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68
1368회.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다
“말도 안 돼…….”
파비안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소리였다.
엘리오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손짓으로 점원을 불러 맥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점원이 맥주를 가져다 놓고 돌아갔다.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파비안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공작입니다.”
“공작?”
“라고아 경도 아시겠지만, 제가 소피아 남작과 만난 건 칠 일 남짓입니다. 겨우 그 정도 만남에 임신이라니요? 그보다 훨씬 오래 만났던 여자들과도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아이가 아니다?”
“소피아 남작이나, 남부 왕국군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이미 임신한 상태에서 저와 만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
“본래는 라고아 경이 목표였겠죠. 하지만 라고아 경은 여자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니까, 만만해 보이는 저로 바꾸었을 겁니다. 소피아 남작과 엮어서 남부 왕국 쪽으로 끌어당기려고요.”
“일리 있는 지적이야. 하지만 임신한 상태에서 만나게 했다는 건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지 않냐?”
“속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겠지요. 임신한 소피아 남작에게 정신 마법을 쓸 사람은 없으니까요.”
엘리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파비안의 추측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언법과 정신 마법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결국 언법을 사용하면 친부가 누군지 간단히 드러날 터였다.
“만약 네 아이가 확실하다면?”
“그럴 리 없습니다.”
“너 고자냐?”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그럴 리 없어? 단 한 번의 관계로도 가능한데, 너는 칠 일간이나 소피아 남작과 만났잖아.”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보다 오래 만난 여자들도 아무렇지 않았다고요.”
순간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천재라더니 이런 쪽으로는 자신보다 더 무지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믿지 못하겠다니까, 누구의 씨인지 정도는 알아봐 주마. 그런데 만약 네 아이가 맞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닌 게 확실한데 왜 그걸 생각해야 합니까? 아드리아 왕국의 공작입니다. 이런 사적인 일에 정보 요원까지 동원한 걸 보면 뻔합니다.”
파비안은 완강히 거부했다.
엘리오는 그가 억지를 부리자 답답했지만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기다려 봐. 금방 알아보고 올 테니까.”
이런 일은 긴말이 필요 없다.
구룡번신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확인하고 돌아오면 그뿐이니까.
“지금요?”
“시간 끌어서 좋을 일 없잖아.”
“…….”
막상 엘리오가 알아보고 온다니까 파비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공작이라고 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어 불안한 것이다.
엘리오는 잔을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날아오른 엘리오의 신형이 허공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파비안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쌌다.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
과거 자신의 지인들 중에도 단 한 번의 관계로 애 아버지가 된 사람이 있었다.
‘마나 프트라스님, 다시는 여자들에게 눈 돌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쇼. 제발, 제발…….’
술자리지만 절로 기도가 나왔다.
파비안이 마음속으로 절규하듯 기도할 때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클라우드 남작?”
파비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타불라 마탑의 탑주인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레올라 후작님?”
파비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리에트의 후원자라는 건 알고 있느냐?”
“예? 예. 아리에트 양에게 들었습니다.”
“아리에트는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바르도스다. 그래서 내가 후원을 한 것이고.”
“…….”
파비안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소피아 남작의 일 때문에 아리에트의 이름만 들어도 괴로웠다.
“남작을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바르도스는 자기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아리에트를 보면서 늘 그게 안타까웠지. 아리에트가 그대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지 마라. 아리에트는 그대에게 과분한 여자니까.”
“……예.”
파비안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당당해야 할 순간에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결혼식은 제도에서 할 계획이라고?”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없습니다.”
파비안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리에트 양의 후원자인 후작에게 다른 말은 차마 꺼내기 어려웠다.
“나도 시간이 된다면 참석할 예정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파비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후작이 떠나자 파비안은 의자에 무너지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파비안은 갑자기 맥주를 입에 들이부었다.
헛배가 불러 올 정도로 맥주를 마셨을 즈음, 엘리오가 돌아왔다.
마치 근처에 볼일을 보고 온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가 대마법사나 가능한 공간 이동술로 아드리아 왕국의 크라시온 왕성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파비안이 취기에 살짝 충혈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응시했다.
“소피아 남작은 만나 보셨습니까?”
“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너다.”
“…….”
파비안은 얼 빠진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우연히 만나서 말 그대로 잠깐 즐긴 사이였는데 임신을 하다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자 파비안은 자기 뺨을 몇 차례 후려쳤다.
엘리오는 파비안의 기행을 그냥 지켜만 보았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앞둔 지금, 마음에도 없는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발목을 잡으니 답답하기도 할 게다.
한참 만에 파비안이 말했다.
“라고아 경이 확인했다면 제가 맞겠지요. 그런데, 제 아이를 가지면 상대가 누구라도 결혼을 해야 합니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단지 제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결혼까지 해 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서요.”
“취했냐?”
“예, 조금 취했습니다.”
