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5
1085회. 좋은 일이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몰록의 잘생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마족의 군주인 자신이 인간 따위에게 쫓겨 달아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니야. 어딘가 잘못된 거야.’
그는 자신이 뭔가에 현혹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인간 따위에게 신에 버금가는 자신이 밀릴 리가 없지 않은가.
마족에게 인간은 대화가 통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물보다 못한 존재였다.
몰록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검술을 차분히 떠올렸다.
‘말도 안 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검술은 인간의 몸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인간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다.
당연히 마나든 영기든 쌓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소드마스터라 해도 그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달랐다.
그는 수백 수천 개의 오라 블레이드를 만들어 냈는데 그건 인간에게 불가능한 검술이었다.
‘마나 프트라스의 농간인가?’
그러고 보니 영구불멸이라는 빙벽에 구멍이 뚫린 것부터 이상하다.
인간세계로 나가는 문이 생긴 줄 알고 이게 웬 횡재냐 싶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마나 프트라스의 수작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마나가 아닌 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뭐지?’
이건가 싶으면 저게 걸리고, 저건가 싶으면 또 다른 게 걸린다.
한참 생각하던 몰록은 갑작스럽게 드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어둠의 에테르 속에 은신했음에도 안전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건 마치 악신 샤이틴과 같은 절대의 힘 앞에 홀딱 벗고 선 기분이다.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던 몰록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헉!”
쓰아아아―.
거대한 붉은 검이 어둠의 에테르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검과 그 속에 담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은 대항의 의지를 앗아 갔다.
어둠의 에테르 속에 있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붉은 검이 다가오자 몰록은 마법검 아이테르둠으로 그것을 후려쳤다.
그것과 맞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주 잠깐, 텔레포트를 펼칠 시간만 있으면 됐다.
콰쾅―!
끔찍한 반탄력에 몰록의 상체가 뒤틀렸다.
“이런!”
텔레포트는 마법으로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다.
몰록은 마음과 달리 텔레포트를 쓰지 못했다.
휘청이는 그의 배로 붉은 검이 파고들었다.
“크악!”
몰록의 비명이 어둠의 에테르 속에 울려 퍼졌다.
타메이온을 다스리는 칠십이 군주의 하나인 몰록의 최후였다.
신에 필적하는 존재인 몰록을 처리한 붉은 검은 어둠의 에테르 속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몰록이 죽자 어둠의 에테르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군주의 죽음을 알아차린 마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글라체스 요새 주변에 있던 마수와 마물 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새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오는 성곽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글라체스 요새 주위에 마족, 마물, 마수의 시체가 가득하다.
떨떠름한 얼굴로 마족의 시체를 보던 엘리오가 돌아섰다.
뭐라고 말해야 기사들이 믿을지 모르겠다.
잠시 후 엘리오는 폐성의 문을 두드렸다.
굳게 닫아 건 문 너머에서 긴장한 음성이 들렸다.
“누구십니까? 혹시 라고아 남작님이십니까?”
“맞아요. 마족들이 물러났으니 이제 나와도 돼요.”
엘리오의 말에도 폐성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엘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족에게 나무로 만든 문짝은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그것을 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행동하다니.
“열고 나와요. 내가 마족이면 부수고 들어갔을 겁니다.”
그제야 삐그덕거리며 폐성의 문이 열렸다.
곧이어 병사와 기사 들이 하나 둘 성 밖으로 나왔다.
“어둠의 에테르가 걷혔다!”
“마족이 물러났다!”
“살았습니다! 살았다고요!”
그제야 성안에 움츠리고 있던 생존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요새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본 뒤에야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라고아! 라고아! 라고아!”
누군가 선창하자 생존자들이 일제히 라고아의 이름을 따라 외쳤다.
엘리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사람들 곁을 떠나 성곽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를 파비안이 허겁지겁 따라왔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그만 불러라. 숨넘어가겠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 많은 시체들은 뭡니까?”
“몰록을 죽이니까 갑자기 지들끼리 싸우다가 떠나더라.”
“마족들끼리 싸웠다고요?”
“어, 마족도 사람과 비슷한 것 같아. 대륙 공용어도 잘하고. 뭔가 의견이 안 맞았던 걸까?”
엘리오는 파비안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해 본 소린데 의외로 먹히는 눈치다.
“야아! 정말 잘됐네요. 마족들이 군주 자리를 두고 엄청 싸운다고 하더니…… 장난 아니네요.”
“진짜?”
엘리오는 무심코 던진 떡밥을 파비안이 물자 깜짝 놀랐다.
“예, 마족들 중에 제일 강한 놈이 군주가 되는 거잖습니까. 강한 걸 가려내려면 싸움밖에 더 있습니까? 아주 목숨 걸고 싸운다고 하더라고요. 사슴 같은 초식 동물도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습니까? 마족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구나. 덕분에 이렇게 넘어갔으니 앞날은 모르는 거야. 그렇지?”
