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19
219회. 돈을 쓰는 기준이 있다고요
석우대가 마뜩잖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갑자기 튀어나온 외조카가 신경 쓰입니다. 나이는 젊다지만 칼을 찬 걸 보면 무림인 아닙니까? 무림인들이 어디 남의 눈을 신경이나 씁니까?”
석씨 형제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도 이우석의 집에서 굴욕을 맛보았기에 석우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석일함이 아들을 보았다.
“우대야, 네가 형양현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형양현요?”
형양현은 석장촌에서 한 시진(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다.
갑자기 부친이 형양현에 다녀오라니 석우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강월 현령이 재종백부(아버지의 칠촌 형제)라는 것을 잊었느냐? 가서 인사드리고 보름 후의 혼사에 꼭 참석해 달라 청하거라.”
아들의 두 번째 혼인인지라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현령까지 불러서 판을 키우면 이우석도 군말 없이 따를 것이었다.
부친의 뜻을 알아차린 석우대의 얼굴이 비로소 환하게 밝아졌다.
“예.”
***
단칸방에 다섯 명이 모여 앉자 방이 꽉 찼다.
“……그해에 외삼촌과 이모가 죽었지. 그 뒤로 나만 남았고. 여기서 네 외숙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유랑걸식을 하며 살아야 했을 게다.”
말과 함께 이우석이 옆에 앉아 있던 처 장소미의 손을 잡았다.
“이이는 손님 앞에서.”
장소미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뺐다.
연적하는 외숙 부부의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금슬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곧 유화가 시집을 간다면서요?”
연적하의 말에 훈훈하던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이우석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유화와 연적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오고 갔는지 알지 못해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동안 처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처가에만 손을 내밀기가 미안해서 촌장님 신세를 좀 졌지. 촌장님이 후덕한 분이시라 도움 받은 사람이 많거든.”
이우석은 이 부분에서 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석장촌이 석씨와 장씨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류는 석씨였다. 땅도 거의 석씨 땅이고, 촌장의 땅을 경작하는 장씨도 몇 있었다.
“한 해 두 해 빌린 돈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큰돈이 됐더라고. 그 은혜를 갚겠다고 유화가 촌장님 댁에 나가서 부엌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그런 유화를 예쁘게 보셨는지 촌장님께서 아들과의 혼인을 물어보시더라. 유화도 반대하지 않고 해서 그러자고 한 게다.”
이우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소미가 한마디 했다.
“유화가 좋아서 그랬겠어요? 제가 반대하면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질 것 같으니 그런 거죠.”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과 내가 나무도 해다 팔고, 삯바느질도 해서 잘살고 있구만. 먹고살 길이 왜 막막해져?”
“잘살고 있어서 그렇게 돈을 빌려 썼어요? 대체 얼마나 빌렸길래 거절도 못 하고 유화에게 그런 걸 물어 봐요? 말 나온 김에 들어나 봅시다.”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우석을 향했다.
분위기를 보니 누구도 금액에 대해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이우석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은자 삼백 냥이 조금 넘소.”
“아니 언제 그렇게 큰돈을 빌려다 썼어요? 그 정도로 돈 들어갈 일도 없었는데!”
“설마 내가 허튼짓을 하느라 빌렸겠소? 삼 년 전 유화가 병들었을 때 약값이 좀 컸소.”
장소미가 이유화를 힐끔 보았다.
딸이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를 보니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눈치다.
촌장 집에 드나들며 일하더니 거기서 주워들은 걸까?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이유화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누구나 한번 혼인을 한다잖아요. 그리고 석장촌에서 촌장님 댁보다 더 좋은 혼사처도 없고요.”
상황이 이러다 보니 팔려 가는 느낌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녀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몸쯤 바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우석이 계면쩍은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뭐, 들었다시피 그런 사정으로 유화를 촌장님 댁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연적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외조부와 외조모가 어머니를 지나가던 백가장 무인에게 팔 때도 이랬겠지?
의외로 연적하가 더 캐묻지 않자 이우석이 물었다.
“그런데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연적하가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여섯 살 때 따라가셨어요. 그 뒤 어쩌다 칼질하는 법도 배우고, 요즘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어요.”
말만 들어서는 의지할 데 없는 낭인이다.
이우석과 그의 가족들은 연적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소미가 안쓰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쯧쯧!”
“적하야, 정착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석장촌에 눌러앉아도 된다. 나와 함께 나무를 해서 팔거나, 산을 개간해 보는 건 어떠냐?”
“석장촌은 아닌 것 같아요.”
연적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딱 부러진 연적하의 거부에 이우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달리 정해 둔 곳이라도 있느냐?”
“어머니도 여기서 팔려 가셨는데, 외숙도 유화를 촌장 집에 팔아넘기는 분위기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내다 파는 동네라니, 마음에 안 들어요.”
“…….”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이우석은 한순간 멍한 얼굴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이우석이 노기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언제 유화를 팔았다고 그런 소리야! 유화가 그 집으로 시집가겠다고 했잖아! 너도 방금 들어 놓고 그게 무슨 망발이냐!”
연적하가 화를 내는 이우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외숙.”
“말해!”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져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지금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와!”
