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442)
세계수 때와 달리 훨씬 긴 대화를 나눴음에도 시간은 반나절 밖에 흘러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대해 데오니 성녀님에게 물어보니, 처음으로 ‘길’을 트는 과정인 것과 지금처럼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없었던 탓에 유독 긴 시간이 소요된 거라고 한다.
“다른 분들껜 이미 상황을 설명했으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움직이시죠.”
내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는 성녀님의 모습은 중증 환자를 부축하는 간호사보다도 조심스러웠지만, 그걸 부담스럽다고 여길 여유는 없었다.
“직접 신성을 대면하는 건 영혼과 정신을 넘어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은 호흡부터 가다듬으십시오.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니 금방 감각이 돌아올 겁니다.”
할 수 있는 건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 통증이 있는 것도, 진이 빠진 것도 아닌데 그냥 내 몸이 말을 안 듣는 감각 속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는 성녀님의 손에서 전달되는 신성력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강대한 신성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은 그 여파를 영혼이 겪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 대답하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을 열면 침만 줄줄 흐를 겁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과연 경험자다운 조언이었다.
이단 심판관들과 함께 다니며 둔기질을 할 정도의 체력이 있기 때문인지 성녀님은 의외로 별 어려움없이 내가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십여 분 정도가 흐른 뒤에야 입안과 손발끝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 나는 제단의 영역 안에서도 아무런 이상 증상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젠 영역 안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이 정도 신성력으로는 영향을 안 받게 된 겁니다. 오러나 마나 유저인 인족들의 기운을 제대로 못 느끼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신성력을 느끼는 감각은 오히려 또렷해진다는 점이겠군요.”
확실히 성녀님의 말대로였다. 마력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신성력이 느껴진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이 몸속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듯한데… 그게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아서 굉장히 신기했다.
“그럼 저도 이제 성법을 쓸 수 있는 겁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용사이시니.”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성녀님의 시선에는 아무런 의문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의 반응에 무슨 소리냐며 반문할 수 없었다.
에파가 님은 분명 ‘용사로 만들지 않았다’가 아니라, ‘용사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하셨다. 그 후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으셨다고는 하나 내 안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직접 용사라고 언급하지 않으신 것조차 내가 그 업業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였음을.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참으로 자비로운 신이시다.
“직접 용사라고 하진 않으시던데요.”
뻔히 알면서도 문득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해져서 빈말을 던져보자 성녀님은 이전까지 보여줬던 사무적인 태도를 떠나 삐딱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런 경우가 또 있다면 ‘말하지 않았으니 아니다’ 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기에 하지 않았다’ 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용사님.”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보아하니 이 성녀님도 여러모로 만만치 않은 여장부인가 보다.
여러모로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계시라는 공통점이 생긴 탓인지 성녀님도 나도 서로에게 느끼고 있던 거리감이 단번에 줄어든 건 확실했다. 덕분에 조금은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신성력과 성법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몸을 완전히 가눌 수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컨디션으로 움직이게 되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부축 없이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돌아온 유적 내부에는 어느새 숙영지 비슷한 게 꾸려져 있었다.
환기가 잘 되는 공간인지 가운데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연기는 천장 어딘가로 꾸준하게 빠져나갔고, 그 주변을 이단 심판관들과 멘데르 사제, 스승님과 세네란 그리고 아실리에가 둘러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 나가다가 우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에 별다른 걱정없이 다가오던 내 쪽 사람들과 달리 이단 심판관들과 멘데르 사제는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적당히 안부나 물을 기세로 접근하던 이들이 놀라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단 심판관들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춘 멘데르 사제가 감격에 차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신 에파가 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움이 가호와 신탁으로 빚어져 이 땅에 내려와 부족한 저희들을 보우하고자 하시니, 마신을 섬기는 충실한 종이자 지팡이로서 이 순간을 직접 목도하고 함께 할 수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단의 관계자들은 모두 이렇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지크프리트 녀석도 이런 반응을 보며 지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이 샘솟는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실리에는 그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눈빛과 표정을 통해 의문을 제시했고, 스승님이나 세네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스승님은 아주 좀 더 점잖고, 세네란은 아주 많이 경박할 뿐.
