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96
95. 아라엘 지파 5
아니 뽑으려 했다. 하지만 아자딘이 더 빨랐다. 아자딘은 발을 내밀어 백작의 칼자루가 칼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칼의 폼멜을 발로 막고 가볍게 자신의 칼을 뽑아 백작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에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칵!
아자딘의 칼은 백작의 갑옷, 목 보호대를 자르고 지나갔을 뿐이다. 백작 뒤에서 전령일족 75령, 네프티가 그를 뒤로 슬쩍 당겨 그 공격을 피하게 한 것이다.
“선을 넘었군!”
그 순간 네프티가 칼을 뽑았다.
“자 그만. 교섭 과정에서 상대를 공격하면 안 되지!”
네프티는 한 손으로 백작을 뒤로 돌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들어 아자딘의 목을 겨누었다. 갑옷도 꿰뚫는 찌르기 특화의 쇠꼬챙이 같은 검이었다. 가느다랗지만 의외로 무게가 꽤 나가는 검인데, 그녀는 그걸 한 손으로 가볍게 제어해 마치 육신의 일부처럼 가볍게 다루었다.
하지만 아자딘 역시 칼자루 끝으로 네프티의 검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백기를 내걸고 교섭 중인데 아무리 상대가 열 받게 한다고 해서 먼저 손을 대서야 쓰겠어? 고작 사소한 도발일 뿐이잖아? 그런 데 낚여서 멍청한 짓을 하면 아무리 네 혈통이 잘났어도,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아라엘의 동생이라고 해서, 그 어떤 귀하신 분의 핏줄이라고 해도 죽일 거다. 아니 태어난 걸 후회하게 고문하고 학대하고 죽음조차 구걸하게 만들어주겠어.”
네프티가 아자딘에게 칼을 겨누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죠. 백기를 내걸고 교섭 중인데 공격을 하는 멍청이가 되어서야….”
아자딘과 네프티가 동시에 칼을 거두었다.
“이, 이놈들이!”
란타릭 백작은 네프티와 아자딘의 말이 곧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분개했다. 하지만 네프티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어떤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건 벌하겠다.
그건 백작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닌가.
“과연 카흐산이 당했다고 하더니만 상당한 실력이네. 그런데 아자딘, 너도 몸이 온전치는 않은가 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서….”
아자딘은 자신의 상처를 알아채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 네프티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아라엘은 왜 백작과 손을 잡았습니까?”
“그건 말할 수 없는데. 궁금하면 이쪽에 합류하는 게 어때? 그럼 시원하게 알려줄 수 있는데.”
“적어도 금화의 청원은 아니겠지요? 뭐 이 백작과 손잡은 것만으로도 제가 아라엘을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건 억울한걸. 우리 아라엘의 쪽이 아닌 다른 전령일족은 뭐 깨끗한 것 같아?”
“기존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면 뭔가 다른 색의 깃발이라도 들고 와야지요. 같은 색 깃발을 들고 와서 편을 바꾸라는 건 좀 무리한 이야기 같군요. 게다가 제 얼굴에 누가 상처를 남겼는지 아십니까? 그 잘나신 아라엘입니다.”
“덕분에 매우 잘생겨졌는걸?”
“이야기는 그럼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성안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 백작군이 잡아둔 민간인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십시오. 제 요구조건은 그것뿐입니다.”
아자딘은 네프티를 흘겨보고 돌아섰다.
“후회할 거다, 애송이 전령.”
백작은 아자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백작과의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 교섭 현장에서 서로의 목을 향해 칼을 뽑아 휘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백작이 먼저 칼을 뽑으려 했지만 그걸 빌미로 아자딘은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자 마음먹었다.
이 녀석은 틀렸어.
도적 떼를 풀어 민간인을 괴롭히고 사람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런 대귀족을 살려두면 피해자가 무수히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아자딘은 설령 교섭의 법도를 어겨 만인의 지탄을 받더라도 죽일 각오를 했는데 네프티가 방해했다.
그래도 네프티는 아자딘을 옹호했다. 교섭의 법도를 먼저 어긴 것은 백작. 그러니 그녀는 이것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했고 아자딘 또한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자, 그럼….”
아자딘 일행은 요새로 돌아와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병사들은 모이를 기다리는 병아리 떼처럼 몰려왔다가 자신들의 대장이 기절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교, 교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결렬입니다.”
아자딘은 당돌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마련하더니 드러누웠다.
“네?!”
“백작은 이 성의 방어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성문을 우리가 열어주지 않더라도 힘으로 열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성문을 열어주는 조건에 대한 보상을 너무 짜게 잡더군요.”
드러누운 채로 아자딘이 그리 말하자 다들 반신반의했다. 그때 기절에서 깨어난 경비대장이 기겁했다.
“어, 으으… 뭐야?”
“대장님?!”
“교섭이 결렬되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교섭 결렬? 아, 이런 젠장! 이봐!”
기절했던 경비대장이 퍼뜩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령일족! 당신 왜 백작의 제안을 거절한 거야?”
“뭘 말하는 거죠?”
아자딘이 옆으로 돌아누운 뒤 경비대장을 바라보았다.
“노인네 하나 건네주면 우리를 풀어준다고 하잖아?”
경비대장이 그리 말하자 모든 병사들이 흠칫 놀랐다.
전령일족의 말과 다르다. 아니 전령일족은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경비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살 수 있었는데 교섭이 결렬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당신은 기절해서 몰랐나 본데 백작은 그 후에 당신들 목숨도 요구했습니다. 주인을 함부로 배반하는 기사와 병사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요새 경비대의 신병을 넘겨주면 여기에 갇혀 있던 백성들을 다 살려주겠다고 했는걸요.”