“에이, 그것도 중대장님이 몰록을 죽여서 그렇게 된 거죠. 중대장님이 글라체스 요새를 살리신 겁니다.”
“뭘 그렇게까지…….”
“그나저나 탈출한 대귀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꽤나 배 아파하겠는데요? 몰록 하나 죽여서 끝날 줄 알았으면 그들도 달아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게. 성질들이 급해.”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뭐가?”
“타메이온의 군주들은 신에 버금가는 존재들로 알려져 있거든요. 그걸 중대장님이 죽였다는 거 아닙니까? 중대장님이 신을 죽이신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다 소문이잖아. 소문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지. 게다가 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누가 안다고? 만나 봤대?”
“그, 그렇기는 하네요.”
파비안은 쉽게 수긍했다.
사실 소문이라는 게 과장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
글라체스 요새를 포위했던 마족이 사라졌지만 생존자들은 요새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 히르헤라에 얼마나 많은 마족과 마물, 마수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마수, 마물, 마족의 시체를 한곳에 모은 뒤 불살랐다.
굶주린 타메이온의 야수가 마수나 마물의 시체를 먹고 마수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시체를 모아 태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백여 명의 병사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지만― 시체를 정리하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글라체스 요새 인근의 정비가 끝나 갈 즈음, 탈출했던 대귀족들이 급조한 병력을 이끌고 글라체스 요새로 돌아왔다.
대귀족들은 폐성을 수리하고 그곳에 왕국 연합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곧바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불러들였다.
엘리오는 파비안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대귀족들의 반응도 파비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족들 간의 내부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승리를 축하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공을 축소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가 몰록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격론 끝에 대귀족들은 글라체스 요새에서의 전투를 짧게 정리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몰록을 죽였고, 군주를 잃은 마족들이 타메이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 왕국의 대귀족들은 글라체스 요새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을 위한 연회를 개최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던 글라체스 요새가 한순간 축제의 장소로 바뀌었다.
글라체스 요새.
석조궁 왕국 연합 지휘 본부.
에스카토스 공작이 세 왕국 대귀족들 앞에 섰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글라체스 요새를 지킨 뒤로 에스카토스 왕국은 왕국 연합의 리더로 인정받은 상태였다.
“연회가 끝나는 즉시 타메이온에 남은 마수와 마물을 퇴치해야 합니다. 세 방향으로 흩어져 마수와 마물을 균열로 몰아가십시다. 좌측은 베일럼, 중앙은 에스카토스, 우측은 라미노프 왕국군이 맡았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히르헤라의 마수와 마물을 방치하면 언제 베일럼과 라미노프로 갈지 모르니 이곳에서 정리해야 했다.
“마족들이 타메이온으로 돌아갔는지 혹은 북부로 흩어졌는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에스카토스 공작의 당부에 대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수와 마물도 걱정이지만 마족의 위험에 비하면 그것은 새 발의 피라 할 수 있었다.
마수와 마물은 영주 선에서 어떻게든 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하위 마족일지라도 영주가 가진 병력으로는 막아 내기 어려웠다.
그러니 마족의 일부가 아직 북부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베일럼 왕국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운을 뗐다.
“그런데 몰록의 죽음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라미노프 왕국의 이스크라 라미노프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좋은 일이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몰록은 균열이 있는 모쿠바스의 군주입니다. 모쿠바스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됐다는 소리지요. 그 말은 즉, 다른 지역의 군주들이 모쿠바스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타메이온의 군주들이 균열에 대해 알게 되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
한순간 석조궁의 중앙 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마족이 돌아갔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모쿠바스의 군주가 없으니 이젠 다른 군주들이 모쿠바스를 지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에스카토스 공작의 음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지요. 다행히 우리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제국과 북부의 다른 왕국들에게 협조를 요청합시다. 히르헤라에서 인간과 마족 간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면 분명 도와주러 올 겁니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씁쓰름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은 제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일 겁니다. 히르헤라의 균열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마법 병단을 철수시켰다면서요?”
“그건 마족과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족이 침공했으니 이젠 제국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못할 겁니다.”
“황제가요? 그 사람이라면 이 기회에 북부 왕국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라도 수수방관할 겁니다. 지금도 남부와 대치 중이라면서요? 언제 북부와 그렇게 될지 모르니……. 우리가 망하기 직전에나 움직일 겁니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지적에 두 공작은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제국의 행보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다.
공기가 무거워지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몰록을 퇴치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제국보다 그가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과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발 벗고 나서지 않는 지금, 북부 왕국이 기댈 곳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득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타메이온의 칠십이 군주들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게 사실이라면……. 북부 왕국의 힘으로 히르헤라를 지켜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록의 군단을 피해 달아났던 대귀족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