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5
1465회. 선과 악이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비명을 들은 지 5분 만에야 엘리오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는 많아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여자의 옷차림은 비교적 깨끗했다.
뜨내기가 아니라 정착민일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오는 영기를 방사해 인기척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어.”
여자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명을 내질렀던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비명횡사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이 해 줄 일은 없었다.
엘리오가 막 돌아서려 할 때 몇 명의 청년들이 들이닥쳤다.
“꼼짝 마라!”
“살인범이다!”
엘리오를 에워싼 청년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청년들은 시체 옆에 서 있는 청년이 기사처럼 보이자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청년들 중에 하나가 가장 어린 청년에게 소리쳤다.
“도노반! 치안대에 신고해! 그동안 우리가 범인을 잡고 있겠다!”
도노반이라 불린 청년은 멈칫하더니 이내 돌아서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청년들을 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이봐.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나도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이니까.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냐? 누구기에 이 새벽에 칼을 들고 설치는 거지?”
도노반에게 신고하라고 했던 청년, 미켈이 미심쩍은 눈으로 기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히르헤라의 자경단입니다. 나는 자경단 조장인 미켈이고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이 새벽에 도시 외곽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자경단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엘리오는 자신을 밝혔다.
“나는 서부군 사령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으면……. 흐음, 기사가 돼라. 그건 그렇고, 자경단이 왜 도시 외곽을 순찰하고 있지? 그것도 이런 새벽에?”
히르헤라는 군사 도시로 치안이 뛰어나다.
그런데 자경단이 도시 외곽까지 순찰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켈이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답했다.
“그, 그게, 며칠 전부터 도시 외곽에서 계속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어서요. 자경단에서 도시 외곽까지 순찰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이라고?”
“예, 오늘로 세 명째입니다.”
엘리오가 자경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도노반이 치안대와 함께 돌아왔다.
다행히 치안대 조장 라울이 라고아 백작을 알아보고 넙죽 머리를 숙였다.
“헉! 라고아 백작 각하.”
“나를 아나 보네? 다행이군. 여자 비명을 듣고 왔더니 죽어 있었다. 최근 이런 살인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그, 그렇습니다. 네 명째입니다.”
“자경단원은 세 명이라고 하던데?”
“어젯밤에 살해당한 시체 한 구가 더 발견되었습니다.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몰랐을 겁니다.”
“네 명이라. 희생자는 모두 여자인가?”
“그건 아닙니다. 어젯밤에 발견된 시체는 남자였습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소리군. 범행 도구는?”
“모두 칼에 당했습니다.”
라울의 시선이 쓰러진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의 상체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범인에 대한 단서는 있나?”
“아직 없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라울에게 말했다.
“내가 알아볼게 있으니 사람들과 함께 삼십 보 밖으로 물러나라.”
“예!”
라울은 왜냐고 묻지 않고 치안대와 자경단을 뒤로 물렸다.
어둠의 에테르 때문에 삼십 보 뒤로 물러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앞쪽을 기웃거리던 미켈이 치안대 조장 라울에게 슬쩍 물었다.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라고아 백작 각하는 마검사시잖느냐. 마법으로 뭔가 알아보려고 하시는 거겠지.”
“우리가 보면 안 되는 건가 봅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든가.”
“조장님은 안 궁금하십니까?”
“관심없다. 나는 라고아 백작 각하와 말을 해 본 것으로 만족한다.”
“설마…… 라고아 백작 각하가 범인은 아니겠지요?”
“미친 소리.”
“시체로 뭔가 하기 위해서 죽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쯧쯧!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것 같으냐?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아.”
미켈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 라고아 백작이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시체를 가지고 가도 된다. 다른 시체들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아 백작의 물음에 라울이 서둘러 답했다.
“어젯밤의 시체는 아직 치안대 창고에 있습니다. 다른 시체들은 모두 불에 태웠습니다.”
“어젯밤에 발견된 시체만이라도 봐야겠다. 안내해라.”
“예!”
라울은 수하들에게 여자의 시체를 수습하라 명하고 라고아 백작과 함께 치안대로 향했다.
엘리오는 치안대 창고에서 어젯밤 발견된 시체를 살폈다.
‘범인을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본 정도?
엘리오가 치안대 창고를 나서자 라울이 쪼르르 달려왔다.
“각하.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으셨습니까?”
“희생자들과 만난 적이 없는 사십 대 남자다. 한쪽 볼에 칼자국이 있다고 하더군. 희생자 주변을 뒤져 봐야 소용없을 거다. 그보다 볼에 칼자국 있는 남자를 찾아서 조사해 봐라.”
“헉! 시체만 보고도 그런 걸 알 수 있으십니까?”
엘리오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이고 치안대를 떠났다.
***
서부군 사령부로 돌아온 엘리오는 두문불출했다.
그로네미아의 군주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했으니 이제 제막식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사흘쯤 지났을까?
하루 일과를 마친 엘리오가 막사에서 쉴 때 파비안이 불쑥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마족 군주를 만나는 일은 다 끝나신 겁니까?”
“어.”
“아! 그래서 숙영지에 머무르고 계셨던 거군요?”
“그래야지. 이렇게 캄캄한데 나가서 뭐 하려고.”
“요즘 히르헤라의 분위기가 좀 뒤숭숭한 거 아십니까?”
“살인 사건 때문에?”
“아니요. 사람 죽는 게 뭐 하루 이틀 일입니까? 그보다는 저 극야(極夜)를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할 말이 뭐가 있다고?”
