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65
465회.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
곡성과 아침까지 술판을 벌이고 겨우 잠들었던 명월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손님이 먼저 일어나기 전까지 무덤처럼 고요하던 별채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래…….”
궁도방이 옥로점(玉露店)의 관리를 맡은 뒤로 조용했는데 웬 소란인지 모르겠다.
잠결에 곡성이 몸을 뒤틀었다.
명월은 드러난 그의 얼굴을 사랑이 담뿍 담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완전히 잠에서 깬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막 바깥을 내다보려고 할 때다.
콰앙!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열렸다.
뒤이어 호위무사인 도장호의 머리가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깬 곡성은 머리를 흔들어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곡성을 발견한 도장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방으로 밀고 들어가 곡성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명월이 뾰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왜 이래요! 미쳤어요?”
“뭐야? 도 호위?”
곡성은 황망 중에 도장호를 알아보고 눈을 끔뻑였다.
별채에 머무르는 동안 안면을 익혔는데 갑자기 왜 불구대천의 원수 대하듯 할까?
“도 호위? 내가 네놈 친구냐?”
말과 함께 도장호는 알몸 상태인 그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꺄악!”
명월이 비명을 지르자 도장호가 그녀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네년도 함께 끌려가고 싶으냐?”
서슬 퍼런 그의 말에 명월은 찔끔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궁도방과 옥로점의 관계가 좋았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물어뜯던 명월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곡 가가가 옷이라도 입게 해 주세요.”
뒤늦게 곡성이 알몸임을 깨달은 도장호는 그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야야야! 호위가 사람 잡네!”
곡성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옷을 집어 와 곡성의 손에 쥐어 주었다.
곡성은 입으로 연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부지런히 옷을 걸쳤다.
이윽고 곡성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도 호위, 아니, 도 대협. 나에게 왜 이러는 거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도장호는 대답 대신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도장호는 곡성을 구천노도 앞에 꿇어앉힌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곡성은 노인의 안색을 살피며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이 늙은이가 나를 찾아온 것 같은데 누구지?’
최근에 한 일이라고는 어리바리한 서생의 마차를 훔쳐 달아난 게 전부다.
‘설마 그 서생 놈이 사람을 고용했나?’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배보다 배꼽이 큰 까닭이다.
말과 마차 값보다 무림인을 부리는 게 훨씬 비싼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르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해입니다.”
그는 일단 발뺌부터 했다.
심통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네 이름이 곡성이렷다. 얼굴만 봐도 네가 곡성이라는 걸 알겠다. 참으로 인자하게 생겼어.”
“아이고!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소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요?”
심통의 칭찬에 곡성은 깜빡 착각하고 말았다.
자신에게 시킬 일이 있어 찾아온 거라고.
“용무가 있지. 암. 너 이놈. 연 공자님의 마차를 훔쳐 간 게 네놈이렸다?”
“…….”
‘연 공자’라는 말에 곡성의 눈이 흔들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서생이 무림인을 고용했던 모양이다.
“연 공자님이라니요?”
그는 습관적으로 시치미를 뗐다.
포악한 무림인 앞에서 누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한단 말인가.
“남직례성까지 네가 모시기로 했던 분을 벌써 잊었나 보구나. 괜찮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하게 될 테니.”
“나으리, 소인은 정말로 그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곡성이 순후한 눈망울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모른다고 밀어붙이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 달아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수작이 녹림의 대마두인 심통에게 통할 리가 없다.
“흐흐. 귀여운 놈. 잘못을 빌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시치미를 떼?”
말과 함께 심통이 손가락으로 곡성의 혈도를 푹푹 찍었다.
순간 곡성이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으드득. 으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곡성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분근착골이었다.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심통은 곡성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자 해혈을 했다.
“커헉! 컥!”
눈물 콧물 흘리며 캑캑거리던 곡성이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쇼! 나리!”
“이제 기억이 나느냐?”
“예, 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돈을 돌려 드리겠습 니다.”
“돌려줄 돈은 있고?”
“…….”
곡성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동안 기루에서 펑펑 써 대는 바람에 남은 돈이 별로 없어서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심통의 손가락이 재차 곡성의 몸을 찔렀다.
다시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간 곡성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곡성의 숨소리가 희미해지자 심통이 해혈을 했다.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린 곡성은 심통에게 네발로 기어갔다.
“제, 제발 살려 주십쇼. 나으리.”
“너의 생사 여부는 내가 아니라 연 공자님이 결정하실 것이다.”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심통이 도장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루에서 기다리겠다. 저놈의 옷을 갈아입힌 후에 데리고 오거라.”
“존명!”
도장호가 곡성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킨 후에 방으로 끌고 갔다.
도장호에게 곡성을 맡긴 심통은 느긋하게 옥로점 본채로 걸어갔다.
명월이 어디서 구했는지 사내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꿰입던 곡성이 도장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도 대협. 저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녹림의 구천노도 님이시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허튼 생각 하지 마라.”
“구, 구천노도 님이시라고요? 그런 분이 왜…….”
