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4
1464회. 시체를 수집하는 이유가 있나?
다음 날.
오후가 되자 공연 기획자 알렌 바우처는 트레이시 골드를 따로 불렀다.
“부르셨어요?”
“트레이시, 우리가 함께 공연을 다닌 게 몇 년이지? 십 년쯤 됐나?”
“십일 년쯤 될걸요? 왜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트레이시는 알렌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너를 바르도스에 인생을 건 프로라고 생각했다. 목이 망가진 너를 데리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너는 프로가 아니야.”
“저 프로 맞아요. 바르도스에 인생을 건 것도 맞고요.”
“아니야. 음주와 흡연으로 네 목소리가 변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너는 프로가 아니야. 그러니 공연에 똥물을 끼얹은 거겠지. 내가 그 공연을 성사시키려고 귀족들에게 얼마를 쓴 줄 아느냐? 하아! 너 때문에 망친 빅토리아의 대관료만 해도 백 골드다.”
“제, 제가 뭘 했다고요?”
“뭘 했냐고? 오전에 그리프 자작을 만났다. 네가 하비 씨에게 한 짓을 말씀해 주시더라. 왜 그랬느냐? 왜 하비 씨를 부추겨 라고아 백작을 도발했느냐 말이다!”
“그, 그건…….”
트레이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하비가 자신과의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기사의 자존심에 혼자 안고 가려니 생각했는데…….’
기사에 대해 막연하게 품고 있던 환상이 깨져 나갔다.
“아니다. 들으나 마나 시시껄렁한 이유에서 그랬겠지. 옛정이 있으니 손해 배상은 청구하지 않겠다. 청구해 봐야 네 처지에 줄 수도 없겠지. 두 번 다시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떠나라. 히르헤라에서 네가 설 무대는 없을 게다. 나도 그렇지만, 그리프 자작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떠나라니요? 낮도 밤도 캄캄한 극야에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세요? 게다가 마물은 어쩌고요? 히르헤라에도 마물이 출몰하는데……. 히르헤라를 벗어나면 하루도 못 가 죽을 거예요.”
“보급 부대를 따라가면 안전은 보장될 게다.”
“혼자서 병사들을 따라가라는 건가요? 그러다 강간이라도 당하면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나는 네 보호자가 아니라 너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이야. 네가 강간을 당하든, 몸을 팔든, 내가 신경 쓸 것 같아?”
“뭐라고요? 바르도스에게 몸을 팔라고요? 당신은 위선자예요!”
“내가 언제 몸을 팔라고 했어? 나는 너의 일에 아무런 신경도 안 쓸 거야. 알아먹었으면 그만 나가 봐.”
단호한 알렌의 태도에 트레이시는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트레이시가 떠나자 알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가 어찌어찌 히르헤라를 떠난다 해도 안전할지는 의문이다.
귀족의 복수심은 질기고 음습하기 때문이다.
***
엘리오는 다시 마족 군주를 찾아 길을 나섰다.
토르누비스(운종술)로 날아오른 엘리오는 희미한 별자리를 참고해 전진했다.
참고라고 하지만 실은 어림짐작이다.
애초에 별자리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았다면 방향을 잃어버릴 리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는 막막할 때마다 ―마치 그곳에 답이 있는 것처럼― 별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이 한 바퀴 이상 돌아간 지금도 그랬다.
“쯧! 봐도 모르겠단 말이지.”
아쉬운 듯 혀를 차던 엘리오는 느닷없이 방향을 틀었다.
자신의 ‘느낌대로 가면’ 늘 목적지에서 멀어지니 아예 ‘아닌것 같은’ 방향을 선택해 본 것이다.
구룡번신이라는 공간 이동술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역발상이었다.
엘리오는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어둠 속을 날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제 그만 돌아갈까 망설일 때 땅에서 불빛이 보였다.
아래로 슬쩍 내려가니 코디악만큼이나 거대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마족 군주의 성이 있음 직도 했다.