“그냥 어둠이 아니라 종말의 전조랍니다.”
“종말?”
“예사 어둠이 아니지 않습니까? 불빛이 십 미터도 안 뻗어 나가고. 기사는 물론 마법사들도 이런 어둠은 처음이랍니다. 이게 극야가 맞냐는 소리도 요즘 나오고 있습니다.”
“극야가 아니면 뭔데?”
“낮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거죠.”
“흠. 그럴지도 모르지.”
“헉! 백작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게 보통 극야가 아닌 건 분명해. 나조차도 멀리 볼 수 없으니까.”
“예에? 백작님도 보는 데 지장이 있습니까? 저는 백작님은 평소처럼 꿰뚫어 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멀리까지 안 보여서 답답해. 무슨 검은 안개가 낀 것 같다고.”
“백작님도 그러시구나. 그렇다면 정말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데요? 이러다가 세상이 멸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멸망하지는 않을 거다.”
“왜요?”
“지금의 이 어둠이 영원히 계속될 거 같지는 않아. 그래서는 악신 샤이틴이 만든 생명체들도 살 수 없을 테니까.”
“어둠이 언젠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세상이 어둠의 에테르로 충만해지면 어둠도 걷히지 않겠어?”
“어비스의 대기처럼요?”
“그래, 어비스처럼.”
“세상이 어둠의 에테르로 가득 차면…… 마물들 세상이 되는 거네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마나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종말인 거네요.”
파비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엘리오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했다.
“파비안,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래도 인간에게는 마공학이 있으니까. 마력총과 타나토스라면 어지간한 마족들은 다 상대할 수 있다.”
“그래도 기사와 마법사는 끝난 거 아닙니까.”
“마나 프트라스가 죽는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살아 있으니까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다시 마나로 가득한 세상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악신 샤이틴이 살아 있는 한 그건 어려울 거다.”
“그럼 뭡니까?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설마하니 어둠의 에테르와 마나가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
“예? 그건 불가능합니다. 마나 프트라스와 악신 샤이틴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이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있어.”
“어떻게요?”
“멀리 볼 것도 없어. 너 자신을 들여다봐. 너는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
“저야 당연히…….”
파비안은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파비안이 말했다.
“저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고요. 마나 프트라스와 샤이틴은 신이잖습니까.”
“신이라고 다를 것 같냐?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일 뿐, 그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과 비슷해. 신들도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을 가지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어떻게 마나 프트라스가…….”
파비안은 라고아 백작의 급진적인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악신 샤이틴은 멸망시켜야 할 원수인 까닭이다.
“됐고,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자. 오늘 내가 사마.”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주섬주섬 몸에 걸쳤다.
***
잠시 후 막사를 나간 두 사람은 히르헤라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가로등을 따라 걷던 엘리오가 문득 말했다.
“어라? 어둠의 에테르가 조금 옅어진 것 같은데?”
“정말요?”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낮에만 해도 가로등 한 개 거리만 보였는데, 지금은 그 너머까지 보인다.”
“진짜면 좋겠습니다. 어둠은 지긋지긋합니다.”
“나도. 어둠의 에테르와 함께 극야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밤이라고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금방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빅토리아 앞에서 멈칫했다.
빅토리아의 안주는 식사 대용으로도 무난했지만 두 사람은 지나쳤다.
두 사람은 빅토리아 다음으로 큰 주점 앞에서 멈춰 섰다.
“돌고래 펍? 여기 괜찮냐?”
“괜찮습니다. 부대장들과 자주 찾는 곳입니다. 분위기는 좋은데 술값과 안줏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거든요.”
“그래?”
엘리오가 관심을 보이자 파비안이 앞장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파비안을 알아본 지배인, 사라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사라는 파비안 일행을 창가 쪽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윽고 파비안과 청년 기사가 착석하자, 그녀가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클라우드 남작님, 그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얼마 전에 빅토리아에서 쫓겨난 트레이시 골드요.”
“그 여자가 왜?”
“어젯밤에 죽었대요.”
“응? 죽어? 마수라도 만났대?”
“살해당한 것 같다고 하던데요? 요즘 ‘도살자’라고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범이 있거든요. 그 도살자에게 당했대요. 극야가 빨리 끝나야지, 어디 무서워서 살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밤낮 없이 어두워도 그렇지, 사방에 왕국군 병사들이 널렸는데 살인이라니? 참 대범하지 않아요?”
트레이시 골드에 대해 알고 싶지 않던 엘리오는 서둘러 술과 안주를 시켰다.
주문이 끝난 뒤에도 사라가 더 말하려 하자 엘리오는 그녀를 쫓아 보냈다.
술과 안주를 기다리던 파비안이 무심코 말했다.
“그 여자 운도 없네요. 하필 도살자 같은 놈을 만나서…… 허! 그런 거 보면 사람이나 마물이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냐?”
“에이, 그래도 사람이 훨씬 낫죠. 도살자 같은 사람이 흔한 건 아니잖습니까?”
“장담하지 마.”
“아니, 그런데 백작님. 그 도살자 진짜 미친놈 아닙니까? 히르헤라 같은 군사 도시에서 그런 짓을 하다뇨? 얼마나 우리 기사들이 만만해 보였으면 여기서 그런 짓을 할까요? 누군지 잡아서 면상을 확인하고 싶네.”
“듣고 보니 나도 기분 나쁘네. 잡자, 그 도살자 새끼.”
엘리오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감히 자신의 앞마당에서 살육이라니?
히르헤라를 탈탈 털어서라도 잡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