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1)
52화. 초연서 (2)
스윽, 슥.
벼루 위에서 먹이 곱게 갈렸다.
등잔 밑에서 먹을 쥔 초연서의 손은 여인의 그것처럼 섬세했다. 방 안에 은은한 묵향이 퍼져나간다.
“…….”
몸짓은 퍽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벽을 데리고서 객을 위한 방으로 향한 초연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침묵이 이어진 지도 얼추 일각 이상이 지났으나 이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오문 수호대의 초연서.
그는 자신을 ‘환쟁이’라 말했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화공을 스스로 낮추어 일컫는 말일 테다.
스스로를 약장수라 주장하는 이진천, 그리고 백정이라 말했던 고 노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서도(書道)를 아나요?”
초연서가 입을 연 것은 다시 일각이 지난 후였다.
“…도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일찍이 글을 배웠으므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할 줄 아는 것 정도일 뿐이다.
“그렇군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렇다면 이리 와서 글을 써볼래요?”
“어떤 글을 말입니까?”
“무엇이든 좋아요. 단 한 자라도 좋으니 저에게 공자의 글을 보여주세요.”
“…….”
초연서가 붓을 내밀었다.
이벽은 다가가서 받아들었다.
잠깐의 고민이 스쳤으나, 곧 어렵지 않게 종이 위에 한 글자를 적었다.
검(劍).
“풋… 아하, 오호호!”
별안간 초연서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탕! 탕! 배를 안고서 상을 두드린다.
“아하하! 하하! 호호… 흠! 이거 실례했군요.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공자~”
“…개의치 않습니다.”
“아하하! 오해는 말아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너무 의외라서 그랬어요. 그 사람의 제자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반듯해서.”
“…….”
“반가워요, 공자. 줄곧 만나보고 싶었어요. 대주님의 제자 되시는 분이 대체 어떤 분일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대주님이라니요?”
“어머, 설마 모르고 있었나요?”
초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주라 함은 물론 이진천을 가리키는 말일 테다.
그러나 이진천이 수호대의 일원일지언정 그 무리의 대주라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뭐,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걸요. 공자께서는 공자의 스승님께서 다른 이의 밑에 머무르고 있는 게 상상이 가나요?”
“…어렵군요.”
다만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말마따나 자기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깍듯했던 지소약이나 다짜고짜 무공을 내어준 고 노야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편이 자연스럽다.
“그쵸?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괴물이 우두머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우두머리가 되겠어요?”
덥석.
문득 초연서의 손이 뻗어졌다.
붓을 쥔 이벽의 손을 감싸 쥐었다.
흠칫, 이벽은 놀랐다. 미처 피할 새조차 없었다. 그러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의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달착지근한 향 너머로 느껴지는 것은 호의에 가까웠다.
“자, 집중해서 잘 느껴봐요.”
그리고 이벽의 손을 쥔 초연서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히 이벽의 손이 함께 움직이며 쥐어진 붓이 종이 위에 먹의 궤적을 남긴다.
‘…필담인가.’
이벽은 묵묵히 초연서에게 손을 맡겼다. 종이 위에 적어지는 글자들을 눈에 새기려 했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이어짐과 함께 어느 순간 이벽은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 붓의 움직임 그 자체였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이라 하죠.”
쿡, 깨달음이 번지는 이벽의 표정을 보며 초연서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백지 위에 종횡으로 두 개의 선을 그으면, 아홉 개의 방위가 나오죠. 그 위에서 여덟 번의 꺾어짐이면 붓끝이 능히 표현하지 못할 형태는 없답니다.”
“…….”
이것은 붓이되 붓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검로와 다를 게 없다. 이벽의 손은 붓을 쥐고 있으나, 마음은 어느새 검을 쥐고 있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붓이 춤을 추었다. 방점을 찍었고 선을 그었으며, 선이 꺾어지고 휘어지며 이내 형을 이루었다.
훅,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붓의 움직임 속에 감추어진 무리를 읽어낸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속에서 이벽은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벽은 초연서가 이끌기도 전에 이미 붓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 것만 같았다.
스윽.
손끝이 움틀거린다.
스스로 움직이고자 한다.
“…과연. 괴물 같은 재능이군요.”
초연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퍼뜩, 이벽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붓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초연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있다.
절정의 고수가 고작 글 몇 자를 적은 것으로 땀을 흘릴 이유는 없다.
그만큼 심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리라.
