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
109회.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지요
결국 밤을 꼬박 새운 연설주는 다음 날 새벽 미명에 일찌감치 일어났다.
그녀는 침상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가 차가운 물에 세안까지 마쳤다.
아침 식사 시간이 아직 한 시진(2시간) 이상 남았기에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오늘 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갔다.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풍가와 탁가를 찾아간다.
‘풍가와 탁가 중에 한 사람만 만나도 되겠지?’
풍가와 탁가에게 연적하의 거처를 묻는다.
연적하를 찾아간다.
‘그리고…….’
연설주는 그다음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역시 과거에 대한 사과가 먼저다.
묵은 감정을 털어 내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연설주는 연적하를 만나면 할 말을 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모든 건 엄마와 총관이 한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때 나는 고작 아홉 살에 불과했어. 가끔씩 네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그것으로는 부족하겠지?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나도 상방에 떠넘기려고 하실 정도로 독한 분이셨어. 오라비들은 장성한 지금도 엄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거짓이 아니다.
오라비들은 자신보다 더 엄마에게 길들여져 있다.
가문의 원수인 월하선자와 적당히 타협하겠다는 것을 반대하지 못할 정도로.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용서해 달라’고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건 아닌 것 같다. ‘미안하다’라고 하면 상대의 아픔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보이려나?
연설주는 ‘용서’와 ‘미안’의 단어를 두고 한참 망설였다.
‘아, 몰라. 그때 가 봐서 분위기에 맞게 하자.’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구차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거다.
-나도 연씨고, 또 네 누나잖아. 선조들이 남긴 비전에 대해 알고 싶어. 가르쳐 줘.
연설주는 자신의 귀에만 들리도록 나직이 속삭여 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마음은 급한데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다.
***
개봉.
다정(茶精) 찻집.
풍연초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 이걸 어쩌나. 연 아우는 어제 개봉을 떠났소. 어디로 갔는지는 가르쳐 드릴 수 없소. 연 아우가 연씨들과의 만남을 원하지 않아서.”
“개봉을 떠났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소.”
“풍 대협, 나는 과거의 일을 털기 위해 만나려고 했던 거예요.”
“미안하지만 나는 연 아우의 뜻을 존중하오.”
“좋아요. 그건 내가 적하를 만나서 해결하겠어요. 그 전에 궁금한 거 하나만 물을게요.”
“내가 아는 거라면 답해 드리리다.”
“풍 대협은 적하에게 연씨 집안의 비전을 배웠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소.”
“역시 그랬군요. 며칠 전 진안 야시장 입구에서 풍 대협과 탁 대협이 싸우는 걸 봤어요. 와룡장의 검술과 형태는 같은데 결과가 많이 다르더군요. 두 분의 무기가 박도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혹시 연 아우를 만나려고 하는 것도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첫째는 사과와 깨진 관계의 회복이 목적이에요.”
“그럼 두 번째가 비전에 대해 듣는 것이겠구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는 적하의 누이예요. 적하가 얻은 연씨 선조들의 비전에 대해서 나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풍연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당당한 건지 뻔뻔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연 아우의 뜻을 존중하오. 비전에 대한 궁금증 역시 연 아우에게 듣도록 하시구려. 연 아우는 나의 의제(義弟)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오. 제자가 어찌 스승의 뜻을 거스르겠소.”
“…….”
연설주가 입을 앙다물고 풍연초를 쏘아보았다.
“이봐요. 그럼 적하가 어디로 갔는지만이라도 알려 줘요. 나는 그를 꼭 만나고 싶다고요. 적하를 만날 기대에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그래, 이해한다. 비전이 궁금해서 미치겠지.’
풍연초는 안달이 난 연설주를 지켜보다 느긋하게 말했다.
“연 대주, 인연이 닿으면 연 아우와 만날 수 있을 게요. 그러니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시구려.”
“당신이 그 인연을 가로막고 있잖아요. 어디로 갔는지 알려 달라고요. 제발”
“내 입장은 이미 말했소. 바꾸는 일은 없을 거요.”
“…….”
주먹을 불끈 쥐고 파르르 떨던 연설주는 결국 포기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별 인사도 없이 쌩하니 찻집을 나갔다.
***
십이월 말.
정주 동남쪽 궁장(弓庄).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낡은 장원으로 이십여 명의 목수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공사를 벌여 장원 구석구석을 수리했다.
새해가 되자 목수들은 공사를 마무리 짓고 썰물 빠지듯 일시에 사라졌다.
장원의 현판은 걸리지 않았지만 마을엔 ‘무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
새해 첫날.
