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85
1485회. 결국은 사랑이 문제다.
엘리오는 즉시 선 채로 운기요상에 들어갔다.
구천기로 일 주천을 하니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외상이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엘리오는 눈을 떴다.
미약하나마 온몸에 활력이 느껴졌다.
소매를 걷고 팔뚝을 확인해 보니, 과연!
아브라나트의 깃털에 맞아 뚫려 있던 구멍이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저주가 사라지자 뒤늦게 전사의 가호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샤이틴의 신상을 보았다.
악신 샤이틴.
그 끔찍한 악명과 달리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다.
솔직히 그의 도움이 없었어도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천검령은 살검이면서 활검이다.
구천검령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아브라나트의 저주를 끊어 냈을 터였다.
어쩌면 샤이틴도 그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이변이 없는 한 죽을 거라고 했다.
‘반드시 죽는다’와 ‘이변이 없는 한 죽는다’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뭐, 그래도 도와준 건 도와준 거니까.”
자신을 향한 샤이틴의 살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자축할 일이었다.
샤이틴 정도 되는 창조신에게 원한을 사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그의 마력석을 부수고도 원수가 되지 않은 게 기적이다.
“그건 그렇고.”
엘리오가 천천히 돌아섰다.
신상 뒤에 숨어 있던 제국군 생존자와 사제 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엘리오는 가볍게 생존자들을 둘러보았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와 사제 둘, 총사 삼십여 명, 그리고…….
엘리오의 시선이 싱크레어 지터에게서 멈췄다.
그녀는 소드 비기너에 불과한데 용케도 살아 있었다.
엘리오의 시선을 의식한 싱크레어가 후다닥 달려 나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스승님!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엘리오의 시선은 무심했다.
“싱크레어 지터. 너를 파문하겠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스승님…….”
“파문했으니 지금부터 나를 스승이라 부르지 마라. 아울러 너에게 준 것을 거두어 가겠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싱크레어는 고개를 들어 라고아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라고아 백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빈 들판의 아들(공야자)과 늙지 않는 푸름(청불노)의 제자, 남쪽 하늘 연못(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잊어라.”
이윽고 엘리오는 싱크레어의 어깨를 다독이듯 툭툭 두드렸다.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라고아 백작을 올려다보던 싱크레어가 굳었다.
어깨를 타고 들어온 힘이 마나홀로 빨려 들어가더니, 돌연 마나홀이 펄펄 끓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애지중지 키워 나가던 마나홀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헉! 어떻게?’
속으로 되뇌이던 싱크레어의 눈이 커졌다.
‘라고아 백작이 영기를 주입했구나!’
그제야 싱크레어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나와 영기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관계.
이 모두가 라고아 백작의 영기에 자신의 마나홀이 오염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기사가 된다.
기사는 준귀족.
준귀족에서 다시 평민으로 신분이 떨어진 셈이다.
싱크레어는 죽고 싶을 만큼 절망했지만, 감히 불만을 표시하지는 못했다.
사실 라고아 백작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인 까닭이다.
‘그, 그래도 공을 세웠으니 황제 폐하께서 작위를 내려 주시겠지?’
지금으로서는 믿을 게 그것밖에 없었다.
라고아 백작을 두려워하는 황제가 그렇게 해 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싱크레어가 뒤로 물러나자 안나 사도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라고아 백작님은 마나 프트라스 교단뿐 아니라, 이 세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단은 백작님에게 입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엘리오는 쓰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치운 것에 불과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우샤스 운드라를 죽여서 생긴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게 마나 프트라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해도 말이다.
마나 프트라스에게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빨리 고향에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안나 사도에 이어 정벌군 참모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정벌군은 백작 각하께 무조건 항복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엘리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비스 정벌군이 자신에게 마력총을 쐈지만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그는 전의를 상실한 정벌군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샤이틴도 살려 둔 마당에 무슨…….’
키우던 개가 사람을 물었으면 주인에게 따지면 될 일이었다.
멀찍이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총사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엘리오는 살아남은 정벌군과 함께 신전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밖에 진 치고 있던 마족과 마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샤이틴이 사라지기 전에 모종의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다.
엘리오는 정벌군과 함께 비공정에 올라탔다.
이윽고 비공정이 이륙했다.
선수로 돌아간 엘리오가 난간에 걸터앉자, 총사 중에 하나가 의자를 내왔다.
싱크레어가 할 일을 총사가 대신 한 것이었다.
엘리오는 총사에게 감사를 표한 뒤 의자에 걸터앉았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검은 산을 보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사흘간 비행해 비공정은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늘 어디에도 그들이 올 때 통과한 검은 구체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참모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이 본래대로 돌아갔다면 어비스도 그럴 것이라 추측했다.
비공정은 다시 과거 어비스의 안전지대로 선수를 돌렸다.