“…….”
이벽은 붓은 쥔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에는 검로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검로를 전수받았다.’
고 노야에 이어 또다시.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무림인에게 있어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벽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응? 제 얼굴에 먹이라도 튀었나요?”
“…아닙니다.”
“오호호,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제 얼굴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글을 봐주세요.”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초연서가 말했다. 이벽은 하릴없이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 여백뿐이었던 백지 위에는 어느덧 먹의 흔적이 문장이 되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다.
이벽은 첫 줄을 읽어내렸다.
“…만월무변심공(滿月無變心空).”
그것은… 심법의 구결이었다.
말인즉슨 백지 위에는 초연서가 익힌 무공의 정수가 오롯이 녹아 있는 셈이었다.
붓이 지나간 그 글씨의 궤적은 검로를 가리키고 있으며, 동시에 그 내용은 검로에 수반하는 심법을 말하고 있다.
“듣자 하니 고 노야께서 이미 선수를 쳤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백정의 칼부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간 모처럼 올곧은 공자의 글씨가 망가져 버릴 거예요. 저는 그런 게 너무너무 싫거든요.”
싱긋, 초연서의 눈이 다시 호선을 그었다.
“물론 공자의 스승에 비하면야 하잘것없는 재주에 불과하지만… 뭐, 공자에겐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당장 쓰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거예요.”
“…….”
당장 쓰기에 모자람이 없다.
초연서에게서 건네받은 검로의 수준은 그런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익힐 것인가 익히지 않을 것인가.
도살지도 때와는 달리, 과거로부터의 문제와 당면한 지금의 이벽에게 있어 그러한 고민은 사치에 불과하다.
“…감사드립니다, 대협. 하지만 왜 제게 이러한 가르침을 내려주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오호호, 공자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초연서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도움’이란 건 남에게나 쓰는 말이죠. 한 식구를 돕는 건 도움이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
“그래요. 보아하니 공자는 아직까지도 본인의 위치를 잘 가늠하지 못하시는 듯하군요. 귀여워라.”
스윽, 탁.
문득 초연서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벽 역시 눈에 익은 물건을 꺼낸 뒤 상 위에 올려두었다.
“공자, 이 물건이 뭔지 아시죠?”
초연서가 물었다.
그것은 수호령주였다.
물론, 이벽의 품 안에도 똑같이 생긴 물건이 들어있었다.
“…하오문 무력대인 수호대의 소속을 증명하는 물건이라 알고 있습니다.”
“오호호, 정답이에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 수호대란 뭘까요? 왜 애초에 일개 무력대 주제에 ‘령주’같은 거창한 걸 모두가 지니고 있는 걸까요?”
“…….”
이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서 이벽은 하오문의 지부장이자 천향루주인 지소약에게 수호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지소약은 ‘정체가 감춰져 있는 하오문주를 알현할 권한을 지닌 정예 무력대’라는 답을 주었다.
그리 명쾌한 설명은 아니었다.
“공자도 아시겠지만, 우리 하오문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뤄져 있지요. 각 지역의 지부들을 중심으로 최소한의 틀이 잡혀있긴 하지만, 솔직히 엉망진창이에요.”
초연서가 설명을 이었다.
하오문은 무림과 비(非)무림을 막론하고 온갖 잡다한 세력들이 한 데 엉켜있는 집단이다.
그러다 보니 명령체계는 엉망이다.
실상 스스로 나서서 밝히기 전까지는 같은 하오문도들끼리도 서로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허나 이 수호령주 앞에서는 그 모든 점조직과 소속 문도들이 동등해진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일종의 ‘동원력’이라고 할까요? 수호령주란 곧 문주님의 뜻을 대리하는 물건으로, 지부나 혹은 그 윗선의 명령보다도 최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본문의 철칙이거든요.”
“…….”
이벽은 패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품 안이 조금 무거워졌다.
“허나, 이뿐만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수호대원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똑같이 생긴 수호령주라 해도 사실 공자의 것과 나머지 것들은 결코 같지 않거든요.”
일순 초연서의 표정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슥, 고개를 들이밀며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 간단히 설명하자면요. 저나 고 노야의 수호령주는 본문의 문도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공자의 수호령주는 ‘그런 저희’마저도 결집시킬 수 있죠.”
“…….”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되는 건 아니지만요. 저희 대원들은 대체로 중원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서 문주님의 극비명령을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우후후…….”