“내일 맨정신으로 얘기하자.”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취한 건 아닙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엘리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라고아 경도 아시다시피 소피아 남작은 제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저와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의도된 잠자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임신도 의도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피아 남작은 순수하지 못한 목적으로 저에게 다가왔다 이 말입니다. 자기 몸을 도구로 사용한 겁니다. 왜 제가 그런 여자에게 발목이 잡혀야 하냐 이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엘리오가 말했다.
“네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야. 그런데 아리에트 양은 순수하게 너를 만났을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남작이 아니어도, 어비스의 모험가로 유명하지 않았어도, 제도에서 잘나가는 미녀 바르도스가 너를 만났을 것 같냐고?”
“그거랑은 조금 다릅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인마. 소피아 남작이나 아리에트 양이나 따지고 보면 거기서 거기야. 두 여자 모두 너의 유명세와 배경에 혹해서 너에게 접근한 거라고. 너도 양심이 있다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거다.”
“그래도 아리에트 양이 소피아 남작보다는 순수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다. 내가 볼 때 진짜 순수하게 너를 만난 사람은 세라 양이었다. 이제는 다 물 건너간 관계지만.”
그러자 파비안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래도 소피아 남작은 아닙니다! 그 여자는 처음 만난 날 저와 그 짓을 했습니다! 창녀만큼이나 헤픈 여자라 이 말입니다!”
“너는 소피아 남작과 뭐가 다른데? 소피아 남작이 혼자 했냐? 너랑 같이했잖아 인마. 그럼 너는 안 헤프냐?”
“진짜 너무하십니다! 라고아 경은 누구보다 그간의 일을 잘 아시면서, 왜 제가 아닌 소피아 남작의 편을 들어주십니까?”
“누구 편 든 적 없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목소리가 좀 크다? 그러다 맞으면 안 아프냐?”
“왜요? 때리시게요? 때리십쇼! 지금 같아서는 그냥 맞아 죽고 싶습니…….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파비안이 탁자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한 대 맞고 기절을 했는지 파비안은 일어나지 못했다.
엘리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잖아. 나는 뭐 고자라서 여자를 멀리하는 줄 아냐?”
신체 건강한 자신도 아침저녁으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고 견디는 것은 남궁연에 대한 사랑과 의리 때문이다.
곯아떨어진 파비안을 보니 안됐다 싶다가고 쌤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는 곳마다 그렇게 여자를 밝히더니 이번에 제대로 걸렸다.
“잘 결정해라. 의리 없는 놈은 내 옆에 안 둔다.”
늦게까지 홀로 자음자작하던 엘리오는 파비안을 둘러업고 숙소로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던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저녁에 많이 취했던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제가 라고아 경께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랬으면 살아 있겠냐?”
“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눈두덩에 왜 멍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제가 넘어지기라도 했습니까?”
“탁자 앞으로 머리를 박더라.”
엘리오는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치니까’라는 말은 굳이 해 주지 않았다.
“어쩐지. 넘어지면서 술잔에 박았나 봅니다. 이젠 술을 줄이든지 해야지.”
“오늘도 아리에트 양과 만나기로 했냐?”
“……예.”
“오마르 경이 어제 그러더라. 귀족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작위가 높은 여자를 정실로 맞이한다고.”
“…….”
파비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드리아 국왕이 밀어붙이면 소피아 남작과의 결합은 피할 수 없다.
둘이 북부에서 알콩달콩 살아갈 생각을 하는 아리에트 양에게 후실 소리를 한다?
아리에트 양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장을 바꿔 아리에트 양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면 자신도 그녀를 떠나갈 터였다.
“아리에트 양은 평민이지?”
“예.”
“그럼 정실은 정해진 거네. 아리에트 양처럼 유명한 바르도스가 남작의 후실로 만족할지 모르겠다?”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술에서 깬 파비안은 ‘제가 왜 소피아 남작과 결혼해야 합니까?’ 따위의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드리아의 국왕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가신이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 딴살림을 차린다?
쫓겨나는 것은 당연하고,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외출한 파비안은 평소와 달리 정오에 돌아왔다.
그리고 결과를 궁금해하는 엘리오에게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헤어졌습니다.”
엘리오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제국 최고의 미녀 바르도스가 남작의 후실이 되겠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두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가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창문으로 붉은 노을이 비껴들 때까지 계속됐다.
술에 취한 파비안이 주정 부리듯 말했다.
“라고아 경, 그거 아십니까? 지금 마음 같아서는요, 이거 저거 다 때려치우고, 마나 프트라스의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애는 어쩌고?”
“그래도 사제의 애인데, 마나 프트라스님이 잘 키워 주겠죠. 아닌가? 마나 프트라스님이 실제로 있기는 한 겁니까? 없는데 사기 치는 거 아닙니까? 있다면 왜 기도를 안 들어줍니까? 젠장!”
발언의 수위가 높아지자 엘리오는 파비안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른 이가 있었다.
“대신전이 있는 북구에서 마나 프트라스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그 실재를 부정하다니? 실로 오만하고 방자한 자로다.”
회색 로브를 걸친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불꽃같은 눈으로 파비안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