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78
578회. 목숨만은 살려 주마
소요종에서 원요의 위치는 애매하다.
오십 대 중반에 연허 팔 성이니 뛰어난 성취지만 소요종의 후기지수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스승도 없다.
소요종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제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게 스승을 모시지 못한 사람들은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는다’ 함은 단지 치열함의 비유가 아니다.
종문 제자들 간의 영기 강탈과 살인, 그리고 다음 경지로 올라가지 못하면 노화(爐火)로 죽고 마니 실로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대체로 스승을 모신 사람들보다 비정했다.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뺏고 뺏기는 일에 익숙했고, 한번 먹잇감으로 생각하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원요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에게 신수가 들어 있는 단검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보물이었다.
상위의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영기가 필요하다. 영기를 구하려면 심산유곡을 제집처럼 돌아다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신수가 들어 있는 단검이라면 야수의 걱정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은밀하게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선수 치기 전에 한 걸음 먼저 가져갈 작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웬 날파리들이 연적하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흥! 몸에서 비린내가 풀풀 나는 걸 보니 흑점(黑店, 인육을 파는 곳)에 속한 놈들이구나. 꺼져라.”
그가 흑점의 잡배들을 쫓아낸 것은 무슨 정의감 때문에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 모두가 덤벼도 연적하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연적하를 ‘연허 초입’으로 봤다.
연허에 든 고수가 고작 흑점의 잡배들에게 당할 리 있나.
그럼에도 그가 나선 것은 단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소요종 고수들에게 돌아가야 하니까.
물론 저들의 죽음으로 불필요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싫었고 말이다.
연적하를 노리던 흑점의 잡배들이 송사리 떼처럼 놀라 흩어졌다.
잠시 후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저것들 흑점에서 나온 거 맞아요?”
원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비린내를 맡지 못했느냐? 사람을 도살하는 자들 특유의 냄새다.”
“와아. 난 그냥 ‘몸 냄새 참 더럽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사람 도살자들 냄새였구나.”
“흑점의 사람들을 처음 보느냐?”
“예.”
“집안이 좋은가 보군. 하기야 그러니 그런 기물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원요가 묘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신수가 들어 있는 단검은 가문의 보물이리라.
대체 어떤 대단한 집안이기에 그런 보물을 가지고 있는 걸까?
연적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뼈대 있는 집안이었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냐?”
“예. 쫄딱 망해서 사라졌어요.”
순간 원요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집안이 망해서 사라졌다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행여나 집안 배경이 좋았다면 인맥을 동원해 귀찮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 곽 진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단검에 신수가 들어 있다고? 노부도 한번 볼 수 있겠느냐?”
그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적하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였다면 고분고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녹림 출신.
본래 도둑놈들이 남 도둑질하는 건 못 본다.
“설마 내 단검을 구경하겠다고 이 밤에 혼자 돌아온 건 아니죠?”
“그건 무슨 소리냐?”
“내 단검을 노리고 돌아왔냐고요.”
“…….”
원요는 즉시 답하지 않고 연적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낯뜨거운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러니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에게 너의 그 단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뻔뻔하시네.”
“강한 자가 하는 일은 무엇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뻔뻔이니, 원통이니, 복수니, 하는 것들은 약자들의 푸념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단검을 주고 조용히 살아라?”
“만에 하나 네가 소요종의 제자가 된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 주겠다.”
“내가 소요종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냥 입 씻겠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어차피 너에게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편안하게 살 수는 없을 게다. 소요종 제자가 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노사님? 내가 호구로 보이죠?”
“능력이 없으면 호구로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단검을 넘길 생각이 없나 보구나. 욕심이 많은 자로다. 때론 보물을 가진 것이 죄가 될 수도 있거늘.”
“그러니까 내가 죄인이다?”
“‘비승과해’에 참가한다니 목숨만은 살려 주마. 하지만 단검은 노부가 가져가야겠다.”
“목숨을 살려 준다니 고마운데, 내가 소요종에 노사를 고발하면 어쩌시려고?”
“후후!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너는 종문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종문은 관청이 아니다. 오히려 구주에서 약육강식의 규칙이 가장 엄격하게 지켜지는 곳이지. 네 단검을 되찾고 싶으냐? 그렇다면 닥치고 조용히 수련하는 게 좋을 게다. 행여나 소문이 나서 진인이나 노조가 알게 되면, 네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 버릴 테니까. 진인이나 노조보다는 나를 상대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느냐?”
연적하가 뜨악한 눈으로 원요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종문 제자들은 죄다 강도나 마찬가지다.
뺏어도 죄가 되지 않는 곳이라니? 이게 무슨 행복한 소리인지 모르겠
하지만 그건 원요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종문에 법을 관장하는 조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 간에 강도짓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몹쓸 짓을 하면 배척받고, 결국은 도태된다.
그러니까 자정(自淨)에 맡긴 것이지 무법이 판을 친 것은 아니다.
원요가 말한 약육강식이 적용되는 것은 결투다.
정당한 결투와 그 결과로 영기를 빼앗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종문 제자들은 영기 갈취를 더 큰 강물에 합쳐지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니 죽어도 죽는 게 아니며, 빼앗겨도 빼앗기는 게 아닌 셈이다.
“너는 단검을 자발적으로 내어 놓을 테냐? 나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는 수고를 끼칠 테냐?”