장난스런 웃음을 흘리던 초연서가 문득 표정을 달리했다. 험,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본래의 목소리를 내었다.
“잘 들어요, 공자. 하오문 수호대의 대주라는 건 말이죠. 다른 누구보다도 문주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렇군요.”
“그러니 공자가 우리에게 느낄 마음의 빚은 전혀 없어요. 문주님과 대주님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공자를 하대할 수 없으니, 부디 하오문에게서 필요한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하세요.”
* * *
“크허헝!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늘 형님의 뜻과 의기를 본받은 채 살아가겠습니다!”
“케케! 뭘 평생 못 볼 것처럼 주접을 떨고 그러나? 뒈지지 말고 잘 먹고 잘살고 있어라, 이 자식들아! 케헤헤!”
비룡대 일행은 말을 타고 나섰다.
무적파를 비롯한 사파 제자들의 요란한 배웅 속에서 회화를 벗어났다.
“…사실상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배웅은 파 소협이 혼자 다 독차지하네요.”
“케케케! 부럽냐? 앙?! 이것이 사나이들 간의 뜨거운 우정이란 것이다!”
“아하하…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요. 여러모로.”
일행의 새로운 목적지는 악양의 동정호였다.
정검문과의 일전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 개방은 자파의 제자를 통해 무적파에 서신을 보내왔다.
호남무림의 정사 간 충돌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개방의 주도하에 관련 세력의 대표자들을 모아 협상을 진행할 모양인 듯했다.
서신이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검문은 점령한 문파들로부터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따라서 무적파에 모여있던 여러 문파의 제자들은 각각 자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물론, 그 결과는 동정호에서 치러지는 협상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그러나 문주가 병상에 있는 무적파를 비롯해 궤멸 직전까지 갔던 회화의 사파세력들이 동정호까지 인력을 파견할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오호호, 동정호라! 악양루에서 달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은 각별할 테죠? 함께 가지 못해 퍽 아쉽네요.”
하오문의 초연서 역시 수호대로서 맡은 일이 있어 함께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회화를 벗어나 악양을 향해 길을 나선 것은 결국 네 명의 비룡대 일원들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화에서 얻어낸 소득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라 해도 비룡대는 회화의 사파세력에 있어 은인이 되었다.
나름대로 ‘패왕가의 영향력’을 되찾는다는 목표의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두두두두!
일행은 바쁘게 말을 달렸다.
회화로 향할 때와는 달리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날은 보름 후이지만, 가능한 빨리 도착해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계해야 할 건 정파뿐만이 아니에요. 어쩌면… 사패련을 대표한답시고 흑천방이 찾아와서 어깃장을 놓을지도 모르죠.”
점창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정말로 흑천방과의 밀약이 있었다면, 흑천방은 오히려 은근슬쩍 정파의 편을 들며 호남무림을 포기하려 들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뭐, 잘만 하면 한 방에 회화뿐 아니라 호남무림 사파 전체의 지지를 끌어올 수도 있을 거예요.”
공손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개방의 중재가 있고 하오문의 지지가 있다 해도 큰 흐름을 빼앗기는 순간 눈 뜨고 당할 수 있다.
“…….”
호남을 가로질러 악양으로 향하는 내내 이벽은 초연서에게서 배운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무적파를 떠나기에 앞서 구결을 적은 종이는 충분히 숙지한 뒤 태워 없앴다.
퍽 놀라운 것은, 팔절구궁필법의 검로는 청강검식의 기초적인 가르침과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이었다.
방위를 아홉 개로 나누어 나에게서 상대로 이르는 길에 검을 얹는다.
또한 그 꺾어짐에 치중한 그 방식은 회검식 곡의 무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군.’
이해는 거기에서 가로막혔다.
비슷하기에 이해하기 쉬웠으나, 또한 비슷하기에 마지막 한 걸음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딱 한 걸음.
딱 한 걸음이 모자랐다.
그로 인해 이벽은 팔절구궁필법의 검로를 꿰고 만월무변심공의 구결을 기억했음에도 초식을 얻어내지 못했다.
움직이는 검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초식으로 엮이고 구분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붓으로 글씨를 쓰는 법을 배웠으나, 정작 자신이 쓴 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겠지.’
말을 몰며 이벽은 침잠했다.
앞서 고 노야에게 도살지도와 적파심공을 전수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 이벽은 살심에 몰두해있었고 그 마음을 따라 도살지도를 휘두르자, 이내 선천의 힘은 적파심공의 경로를 스스로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지금 선천의 힘은 만월무변심공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았다.
