심마를 넘어설 깨달음을 찾고자 무림에 나가기로 결심했고, 그 수단으로서 비룡대 합류를 택했다.
이유를 덧붙이자면, 사패련주가 혁대웅의 부친이라는 것. 그리고 언미희에 대해 신경이 쓰였던 점도 있었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비무대에 올라섰고, 때마침 대전 상대였던 맹우강을 쓰러뜨렸다.
그것뿐이었다.
그 결과, 모두가 떠나버렸다.
자세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마치 끼어들어선 안 될 이물질이 끼어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꼴이 우습게 되었군.’
이벽은 쓰게 웃었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비룡대주의 신분패는 자신의 손에 들어왔고, 그것은 차라리 조롱에 가깝다.
대다수의 세력들이 떠난 사패련은 한산해졌다. 이벽이 하오문의 처소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앗, 공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저, 몸은 괜찮소?”
저만치에 언미희가 있었다.
이틀 전 비무회가 끝난 이후, 언미희는 의약당에서 처치를 받고 있는 듯했다.
“아하하, 그럼요. 끄떡없어요. 고작해야 한 방 먹었을 뿐인걸요. 그런 걸로 앓아누워선 권법가가 아니죠!”
언미희가 살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하오문의 처소를 향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저어… 공자. 있잖아요?”
문득 언미희가 말을 꺼냈다.
“그게… 왜 그런 결심을 하셨나요?”
“…무슨 뜻이오?”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공자가 비무대에 나타나서 그 녀석을 쓰러뜨렸을 땐,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공자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고 했잖아요?”
“…….”
이벽은 앞서 그녀와 손속을 나누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그런 얘기를 했었지.
“…지금은 갈 수 없게 되었소.”
“에…….”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마음의 문제였고,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일 뿐이다. 하지만 확신이기도 했다.
살심은 적파심공의 구결로 묶여있지만, 언제고 무슨 계기로 인해 바깥으로 터져 나올지 모른다.
고로 화정촌에 돌아갈 수 없다. 언젠가 깨달음을 얻고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소저나 나나 처지가 이상하게 되어버렸군. 솔직히 말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또다시 쓴웃음이 감돌았다.
비룡대는 사실상 이름뿐인 무력대가 되었고, 사파 후기지수들의 친분을 다진다는 명분은 흐지부지되었다.
“공자, 저기요.”
문득 언미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벽이 뒤를 돌아보자 언미희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요. 구해줘서.”
“…….”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요? 공자가 아니었으면… 여러모로 신세를 망쳤을 거예요.”
하핫, 언미희가 머쓱하게 웃었다.
“공자께 은혜를 갚고 싶은데, 가난뱅이에 빚쟁이라서… 가진 재산이 몸뿐이네요.”
“…….”
이벽은 침묵했다.
“앗, 이,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다시 고개를 든 언미희의 팔이 허공을 분주하게 헤맨다. 꾹, 눌러왔던 말을 다짐하듯 말을 뱉는다.
“…제가 공자를 따르면 공자께 방해가 될까요?”
“무슨 뜻이오?”
“…비룡대에 합류하는 게 루주님께서 제게 내린 명령이었지요. 그 뜻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비룡대주이신 공자께서 허락하셔야겠지만요.”
“…….”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끌기는커녕, 정작 자기 자신조차 이제부터 무얼 목표로 삼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그저 가만히 고여 있어서는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을 뿐이다.
찾는 것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찾으러 나간다.
정신 나간 짓이다.
하물며 누군가와 함께 할 수는.
“…무리해서 명을 따를 필요는 없소. 필요하다면 내 루주님께 말씀드리겠소.”
“아뇨, 제가 함께하고 싶어요.”
“…….”
“공자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언미희의 눈빛은 확고했고 목소리는 단단했다. 이벽은 꺼낼 말이 마땅치 않아졌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소?”
“네, 물론요.”
이벽은 확답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 속에서 걸음을 옮겼고, 이내 저만치에 하오문의 처소가 나타났다.
드르륵, 이벽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소의 한가운데에서 처음 보는 소녀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소녀가 황급히 다가섰다.
“와! 소협! 보고 싶었어요!”
덥썩, 이벽은 두 손을 붙잡혔다.
적의가 없었기에 피하지 않았으나, 붙들린 두 손은 의외로 단단하여 벗어나기 어렵다.
“…소저는 누구시오?”
“아, 절 잊어버리셨나요……?”
소녀가 짐짓 슬픈 얼굴을 했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기 시작한다.
이벽은 당황했다. 뒤이어 조금 창백해진 안색의 언미희가 이벽과 소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도리도리.
이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모르겠어요? 섭섭하네~”
표정을 바꾼 소녀가 피식 웃었다.
“저예요, 저. 암영각의 공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