“이거지!”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구름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잠시 후,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거대한 성의 앞마당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땅 위에 내려선 엘리오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연신 좌우를 살폈다.
흑빛의 성은 코디악에 있는 ‘몰록의 성’과 느낌이 비슷했다.
“마족 군주의 성인 것 같은데…….”
정원을 어슬렁거리자 역시나 허공에서 데몬족들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누구냐!”
“너는 인간이냐? 마족이냐?”
고개를 들어 데몬족들을 올려다보던 엘리오가 점잖게 말했다.
“나는 모쿠바스의 군주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 이곳은 어디냐?”
순간 데몬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모쿠바스의 군주는 오 년 전부터 마족들 사이에 유명했다.
혜성처럼 나타나 몰록을 죽이고 모쿠바스의 군주가 된 부라퀴족.
마족 군주들은 호전적이지만, 대부분의 마족 군주는 그와의 만남을 꺼렸다.
그럴 정도로 모쿠바스의 군주는 군주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몬족 중에 우두머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곳은 그로네미아 지역이며, 이 성은 무르모르 군주님의 다크 캐슬입니다.”
“무르모르 군주를 만나고 싶으니 안내해라.”
“군주님은 지금 쉬고 계시는 중인데…….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데몬족 우두머리 투락은 몸을 돌려 성안으로 걸어갔다.
무르모르 군주가 쉴 시간이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마족 군주들은 하나같이 괴팍해서 비위를 건드려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잠시 후 투락은 모쿠바스의 군주를 내성 중앙 홀까지 안내한 뒤, 놀란 집사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집사장은 모쿠바스의 군주가 찾아왔다는 말에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엘리오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중앙 홀 구석구석을 살폈다.
내부 장식만 봐도 무르모르가 얼마나 괴상한 군주인지 알 것 같았다.
사방 벽마다 마족들의 시체가 박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부라퀴족으로 보이는 시체도 있었다.
다른 마족의 박제를 봤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부라퀴족의 것을 보니 내심 불쾌했다.
자신을 동족으로 여기는 부라퀴족이라 동정심이 일어난 모양이다.
엘리오가 부라퀴족 박제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황소 머리를 한 거인이 중앙 홀로 들어왔다.
하지만 엘리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나마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불쾌함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황소 머리의 거인, 무르모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나는 그로네미아의 군주인 무르모르요.”
그제야 엘리오는 뒤로 돌아섰다.
황소 머리를 한 거인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엘리오 라고아 군주다.”
부라퀴족 박제를 보고 속이 꼬인 엘리오는 다짜고짜 말을 놓았다.
무르모르는 흠칫했지만 왜 반말을 하냐고 지적하지 않았다.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해야 존중을 받는다.
모쿠바스의 군주가 발람을 죽여 준 덕분에 군주가 된 그로서는 감내해야 마땅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나야 시간을 안 보고 다니니 늦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하하, 그렇지요. 밤낮이 사라진 터라 더욱 그러실 겁니다.”
무르모르는 아예 저자세로 나갔다.
전임 군주인 발람보다도 약한 그가 발람을 죽인 존재에게 뻣뻣할 수는 없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다. 부탁할 일도 있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로네미아의 것은 모두 군주님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마족 군주들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나?”
“어쩌다 높으신 분들이, 필요한 게 있을 때 연락을 해 오기도 합니다.”
“잘됐군. 그렇다면 나를 대신해서 이 근방의 마족 군주들에게 연락을 해 줬으면 한다.”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신 게 그것입니까?”
“왜? 문제 있나?”
“아닙니다. 그건 부탁이 아니라 말씀만 하셔도 되는 일이라…… 여쭤본 겁니다.”
“보기와 달리 싹싹한 친구로군.”
엘리오가 삐뚜름한 눈으로 무르모르를 올려다보았다.
무르모르는 감히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슬쩍 내리깔았다.
“마음 같아서는 타메이온의 모든 군주를 부르고 싶지만 그건 힘들 것 같고. 인간의 땅과 접한 지역의 군주들이라도 불러 모으려고 한다. 며칠이면 다 올 수 있겠나?”