안전지대의 마을에 도착하자, 과연 이전처럼 작아진 검은 구체가 보였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정벌군은 비공정을 버려두고 과거 모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례로 검은 구체를 통과했다.
***
남부 대수림.
노천 광산.
어비스 출입 사무소 앞에 떠 있는 검은 구체에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살아남은 어비스 정벌군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총사들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저기 서 있는 건물이 어비스 출입 사무소다. 검은 태양이 과거 이곳에 있던 어비스 출입구였던 모양이다.”
그제야 총사들은 이해했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오는 정벌군과 함께 노천 광산 위로 올라갔다.
오후 2시의 태양이 사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총사들이 들뜬 얼굴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사방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끽! 끽! 끽!”
“케! 케! 케! 케!”
뒤늦게 정벌군은 자신들이 남부 대수림에 있음을 깨닫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남부 대수림은 괴물이라 불리는 기괴한 신종 생명체들의 온상인 까닭이다.
곧이어 숲속에서 처음 보는 형상의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 머리를 가진 이족 보행의 괴물이 있는가 하면 돼지 머리를 가진 이족 보행의 괴물도 있었다.
놀랍게도 괴물들은 인간처럼 ―조잡해 보였지만― 방어구는 물론 무기까지 갖춘 상태였다.
퍼퍼퍼펑―!
총사들의 마력총이 불을 뿜었다.
돌진해 오던 이족 보행의 괴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서른이 넘는 총사들의 사격에 괴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일방적인 전투라 엘리오는 끼어들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백여 마리가 쓰러지자 괴물들은 도로 숲속으로 달아났다.
정벌군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떠오를 때다.
이번에는 숲속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총사들 대부분이 마나 유저인지라 어렵지 않게 화살을 막아 냈다.
하지만 상처를 입지 않았음에도 총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숲에 숨어 원거리에서 활을 쏘는 괴물이라니!
아무리 정벌군이 강하다 해도 조금만 방심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그러나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라졌던 마나 프트라스 사제들의 신성력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찬밥 신세였던 안나 사도와 사제들의 지위가 단숨에 격상됐다.
정벌군과 사제들의 조합을 지켜보던 엘리오는 안나 사도를 따로 불러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밑에 토르누비스(운종술)로 만들어진 구름이 깔렸다.
구룡번신을 사용하면 단숨에 제도로 갈 수 있지만 토르누비스를 쓴 건, 남부의 현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엘리오와 안나 사도를 태운 구름이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다.
남부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보호 장벽이 없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파괴됐고, 도시만 남아 있었다.
도시들이 마치 대수림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그래도 가끔씩 지상으로 내려가 만난 사람들은 검은 태양이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뉘늦게 엘리오는 그들이 괴물보다 검은 태양을 더 두려워했다는 걸 알았다.
괴물은 마력총으로 물리칠 수 있지만, 검은 태양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오는 북상하면서 죽음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했다.
괴물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괴물은 그 괴괴한 형상과 달리 놀라우리만치 인간을 닮아 있었다.
단지 이족 보행만이 아니다.
괴물은 마수나 마물과 달리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심지어 개 머리와 돼지 머리의 괴물은 인간 여자를 범해 또다른 변종을 생산하기도 했다.
엘리오는 악신 샤이틴이 괴물을 만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의 창조자인 마나 프트라스를 조롱, 내지는 능멸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신 샤이틴과 마나 프트라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힘을 잃은 마나 프트라스와 악신 샤이틴의 싸움이라.
볼만은 하겠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인간의 미래가 걱정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 무관한, 이세계 인간과 신 들이 풀어 나가야 할 숙명이었다.
***
론디니움 제국.
수도 페트로폴리스.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페트로폴리스 북구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곧이어 구름에서 젊은 남녀가 내려왔다.
대수림을 떠난 엘리오와 안나 사도다.
두 사람은 조만간 대신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홀로 거리를 걷던 엘리오는 술집 겸 숙박업소인 페르모사 에스텔라의 앞에서 멈춰 섰다.
5년 전 처음 그가 제도에 왔을 때 묵은 곳이다.
딱히 갈 곳이 없기도 했지만, 추억이 깃든 곳이라 다시 찾은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과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전에는 이 정도로 냄새가 심하지 않았는데, 어둠의 시대 동안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내부를 둘러보다 구석의 빈자리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술과 음식을 먹고 있노라니 여자 바르도스가 처량한 노래를 불렀다.
엘리오는 술잔을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결국은 사랑이 문제다.
상계도 하계처럼 사랑에 울고 웃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엘리오는 페르모사 에스텔라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정오경 황궁을 찾아갔다.
그가 정문에서 신분을 밝히자, 마치 벌집을 쑤신 듯 황궁 수비대가 분주하게 뛰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