원요의 말에 연적하는 정신을 차렸다.
종문의 제자들은 물건을 강탈할 때도 표현이 남달랐다.
“가져갈 능력은 되시고?”
연적하의 말이 묘하게 바뀌었다.
존중은 사라지고 녹림의 동업자를 대하는 모습이다.
원요 역시 연적하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읽을 수 있었다.
‘연허 초입’답게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 않을 모양이다.
하기야 자신도 저 때는 천하가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믿고 오만방자했었다.
원요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를 보니 그 말의 뜻을 알겠다. 오늘 세상이 왜 소요종을 두려워하는지 가르쳐 주마.”
원요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연적하도 품 안에서 청사(靑蛇)를 꺼내 들었다.
“나한테 깨지기 전에 다들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내가 맞고 다니게 생겼나 봐.”
단검을 본 원요의 눈이 탐욕에 물들어 갔다.
그는 단검의 신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검에 단지 신수의 격(格)이 깃들어 있을 뿐이라 생각해서다.
야수들이야 그 신격에 지레 겁먹고 달아났지만 인간은 다르다.
신수가 직접 인간을 공격한다면 모를까?
바보도 아니고, 대체 누가 신수의 격에 놀라 달아난단 말인가!
이윽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원요는 몰랐지만 이 싸움은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쾅. 쾅. 쾅. 쾅-.
원요의 검에 깃든 검강과 청사의 검강이 만나자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검법도 없이 무식하리만치 정직하게 검격을 나누었다.
원요는 반각(약 7분)이나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상대가 꿋꿋하게 맞서 오자 뒤로 훌쩍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검 끝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소요종 중급 검공 천동굉지(天動轟地)의 기수식이다.
연적하가 눈매를 좁히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거 어디서 본 건데.’
문득 원상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은하고검 천승학의 제자가 펼쳤던 검법이 꼭 저랬다.
밤하늘에 구름이 소용돌이치더니 검기가 쏟아져 내렸다.
쿠쿠쿠쿠쿵-.
원상한보다 훨씬 빠르고, 많은 검기였다.
연적하는 즉시 머리 위로 구천세법 사 식 풍화겁륜(風火劫輪)을 펼쳤다.
콰르르르-.
화기를 머금은 검풍이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며 머리 위로 떠올랐다.
풍화겁륜에 휘말린 원요의 검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쾅! 콰쾅!
폭음과 함께 검기에 직격당한 객점의 벽이 터져 나갔다.
잠자리에 들었던 손님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싸움이 워낙 흉흉해서인지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적하가 기이한 검풍으로 천동굉지를 막아 내자 원요의 얼굴이 굳었다.
천동굉지의 무겁고 단단한 검기가 검풍에 막히다니?
이제는 상대가 정말 ‘연허 초입’인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연적하의 얼굴을 보니 여유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상급 검공인 낙일귀망(落日零A)을 펼쳐야만 승패가 갈릴 것 같다.
그는 즉시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검을 아래로 그었다.
낙일귀망이다.
촤아아아-.
하늘에 모였던 검기가 그물처럼 퍼지며 풍화겁륜의 거대한 수레바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검기의 그물인 귀망(晷罔)이 풍화겁륜을 덮어씌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화기를 머금은 검풍에 오히려 귀망이 빨려 들어갔다.
가가가각-.
‘헉!’
원요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낙일귀망의 검기가 수레바퀴처럼 소용돌이치는 검풍에 찢기고 있었다.
낙일귀망을 익힌 뒤로 이렇게 황당한 경험은 처음이다.
소요종의 상급 검공이 검풍 따위에 갈려 나가다니?
낙일귀망은 자신의 최고 절기인지라 갈려 나가는 걸 보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원요는 저 수레바퀴 같은 검풍이 멈추기를 기대하며 한 번 더 검을 떨쳤다.
촤아아아-.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귀망은 마치 칼날에 들이민 명주실처럼 툭툭 잘리고 해체되어 소멸했다.
밤하늘에 더 이상 검망이 보이지 않자 연적하는 검끝을 원요에게 돌렸다.
쿠르르르-.
붉은 수레바퀴가 이번에는 원요를 향해 굴러갔다.
대경실색한 원요는 미친 듯 몸을 날려 수레바퀴를 피했다.
바닥까지 한 바퀴 구른 원요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너무 수레바퀴에만 신경을 쏟았나 보다.
연적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에?’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는 그의 뒤에 유령처럼 연적하가 솟아났다.
나타남과 동시에 연적하의 주먹이 원요의 뒤통수에 박혔다.
퍽!
눈앞에서 빛이 번쩍한 순간, ‘연허 팔 성’의 원요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끙!”
새벽 미명에 원요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려진 폐가의 마구간이었다.
연적하와 칼을 맞대고 싸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그 이후를 기억해내려던 그는 뭔가 허전한 느낌에 몸을 더듬었다.
‘응? 없다?’
마치 취중에 노상강도라도 만난 것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돈주머니와 비상약, 부적꾸러미는 물론, 부싯돌과 부싯깃같이 자잘한 것조차도 없었다.
심지어 애지중지하던 검조차 보이지 않는다?
뭔지 몰라도 깨끗하게 털렸다.
설마 강도를 만났을 리는 없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니지? 아닐 거야.’
‘비승과해’의 참가자가 소요종 고수를 털어 갔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리라.