연적하가 옆에 놓여 있던 행낭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전표였다.
그는 전표 한 장을 외숙 앞에 내 밀었다.
“정주의 대륙전장에서 발행한 은자 천 냥짜리 전표예요. 내가 이걸 외숙에게 줘도 외숙은 유화를 촌장 집에 시집 보낼 거예요?”
“…….”
이우석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전표와 연적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촌장 아들 석우대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다.
더구나 그의 후처(後妻)로 보내는 상황.
전처가 죽었으니 첩은 아니라지만, 촌장 집에는 전처가 낳은 자식들도 있다.
물론 내키지 않는 혼인이지만, 연적하의 말대로 파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전표를 받으면 조카의 말이 맞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가 자식을 파는 마을이라고?
천만에!
스스로 원해서 하는 혼인이다.
이우석은 어금니를 악물고 유혹을 참았다.
“그렇…….”
그가 막 ‘그렇다’라고 답하려는 순간이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장소미가 그의 등짝을 ‘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헛소리하지 마요! 우리 부모님 돈과 촌장이 주는 돈은 잘도 받아 써 놓고! 조카님 도움은 왜 거절하려고 그래요? 촌장에게 빚이 없어도, 유화가 그곳에 시집가겠다고 할 것 같아요? 유화가 당신처럼 멍청한 줄 알아요?”
이를 악물고 있던 이우석이 이유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화야. 너는 정말 빚 때문에 석우대와 혼인하려고 했었느냐?”
“아버지가 나라면 혼인하고 싶겠어요? 아버지보다 더 나이 많은 남자와? 그의 아들딸들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고 계세요?”
“그, 그래서 몇 번이나 너의 의견을 물었잖느냐? 나는 네가 정말 그와 혼인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물었어도 언제나 같은 상황이었잖아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싫다고 해요.”
“…….”
“그리고 촌장님이 후덕한 분이시라고요? 아니에요. 그분은 손해날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세요. 그걸 알기 때문에 저는 거절하지 못했던 거예요.”
이우석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의 병으로 큰 빚을 졌고, 그 빚이 마음에 걸려 자기 선에서 거절하지 못했다. 딸도 그 혼사를 받아들여 내심 다행이라 여겼건만…….
그때 호기심 많은 이시화가 전표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오빠, 이게 진짜 돈이에요?”
“어.”
“와아! 이게 천 냥이나 된다고요? 오빠 엄청 부자였구나! 이거 정말 우리 주는 거예요?”
“아니. 그냥 물어본 거잖아. 그걸 준다 해도 시집을 보낼 거냐고.”
연적하가 돌려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시화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전표를 건넸다.
연적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전표를 다시 행낭에 갈무리했다.
놀란 이우석이 고개를 쳐들었다.
천 냥짜리 전표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돈 있다고 우릴 희롱하는 거냐?”
“아닌데요.”
“그럼 뭐하는 짓이냐?”
“가족까지 팔아먹는 이기적인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요. 돈 있다고 아무에게나 막 퍼 주지는 않잖아요. 나에게도 돈을 쓰는 기준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기준에 미달이다?”
“잘 아시네요.”
“없는 살림에 죽어 가는 자식 살려 보겠다고 빚을 진 게 죄냐? 내가 강제로 유화를 시집 보내려고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요. 유화를 앞세워 빚을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죠. 나에게 보여 봐요. 외숙이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그럼 혹시 모르죠. 내 행낭에서 전표가 다시 나올지도.”
***
부양과 회남의 경계.
초강호.
이른 아침.
스물다섯 명의 무사들이 호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산도 이철산 일행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철산이 약대몽 행수에게 말했다.
“분명 회남은 아닐 테고, 이 근처 어디에 본거지가 있을 겁니다.”
“제가 사람들을 풀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약대몽 행수는 상방 무사들 중에 다섯을 추려 내보냈다.
다섯 명의 무사들은 마을과 주변을 염탐하고 정오 무렵에 돌아왔다.
그들 중 하나가 대표로 말했다.
“이 대협, 반야장이라는 곳에 외부에서 온 무인들이 머무르고 있다 합니다.”
“반야장요?”
“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장주가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마을 사람들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타지 사람이 사들였다는 정도밖에.”
“숫자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요?”
“사십여 명 가까이 된다고 하니 벽호방과 대부방인 것 같습니다.”
이철산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벽호방과 대부방은 삼류 방파라 사십여 명이라는 말에도 두렵지 않았다.
“가 봅시다.”
한 식경(약 30분)쯤 걸었을까?
이철산 일행의 앞에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장원이 나타났다.
정문 현판에 적힌 글자는 반야장.
현판 글자를 보고 있던 구천노도 심통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이철산이 의아한 얼굴로 심통을 돌아보았다.
“글자를 새긴 사람의 공력이 실로 비범해 보여서 그렇네. 저런 공력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외진 장원의 주인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구먼.”
“하하! 그래도 심 노인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뭐, 그야 그렇지만.”
심통이 뿌듯한 얼굴로 빳빳하게 목을 세웠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저런 경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뛰어난 안목은 물론, 설사 상대가 칠파이문의 장문인급이라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대문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간 이철산이 손끝으로 대문을 슬쩍 밀었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