정주로 향하는 관도 위로 이두 마차 한 대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을 태운 마차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상체도 앞뒤 좌우로 움직였다.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보던 연적하가 말했다.
“심 노인, 내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해 봤는데 말야.”
“흐흐, 예.”
이번에는 무슨 거창한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심통은 호기심이 생겼다.
“우리가 벌써 십두마병을 둘이나 죽였잖아?”
“공자님이 죽이신 거지요.”
“갑자기 왜 발을 빼? 그렇게 유명교가 신경 쓰여?”
“그럴 리가요. 십두마병을 생각하면 저에게는 과분한 칭찬 같아서 말입니다.”
심통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솔직히 인간인 십두마병은 상대할 수 있지만 그 뒤로는 속수무책이었다.
몸에 칼이 안 박히는 건 둘째치고, 진가희의 경우 손바닥에서 지옥의 겁화까지 뿜어냈다. 그런 십두마병을 무슨 수로 당해 낸단 말인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던 심통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셨다는 겁니까?”
“유명교에서 우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왠지 그럴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럴 겁니다. 강호에서 복수는 기본이니까요.”
“그들은 우리가 와룡장 출신의 낭인인 줄 알고 있겠지?”
“아하. 혹시 그 일로 오봉산채가 피해를 입을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
“어.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알게 될 텐데, 그럼 가만있지 않을 거 아냐.”
“그래서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심통은 궁금하다는 듯 연적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줄 알았더니 나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호 경험이란 그런 식으로 쌓는 것이니 바람직한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아…….”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강호초출인 그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는 건 아직은 무리인가 보다.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말야. 무림인들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
“글쎄요. 저는 사문도 가족도 없이 혼자 떠돌아다녀서 그런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보고 들은 건 있을 거 아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왜에?”
“유명교는 공자님께서 오봉십걸이라는 걸 알아도 산채를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건 녹림과 척을 지는 행동이니까요. 공자님이 채주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산채에 책임을 묻겠습니까?”
“그럴까?”
“오봉산채를 없애고 얻는 것보다 녹림과 척을 져서 잃는 게 더 많습니다. 제가 유명교 교주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대체로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지요.”
“그럼 괜한 걱정 한 거네?”
“괜한 건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멀리 내다보셨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런 게 다 경험이 되는 거니까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심통이 흐뭇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 야비한 눈빛은 뭐야?”
“흐흐흐, 야비하다니요. 그럴 리가요.”
“얼씨구 웃음까지.”
두 사람이 툭탁거리는 동안에도 마차는 쉬지 않고 정주로 달려갔다.
***
하남성.
정주.
하나라의 창시자 우(禹)가 천하를 구주로 나누어 통치할 때, 하남성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 뒤로 하남성은 중원(中原) 또는 중주(中州)라고 불린다.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로 정사파 무림인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군소 무가와 무관, 방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서남쪽 등봉현에 칠파이문의 종주 격인 소림사가 있지만, 정주에서 하룻길이나 떨어져 있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점심 무렵.
거대한 도시 정주로 연적하와 심통이 타고 있는 이두 마차가 들어섰다.
마차는 성문을 통과해 한참 동안 전진하다가 역참(驛站)에서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요. 나리님들.”
마부의 외침에야 연적하와 심통은 마차에서 내렸다.
연적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보니 굉장히 크네.”
그냥 지나칠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난번과는 뭔가 달랐다.
“흐흐, 이전에도 컸습니다. 공자님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직 시간이 널널하니 식사부터 하러 가시지요.”
“그러자고.”
추운 날씨였지만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번화한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은 중원반점 앞에서 멈춰 섰다.
지난번에 들러서 한 식사를 했던 곳이다.
서로 마주보던 두 사람은 그 익숙함에 끌려 반점으로 들어갔다.
연적하는 반점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이전에 한번 와 봐서 그런지 낯설기보다는 반가웠다.
이름도 모르는 점소이는 여전히 분주한 모습이고, 계산대의 주인도 그대로다.
피식피식 웃고 있는 연적하에게 심통이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 없는데? 왜?”
“아까부터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별 뜻 없어. 지난번에 와 봤다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거야.”
“이유 없이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지요. 정주가 공자님에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늙은 심통이 그렇게 말하니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연적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연적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저 혼자 요동쳤다.
쿵.쿵.쿵.쿵.
그 거친 박동에 조금 전까지의 편안한 느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적하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심통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음험한 기운을 풍기는 무림인도 없고, 손님들 모두 평화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공자님?”
심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연적하를 불렀다.
그와 만난 이후로 저렇게 불안한 모습은 처음 본다.
도대체 무엇이 천외천의 경지에서 노니는 연적하를 저렇게 만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