“그 정도면 보름이면 됩니다.”
“여기가 그로네미아라고 했지?”
“예.”
“이전 군주가 발람이었던가?”
“맞습니다.”
“오 년 전 마족 군주들이 인간의 땅을 침략할 때 너도 있었나?”
“아닙니다. 그 당시 저는 다크 캐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일은 알고 있겠지?”
“예.”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타메이온에 구멍 난 빙벽으로 통하는 회랑이 있더군. 그 회랑을 지나면 히르헤라라 불리는 인간의 땅이지.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
“카니보라 회랑입니다.”
순간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카니보라는 마족의 언어로 ‘포식’을 뜻한다.
인간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마족의 생각이 잘 드러난 작명이었다.
“내가 카니보라 회랑과 인간의 땅 접경지에, 마족과 인간의 땅을 나누는 경계비를 세울 것이다. 근처의 군주들에게 보름 후 제막식에 참석하라고 알려라.”
“경계비가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 인간의 땅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글을 새긴 비석이다.”
“아…….”
“마족이 인간의 땅을 침범하면, 내가 그들의 영토를 피로 씻겠다는 맹세의 증표지.”
“…….”
무르모르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마족 군주 여럿을 때려잡은 존재답게 스케일이 남달랐다.
용무를 마친 엘리오는 떠나기 전 문득 물었다.
“벽에 걸린 시체들은 뭔가?”
“그게, 그러니까…… 제가 군주에 오르는 걸 반대하던 마족들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진열해 놓은 겁니다.”
“내가 부라퀴족이라는 걸 알고 부라퀴족 시체를 걸어 둔 줄 알았다.”
“절대 아닙니다.”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라퀴족은 떼어 내겠습니다.”
“시체를 수집하는 이유가 있나?”
“그건 제가 시체를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영혼을 소환해 조롱하려면 시체가 있어야 하기에…….”
“생긴 것과 많이 다르군.”
엘리오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르모르를 보았다.
소처럼 선한 눈망울로 그런 기괴한 짓을 한다니 놀라울 뿐이다.
중앙 홀을 걸어가던 엘리오가 문득 무르모르에게 물었다.
“그 영혼을 소환한다는 기술 말이야. 나도 배울 수가 있을까?”
“물론입니다.”
무르모르는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모쿠바스의 군주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묵묵히 방법을 들은 엘리오가 무르모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오늘 한 부탁을 잊으면 너도 박제가 된 내 동족처럼 만들어 줄 거다. 죽어서 나를 만나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예!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무르모르는 군주의 체면도 잊고 큰 소리로 답했다.
그제야 엘리오는 만족한 얼굴로 다크 캐슬을 빠져나갔다.
처음 도착한 앞마당으로 나와 회중 시계를 보니 3시다.
다만 새벽인지, 오후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가 보면 알겠지.”
중얼거리던 엘리오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구룡번신을 펼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던 엘리오의 신형이 한순간 사라졌다.
***
헤르헤라 주둔지.
마치 텔레포트처럼 허공에 마력장이 생성되더니 이내 한 남자가 나타났다.
블랙 캐슬에서 구룡번신을 사용한 엘리오다.
히르헤라 주둔지로 돌아온 엘리오는 가장 먼저 불빛부터 확인했다.
가로등이 꺼진 걸 보니 새벽 3시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잠잘 시간인 새벽에는 가로등을 꺼 두기 때문이다.
“쯧! 딱 맞게 떨어지질 않는단 말이지.”
어둠의 에테르 때문인지 생각한 장소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지금도 서부군 사령부 막사를 떠올렸는데 막상 와서 보니 헤르헤라 도시 외곽이다.
하지만 어비스에서 경험한 일이기에 엘리오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부군 사령부를 향해 걷는데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살려 주세요! 악!”
소리를 듣자마자 엘리오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여자를 금방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의 에테르가 섞인 어둠이 엘리오의 시야를 방해한 까닭이다.
여자는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잠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