즉, 단순히 구결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심법은 마음의 공부다.
적파심공이 살심에 응했듯, 만월무변심공을 익히기 위해선 결국은 그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야만 한다.
만월무변심공(滿月無變心功).
‘…차오른 달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마음일까?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이 화두를 해결한다면 초식과 내력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직감이 스칠 뿐이었다.
“…….”
이벽은 조금 초조해졌다.
정파를 상대로는 선우세가의 검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 한들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 도살지도를 꺼내는 것 역시 위험한 선택이다.
따라서 지금의 이벽에게는 팔절구궁필법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익혀두는 것은 퍽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진정한 형태는 천 한 장의 얇은 막에 가려진 채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자연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이벽의 편치 못한 기색을 읽은 공손수도, 언미희도 섣불리 다가오거나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자연히 말을 달리는 일행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유지되었다.
다그닥, 다그닥.
일행은 악양으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서 마지막 노숙을 하게 되었다.
턱.
늦은 밤, 불침번을 자청한 채 불 가에 앉아 화두에 몰두하고 있던 이벽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뭐지?”
“뭐긴, 불침번 교체다. 케케케!”
“생각할 것이 있으니 오늘은 나 혼자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랬나? 아님 말고.”
“…….”
“아, 술 고프다~ 쩝.”
아무렴 어떠냐는 듯, 파진성이 이벽의 옆에 주저앉았다.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며 입맛을 다셨다.
“회화에서 어설프게 마셨더니 더 마시고 싶어 죽겠네. 동정호에 가면 실컷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겠지? 케케케!”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집중을 방해받았다. 그리고 보아하니 물러서 줄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일어나면 그만이다.
이벽은 일어서려 했다.
“이봐, 대주.”
“…왜 부르나?”
파진성이 씩 웃었다.
“동정호에 도착하면 내가 한 잔 산다. 둘이서 술이나 한번 거하게 빨아보자고.”
“…….”
“뭐, 여러모로 신세도 많이 졌는데 말야. 술 한 잔 정도는 사게 해달라구. 케헤헤.”
“…그럴 돈이 있긴 있나?”
귀주의 회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파진성은 이미 한 푼도 없는 거지꼴이었다.
그리고 여정 내내 파진성은 공손수에게서 먹고 입는 것 하나하나 모조리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이다.
“아, 뭐, 사실은 말야. 회화에서 만난 아우들로부터 몰래 우정의 지원을 좀 받았거든. 케케케!”
짤그랑, 파진성의 소매 안에서 엽전 몇 개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라졌다.
“…나는 되었다. 술은 별로 즐기지 않는다. 좌우간 그럼 불침번은 부탁하도록 하지.”
아닌 밤중에 어째서 파진성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지 이해할 수는 없다.
함께한 지도 얼추 두어 달이 되어 가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었다.
좌우간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파진성이 말했다.
“헹! 거 까칠하기는. 이봐. 내가 이래 봬도 너보다 두어 살은 더 먹었는데 말야. 사람이 모처럼 호의를 보이면 좀 어울려주는 맛이 있어야지? 앙?”
“…….”
“네가 천하제일 기재인 거 잘 알겠는데, 그렇게 뭐 하나에 매달려있다가는 자칫 사람이 망가지는 수가 있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듯했다.
물론, 그런 것까지 헤아려줄 여력은 없다. 이벽은 돌아섰다. 저만치 모포를 쌓아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쳇, 아무리 무공이 강하면 뭐하냐? 꼿꼿하기만 하면 부러지지. 자고로 사람이 휘어질 줄을 알아야지 말야.”
등 뒤에서는 계속해서 파진성의 꿍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굳이 주의 깊게 들을 생각은 없었다.
‘…휘어진다고?’
그러나 불현듯, 한 가지 단어가 귀에 꽂혔다. 동시에 무언가가 번뜩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휙, 터벅터벅, 덥썩!
“케헥! 잠깐, 뭐야?!”
“…방금 그거 무슨 뜻이지?”
황급히 돌아선 이벽이 대뜸 파진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파진성의 당황한 눈동자가 또르륵 굴렀다.
“무, 무슨 말? 씁, 이거 놔! 안 놔?! 요, 욕한 거 아니라고!”
“부러지는 것과 휘어지는 것이 대체 어떻게 다르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