“…….”
지벡은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대놓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뭐? 허, 헛소리! 백작 같은 대귀족이 왜 나 같은 하급기사의 목숨을 원하겠어?”
“그럼 노망난 서기는 뭐라고 목숨을 원하겠습니까? 란타릭 백작은 굉장히 감정적이고 무서운 사람이더군요. 병사들이 다 죽을 건지, 백성들이 다 죽을 건지 선택하라니. 이 성 비틀어 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자신하고 있으니까 그따위 오만한 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모두들 아자딘의 말재주에 현혹되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싸하지 않은가?
란타릭 백작이 이 요새를 우습게 보고 성문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교섭 상대들을 모욕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다. 다만 내막을 알고 있는 지벡으로서는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무슨 거짓말을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자딘이 너무 태연자약하게 말해서 다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자, 잠깐만! 정말 그랬습니까 성기사 경?”
경비대장이 지벡에게 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면 지휘관 입장이 난처해질 텐데….”
지벡도 성기사 입장이다 보니 거짓말은 안 했다. 그저 대답을 회피한 것이지.
지벡 경이 말꼬리를 흐리자 다들 아자딘이 맞는 말을 했구나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 버렸다.
“으….”
남의 목숨 내주자고 할 때는 적극적이었지만 자기 목숨이 걸리자 요새 경비대는 금세 얌전해졌다.
백성들이 몰살당하고 경비대가 살아남을 거냐?
경비대가 몰살당하고 백성들이 살아남을 것인가?
백작이 이런 제안을 걸어왔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
아자딘이 말한 대로 요새 방어력을 보여주고 백작의 군대에 더 많은 피해를 입혀주어서 한다. 그래야 성문을 열어주는 것이 큰 혜택이라는 걸 납득할 테니까.
때마침 백작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자딘에게 모욕당한 백작이 분을 참지 못했는지 곧바로 요새 앞으로 병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제정신인가?”
아자딘은 요새로 다가오는 병력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작은 요새가 오히려 공성하기엔 더 까다로운 법이다. 커다란 성이면 필요 때문에 성문이 곳곳에 나 있어 방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곳은 황제가 건설한 가도를 통제하기 위한 경비탑 같은 것으로 입구가 딱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튼튼한 돌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사실 무시하고 지나가도 크게 문제가 없는 요새인데 아자딘이 모욕 좀 했다고 굳이 정면으로 돌격해오다니.
“모두 성벽 위에서 물러나.”
아자딘은 일반 병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아니 제정신이오?”
경비대장이 그리 말하고 활이나 돌을 들고 성벽 위에 섰다. 그 순간 공격해오는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던 궁사가 화살을 날렸다.
-쐐액!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화살이 경비대장의 투구를 날렸다. 아자딘이 재빨리 경비대장의 옷자락을 잡고 뒤로 당겨서 죽는 건 막았지만, 화살이 투구를 찢어발기고 귀와 구레나룻 있는 곳에 길쭉한 상처를 만드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이런.”
네프티의 인사였다. 아자딘이 백작을 공격했을 때, 네프티는 백작을 보호해서 그가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아자딘은 보호하긴 했지만 경비대장에게 꽤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아아악! 아파! 독이… 독화살이다!”
“아냐. 그냥 화살이야. 엄살은 참.”
아자딘은 경비대장을 옆으로 숙이게 하고 그의 투구를 찢은 화살을 살펴보았다.
“청강전이군. 좋은 걸 쓰는데?”
보통 화살은 가벼운 촉을 쓰는 사냥용 화살과 갑옷을 뚫기 위한 강철 촉을 쓰는 전투용 화살로 나뉜다.
전령일족은 그 위에 고급스러운 청강으로 만드는 청강전과 어지간한 존재는 다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맹독을 바르고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는 흑강전,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있었다.
청강전 세 발이면 금화가 한 닢.
그렇게나 비싼 무기가 바로 청강전이었다.
“답례를 해줄까?”
아자딘이 화살을 날렸다. 밑에서 화살을 쏘며 성벽으로 접근하는 이들을 엄호하던 궁사들을 향해서였다.
곁에 있는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궁사들을 지키려 했지만 아자딘은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화조풍월, 카자스 해서! 황학!
옆으로 휘어지며 날아드는 화살이 궁사들의 활과 손가락을 날리기 시작했다.
“크악!”
놀랍게도 아자딘의 화살은 단 한 발에 사람의 손가락이나 활을 잘라 버리고,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고 날아가 다른 궁사들을 덮쳤다. 그러나….
-텁!
궁사들 사이에서 한 명이 움직여 화살을 붙잡았다.
네프티가 아닌 또 다른 전령일족이 궁사들 사이에 있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잡은 것이다.
“이게 카자스 해서인가? 마법도 안 걸었는데 황학과 비슷한 궤적, 비슷한 위력으로 움직이네?”
휘브리스의 농민들보다는 크지만, 체구가 큰 아라가사들 사이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소년이 화살을 붙잡고 시시덕거렸다.
“함부로 잡지 마. 아자딘의 실력은 미지수다. 만약 화살을 잡았다가 손이라도 찢어지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니 그래도 궁금했거든. 카흐산이 패했다길래….”
백작의 병사들 사이에 드문드문 전령일족이 보인다. 아라엘의 부하들이었다.
“역시….”
아자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예전부터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아자딘의 귓가에 자신만만한 소녀의 목소리, 아라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메아리 친다.
‘나는 아라가사를 새롭게 일으킬 거야.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누릴 것을 거머쥐지 못하게 하는 모든 구태를 파괴할 것이다!’
그 당당한 목소리의 결과가 지금 아자딘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