그러나 그들에게 내가 직접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빠르고 확실했기에,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옆에 서 있던 성녀님도 멘데르 사제 옆으로 가서 똑같이 몸을 숙이고 예를 취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아무리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두 눈을 크게 뜬다.
그 분위기 속에서, 성녀님이 멘데르 사제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혼란이 내려앉은 이 시기에, 신께서 당신의 뜻을 확고히 하시어 은총을 내리셨나이다…”
“신의 종을 자처하는 자로서 어찌 이 은총을 목도하며 칭송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허나 넘치는 영광은 필멸의 삶을 사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나이다….”
“신의 종을 자처하는 자로서 어찌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마치 예행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입을 맞추어 기도문 읊듯이 말하는 광경을 보며 내가 느낀 건 막막함이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용사의 역할 역시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용사에게 바라는 것 역시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험 속에서 우리는 과신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아니할 것이니…”
“신의 종을 자처하는 자로서 신앙을 추구할 뿐, 광신狂信을 추구하지 않음을 어찌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거기에 부응하지 못할 것을 걱정할 만큼 책임감이 솟아난 건 아닐지라도,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스케일이 커져서 머리가 굳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망이나 무시? 불가능하다.
아무리 마음 가는 대로 살라는 말을 들었다한들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노력은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내 양심이 외치는데 어디로 튈 수 있고 어떻게 무시하겠어.
일단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저 데오니 비레는 마신께 윤허받은 성녀의 신분으로 교단을 대표하여… 에파가 님의 가장 빛나는 영광, 용사님을 배알하나이다.”
그런 내면의 한탄을 알 리가 없는 성녀님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선언했다.
◈
감격하여 울음까지 터트리는 이단 심판관들도 문제였지만, 내게는 성녀님의 선언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며 뒤로 쓰러져 버린 세네란과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실리에가 더 큰 문제였다.
“나는 네 조상 중 마족이 있을 가능성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저도 그 정도가 고작이긴 했습니다. 이럴 줄은 몰랐네요.”
“그런 것치고는 침착하구나.”
“스승님만 하겠습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희귀 표본인 줄 알았던 연구 대상이 알고 보니 마신님 특제 한정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세네란은 그대로 드러누워 안면 전체를 물수건으로 덮은 채 낑낑 거렸고, 아실리에는 거의 강박적으로 라이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느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성녀님조차 교단의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논의하느라 우리와 대화할 틈이 없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가장 침착한 스승님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실제로 스승님은 이 놀라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미소를 짓는 여유까지 보이셨다.
“마신교의 성녀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세네란이 인부들을 모두 돌려보내서 다행이구나. 이런 건 아는 사람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으니.”
솔직히 너무 여유로워서 불안할 정도다. 세네란과 스승님에게 마력을 쓸 수 있는 인족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지금까지 같이 지내면서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모든 연구와 시도는 최종적으로 ‘인족이 마나나 오러가 아닌 마력을 쓸 가능성’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돌연변이든 특이체질이든 간에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믿어왔는데, 철저하게 신성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인위적인 존재라는 결론이 나버린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다 의미가 없어지는 걸까요?”
결국 인족은 마력을 쓸 수 없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되어 버렸는데도 침착한 그 모습에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오히려 스승님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너도 마법사적인 기질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이 상황에 연구를 걱정하다니.”
정확하게는 스승님의 멘탈을 걱정하는 거였지만 일단 입 다물기로 했다. 다행히 뒤에 이어진 말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용사의 힘은 어느 정도 유전된다. 네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자손을 가지지 않는 게 아닌 이상, 너로 인해 인족이 마력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지.”
“예? 그럼 세네란은 왜 기절한 겁니까?”
내 질문에 스승님은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리시며 적당히 마나를 움직여 세네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물수건을 치워 버리셨고, 난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고는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허.”
절망적인 현실에 충격을 먹고 쓰러진 줄 알았던 세네란은 눈을 뒤집은 채 실실 쪼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