“왜냐고?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어도 그렇지. 녹림 태상호법님의 마차를 훔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우리 방주님이 알았다면 네놈으로 육젓[臨]을 만들어 바쳤을 것이다.”
“헉! 그럼 연 공자님이…….”
곡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일반인인 그도 녹림의 연 공자가 얼마나 악질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 녹림의 그 연 공자님이시다. 이 미친놈아.”
곡성은 묵묵히 옷을 마저 입었다.
녹림 태상호법의 마차를 훔쳐 팔았으니 곱게 죽기는 틀렸다.
구천노도의 손에서 달아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파인 호천맹을 피해 숨어 살 수는 있으나 녹림은 그게 안 된다.
뒷골목을 꽉 잡고 있는 하오문과 사파가 녹림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도장호가 육젓으로 만들어 바쳤을 거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파의 말단인 궁도방은 녹림에 잘 보이기 위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정오 무렵.
팔황신모는 ‘환년익명(還年益命, 수명을 늘려 주는 도술)’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완독하는 데 며칠이나 걸릴 정도로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이 없었다.
팔황신모는 ‘환년익명’ 아래 깔려 있던 얇은 책을 잡았다.
금일상방에서 보낸 고서는 총 세 권.
마지막 권을 집어 든 팔황신모는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구전범천전생록(俱全梵天轉生錄)?”
‘전생(前生, 이전의 생)’도 아니고 무려 ‘전생(轉生, 다른 생)’ 이란다.
“이런 경전도 있나?”
전생(前生)에 관한 담론이야 종종 보았지만 전생(轉生)은 처음이다.
대안탑(大雁塔)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면 소설로 치부했을 게다.
팔황신모는 가벼운 마음으로 ‘구전범천전생록’을 읽어 나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구전범천’이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여러 세계[天]를 두루 살아온 이야기다.
그가 득도한 뒤로 ‘광과천(廣果天)’, ‘변정천(遍淨天)’, ‘광음천(光音天)’ 등을 거치며 살아온 기록이니 전생(轉生, 다른 것으로 태어남)이라 할 만했다.
피식피식 웃으며 한 장씩 읽어 나가던 팔황신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재천(王在天)?”
‘왕이 있는 하늘’이라니? 어딘지 ‘왕들의 하늘’과 비슷한 느낌이 아닌가.
“일흔두 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세계라니, 묘하구나.”
간간이 왕들 간의 알력에 대한 묘사가 나왔다.
천계(天界)라는 것만 제외하면 인간세계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쯧쯧! 득도를 해서 천계의 왕이 되고도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한 건가.”
허무맹랑한 내용에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스승도 자신의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까.
‘왕재천’은 일흔두 명의 왕에 대해 간략히 묘사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중 한 구절에서 팔황신모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리과사(伊利文斯)는 한 손에 창을 들고 흑마를 타고 있다?”
계속 읽으니 ‘투구를 썼는데 눈에서 지옥의 겁화가 쏟아져 나왔다’고 적혀 있다.
팔황신모는 거기까지 읽고 신당 문을 슬며시 밀었다.
덜커덩.
마당에 서 있던 흑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팔황신모는 무심코 말했다.
“이리과사?”
“…….”
흑기사는 묵묵부답이었지만 팔황신모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구전범천’이라는 수행자가 만난 ‘왕재천’의 ‘이리과사’라는 것을.
“누가 있느냐?”
그녀의 부름에 팔황의 일인인 육통존자(六通尊者)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
“금일상방의 방주와 만나야겠으니 그를 데리고 오거라.”
“예.”
육통존자가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방문을 닫으려던 팔황신모의 시선이 문득 흑기사를 향했다.
“그대는 일흔두 명의 왕들 중에 하나인가요? 아니, ‘왕재천’이 ‘왕들의 하늘’인지 아닌지만이라도 말해 줘요.”
그러나 흑기사는 지옥의 겁화 같은 눈으로 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씁쓸한 눈으로 흑기사를 보던 팔황신모가 손을 휘젓자 문이 닫혔다.
***
남직례성 합비.
남궁세가.
천람소축(天覽小築).
사시 정(오전 10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던 십전무후 남궁연이 고서에서 눈을 뗐다.
백화상방의 백선화가 두고 간 상자에 들어 있던 책은 모두 다섯 권.
그중에 지금 막 세 권째를 읽었다.
이제 남은 건 두 권.
다행히 아직은 현장 법사와 관계되었다고 여길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
제목을 읽어 나가던 남궁연이 그린 듯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범천’도 알고, ‘욕계’도 알지만, ‘왕재천’은 금시초문이다.
그녀가 막 책장을 넘길 때다.
“연 누님.”
마당에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연은 미련 없이 책장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당장 두 권을 독파하기 어려우니 이참에 잠시 쉴 생각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연적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방해한 거 아니죠?”
“응. 잠시 쉬려던 참이야.”
“책은요? 대자은사에서 나온 거 아니죠?”
“다섯 권 중에 세권을 읽었는데 아직은 특별한 점이 안 보여.”
“서안에 대자은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아닐 거예요.”
“후훗. 나도 아니길 바라.”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비가산과 잇닿아 있는 가산(假山)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